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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결산하는 시즌이 돌아왔다. 여러모로 전무후무한 사건들이 많았던 1년인 만큼 어떤 방식으로 2020년을 마무리해야 할지 고민이 깊다. 무엇보다 올해는 관객 개개인이 영화를 관람하는 패턴이 완전히 달라졌다. 영화를 만나는 플랫폼이 그 어느 때보다 다채로워졌으며 영화를 처음 접하는 시기도 개봉 직후부터 수개월 뒤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11월 말부터 집계 중인 <씨네21> 올해의 베스트 영화 설문 방식 또한 변화가 불가피했는데, 필자들로부터 어떤 리스트를 받게 될지 사뭇 궁금하다. 이번호부터 12월 셋쨋주 발행될 송년호까지 이어질 다양한 결산 기사에 주목해주시길 바란다.
연속 결산 기사의 시작을 알리는 이번호 특집의 주제는 ‘배우’다. <씨네21>은 매년 올해를 빛낸 남녀 배우와 신인배우를 선정해 소개하고 있지만 짧은 선정의 변에 배우들의 특별한 순간을 담아내기엔 아쉬움이 크다고 느꼈다. 더불어 코로나19라는 극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해
[장영엽 편집장] 2020년의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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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카일리 미노그를 모르는 20대 친구에게 “카일리 미노그는 호주 엄정화 같은 존재야”라고 했더니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1988년에 데뷔했으니 이제 카일리 미노그는 팝 아이콘이라기보다 전설 속 이름에 가깝다. 그런데 카일리 미노그도 마돈나처럼 전설에 머물지 않는다. 때가 되면 지치지 않고 나타나 새로운 세대에 강력한 펀치를 날린다. 데뷔 13년 후, 2001년에 발표한 싱글 《Can’t Get You Out of My Head》는 그녀의 이름보다 훨씬 더 유명한 후렴으로 전세계 어딘가에서 여전히 흐르고, 이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올해 발표한 15번째 신보 《DISCO》 역시 정통 팝 디스코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낸다.
지난해부터 해외 팝 시장에서는 유난히 디스코가 강세를 띠는데, 올해 들어 레이디 가가, 두아 리파, 제시 웨어 등 여성 팝 뮤지션은 물론이고 방탄소년단까지 디스코 베이스의 레트로 팝에 가세했다. 이 가운데 카일리 미노그는 《DISCO》에
[Music] 뱅글뱅글 디스코는 오늘도 - 카일리 미노그 《DI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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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페이스북 페이지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에 올라오는 글들을 흥미롭게 읽는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혐오 표현을 돌아보자는 이 캠페인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제안했다. ‘확찐자, ◯밍아웃, 결정장애, 장애우, ◯린이, 거지 같다, 건강하세요’ 같은 말을 사용하는 데 신중을 기하게 됐다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언어에 예민하고자 노력하지만, 무심코 쓴 표현이 부끄러웠던 경험은 내게도 있다.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주장을 펼치는 내 글에 ‘전장’(戰場), ‘전선’(戰線) 같은 군사 용어가 종종 등장한다는 점을 나는 최근에야 의식했다. 병역거부운동을 통해 군사주의에 반대하고 ‘평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시민단체 ‘전쟁없는세상’의 활동을 접하면서부터다. 전쟁의 심상을 손쉽게 소환하는 일에 신경 쓰게 되자, ‘핵노잼’, ‘핵꿀잼’ 같은 유행어들도 심상치 않게 여겨졌다.
낯선 대상을 친숙한 대상에 빗대 표현
[오혜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불완전한 언어와 투명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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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티 플레저에 대한 수요는 언제나 일정 이상 존재한다. NQQ와 디스커버리 채널 코리아에서 방송되는 예능 프로그램인 <스트레인저>는, 2014년 한 출연자의 사망으로 종영된 SBS <짝>을 연출했던 남규홍 PD의 신작이다. 출연자들은 ‘SV(스트레인지 빌리지) 133’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숙소, 즉 애정촌에 모여 며칠간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남자 1호’, ‘여자 3호’ 대신 ‘미스터 염’, ‘미스 김’ 등의 성으로 칭한다.
기이한 상황을 차분하면서도 매혹적인 저음으로 전달하는 <짝> 특유의 내레이션도 그대로다. 감자를 80kg에 가깝게 담는 미션에서 혼자 격앙되어 규칙을 깨고 무작정 많은 감자를 모은 남성의 의아한 행동 위로 우아한 음성이 울려 퍼진다. “투우사와 소는 존재만으로도 경기장을 압도한다. 인정한다. 오늘 감자와 미스터 윤의 만남도 그랬다는 것을….”
인정하자. <스트레인저>는 낯선 이들이 만나 로맨스를 꽃피우고
'스트레인저', Hello 아니 Hell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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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없는 남자> The Man Without a Past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 제작연도 2002년 / 상영시간 97분
도시 강변의 버려진 땅에 흙을 일궈 감자 몇알을 심는 남자가 있다. 남자는 불의의 사고로 기억을 잃고 이름과 살아온 과거까지 모두 잃었다. 시간이 흘러 감자가 꽃을 피우고, 그사이 그도 임시 거처와 직업을 마련한다. 또 이웃을 얻고 어느 여인의 사랑도 얻는다. 그는 수확한 감자 여덟개 중 세개는 겨울을 위해 비축하고 두개는 씨감자로 사용하며 나머지 세개는 연인과 먹을 예정이다. 이웃이 찾아와 하나만 달라고 하자, 남는 게 없다 하면서도 반쪽을 잘라준다.
이 소박한 성취, 소박한 계획, 소박한 나눔이 어쩌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담담하지만 쓸쓸한 시선으로, 희망보다는 절망의 감정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다루어온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영화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 그 어느 영화에서보다 적극적으로 연대와 희망을 이
[김호영의 네오클래식]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과거가 없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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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프리키 데스데이' 돌아버린 바디체인지
[정훈이 만화] '프리키 데스데이' 돌아버린 바디체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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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다가오면 가끔 생각나는 풍경이 있다. 지금은 사라진 예술영화관 하이퍼텍 나다에서 연말마다 개최하던 영화 기획전 ‘나다의 마지막 프로포즈’를 보기 위해 대학로를 가로지르던 모습이다. ‘나다의 마지막 프로포즈’는 대개 기말고사가 마무리되던 시기에 시작했기 때문에, 대학생이던 나는 마치 연말 선물을 받는 기분으로 한해의 주목할 만한 독립예술영화를 연달아 상영하는 이 기획전에 참석하곤 했던 것 같다.
극장에 앉으면 유리창 밖으로 소담스러운 정원과 장독대가 보이고, 영화가 시작되기 전 촤르륵 소리를 내며 닫히는 커튼이 인상적이었던 하이퍼텍 나다는 그곳에 잠시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관객으로서 소중히 여겨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극장이었다. 멀티플렉스처럼 일상적으로 찾는 공간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느낀 사려 깊은 관람 경험이 영화의 곁에 오래 머무르는 데 모종의 영향을 주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화를 사랑하는 누구에게나 그들 각자의 영화관이 있다. 이번호 특집에는 11월
[장영엽 편집장] 내 마음속의 독립예술영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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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뮤지션들은 다 외워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불필요해서 악보 없이 무대에 오른다. 최소한의 틀만 가지고 즉석에서 변주, 발전시켜가는 방식으로 연주하기 때문이다. 직접 손을 놀리기 전까지는 연주자 자신도 어떤 음악이 만들어질지 모른다는 이 즉흥성이 재즈라는 장르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재럿의 솔로 콘서트 시리즈는 이 특성이 궁극으로 확장된, 가장 창조적인 형태의 음악이다. 전통적인 재즈가 메인 테마가 되는 멜로디, 12마디의 정해진 코드 진행을 따르며 즉흥연주를 더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면 그의 독주회는 연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간적인 영감에 의해 연주된다. 재즈라는 장르가 규칙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진화했다고는 해도, 100% ‘나오는 대로’ 만들어지는 음악은 처음 선보인 1973년 당시로서도 파격이었고 현재까지도 키스 재럿 고유의 스타일로 남아 있다.
과거에 작곡 혹은 레코딩된 음악을 끄집어내는 행위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콘서트라면, 그는 정확히 반
[Music] 그 순간들을 나누었다 - 키스 재럿 《Budapest Conc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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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0일은 김민식 작가의 칼럼 때문에 난리가 난 날이었다. 작가가 사과문을 썼고, <한겨레>도 이례적으로 두 차례에 걸친 사과문을 쓰고 칼럼을 삭제했다. 물론 작가의 사과문은 여전히 비판받을 만했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에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아 보이긴 했다.
문제의 칼럼은 무려 ‘지식인의 진짜 책무’라는 제목을 달고 아버지의 폭력 이야기로 글을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글은 이미 잘못된 방향으로 출발한 셈이다. 아버지에게 맞은 이야기를 책에 써도 아버지는 보지 않으니 괜찮다, 어머니는 팔순이 되어서도 내 책을 다 필사하실 정도로 열심히 읽으시는데,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 많은 데다 책을 많이 읽어서 아버지에게 ‘존중 없이’ 말을 하니 아버지는 ‘손찌검’을 한다, 나는 어머니가 안타까웠고, 그건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정서적 폭력’이었다, 더 똑똑한 어머니가 끌어안아주었어야 한다, 라는 전개로 지식인의 계도적 자세를 비판했다. 비유부터 논리까지 총체적으로 문
[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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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이 바짝 마른 산모가 오래 참아온 아이스아메리카노(이하 ‘아아’) 한잔을 주문한 참이다. 배가 눈에 띄는 임신부 때는 그가 뭘 먹고 마시는지 참견하는 사람 천지라 카페에서 디카페인 커피 반샷으로 달라 속삭여도 어디선가 나타난 귀 밝은 자가 엽산이 풍부한 키위 주스를 마시라고 훈수를 두었다. 출산 후엔 찬 것 마시면 이가 빠진다고 ‘아아’를 압수당한 산모는 결국 미역국을 들이켰다.
회사에선 42살 최연소 상무 자리에 오르고, 산후조리원에선 최고령 산모가 된 오현진(엄지원)은 내 또래 여성이다. 아이가 없는 나는 선의를 앞세운 타인의 오지랖에 같이 진저리치는 정도의 공감뿐이겠지만, 출산하다 만난 저승사자를 강물에 메다 꽂고 사후세계에서 산후세계로 진입한 현진을 따라 tvN 드라마 <산후조리원>을 들여다봤다.
“젖을 위해 먹고 젖을 위해 운동하고 젖을 위해 마시고 젖을 공부하고 젖을 마사지하는 참으로 젖과 같은 천국.” 현진은 ‘세레니티 산후조리원’ 일정을 따라가다
<산후조리원>, 모성에도 ‘계급’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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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홍콩에 다녀왔다. 여행 첫날, 나는 맹렬한 검색 끝에 장국영이 자주 들렀다는 어떤 카페 하나를 찾아냈다. 솔직히 확신은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다녀온 곳에 정말로 장국영이 있었을까? 다녀갔을까? 자주 왔을까? 그건 단지 일종의 풍문, 소문, 그러니까 일종의 전설에 불과한 건 아닐까. 누군가는 장국영이 아니라 주윤발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배우들의 단골 카페가 아니라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한 장소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그 카페에 정말 가고 싶었다. 왜냐하면 사진 속 카페의 풍경은 어린 시절, 명절 때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던 홍콩영화들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도시와 어두운 밤, 고독한 식사와 나른한 목소리, 좁은 테이블과 두툼한 머그잔. 선정적인 부분을 잘라내고 한국어 더빙을 입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가 막히게 재밌었던 그 영화들.
좋았다. 그 카페에서 경험한 모든 순간이 정말로 좋았다. 옛 시절을 그대로 보존해놓은 듯한, 그러나 분명 ‘현재
[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전설 속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