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축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만큼 1월 1일이 오길 간절히 기다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뒷자리 숫자가 하나 바뀐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많은 것들이 변할 리 없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뒤로하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을 의지를 주는 새해맞이 ‘리셋’의 효과가 올해는 더 절실했으니까. 그러나 새 출발의 산뜻한 기분을 만끽할 새도 없이 팬데믹 시대의 엄혹한 리얼리티는 겨울바람처럼 매섭게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새해 벽두부터 대한민국을 분노로 들끓게 한 정인이 사건을 시작으로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하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미국 국회의사당 습격까지 그야말로 다이내믹한 사건 사고를 릴레이로 접하고 나니 일시적인 기분 전환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떤 일을 겪게 되더라도 일시에 무너지지 않도록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일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을 바꿀 수 없을 때, 현실이 아닌 세계로의 도피는 꽤 유용한 출구가 된다. 2021년 출격을 앞둔 많은 한국영화 신작들이 우주로(<
[장영엽 편집장] 한국영화의 경이로운 미래를 꿈꾸며
-
스티븐 킹은 셜리 잭슨의 <힐 하우스의 유령> 첫 문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영어로 쓰인 것 중에서 이 글보다 조금이라도 더 정교한 서술문은 거의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단어의 한계를 초월한 단어들, 부분들의 총합보다 훨씬 더 거대한 전체를 이루는 단어들.”(스티븐 킹, <죽음의 무도>, 황금가지, 2010)
또한 그는 <힐 하우스의 유령>이 지난 100년간 등장한 초자연적 소설들 중 가장 훌륭한 작품 두편 중 하나라고 말한다(나머지 한편은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이다). 나는 영어 서술문의 구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첫 문단이 훌륭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무엇이든 저택 안을 걸어갈 때는 항상 혼자이다.”
이 마지막 문장에 담긴 깊은 공포는, 스티븐 킹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언어를 초월해서’ 내게 도달했고, 그 기분은 책을 읽는 내내 계속됐다.
이 서술문은 드라마 <힐 하우스의 유령&
[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혼자 걷는다는 것
-
머리가 곱슬곱슬한 사람들이 모여 국물용 멸치 대가리를 따고 있다. OCN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에서 ‘언니네 국수’를 꾸려가는 이들은 점심 장사를 마치면 인간의 몸에 들어간 악귀를 사냥하는 ‘카운터’로 활동한다. 고등학생 소문(조병규)은 어느 날 머리가 곱슬곱슬해지는 일을 겪고 국숫집에 불려왔다. 후천적 곱슬머리는 저승과 연결되어 그 힘을 받은 이들의 공통점이란다. 악귀 잡는 일을 함께하는 동료가 되라니 소문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카운터 도하나(김세정)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필요한 말만 하고, 가모탁(유준상)은 입이 거칠다. 리더 추매옥(염혜란)이 이들을 대신해 쭈뼛거리는 신입의 이름을 참 많이 불러준다. 바로 앞에 두고도 ‘소문아, 소문이 너는, 소문이가’ 하는 식이다. 처음엔 군더더기 대사가 아닌가 싶었는데, 지긋한 목소리로 자꾸 불러주니까 가끔 눈물이 핑 도는 기분이 든다. 소문이 처음 출동한 날, 가정 폭력이 벌어지는 반지하 방 창문을 바로 뜯고 들어간 덕분에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 피해자 곁에 머무는 이야기
-
이번 신년 통권 특대호는 <씨네21> 25주년 역사상 처음으로 비대면 마감으로 제작되었다. 기자들이 출근하지 않는 사무실에서 줌으로 회의를 진행하고 원고를 읽자니 2020년에 겪어야 할 ‘처음’이 아직도 남아 있었구나 싶다. 그래도 신년 특대호의 최종 마감일이자 크리스마스이브인 오늘은 2주 만에 회사를 찾은 기자들의 근황 토크로 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마감을 진행하고 있다. 어느덧 <씨네21> 취재팀의 연말 전통이 되어버린 송경원 기자의 수제잼 증정식과 더불어 시식 후기는 SNS에만 올릴 테니 2021년에는 꼭 소셜 미디어 계정을 만들라며 송슐랭 기자를 압박하는 기자들의 티키타카가 새삼 반갑게 느껴진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차분하고 담담한 분위기의 연말이지만 독자 여러분도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이번호는 <씨네21>이 처음으로 시도하는 통권호이기도 하다. 1287, 1288호 두권 분량에 이르는 특집을 한권에 담은 스페셜
[장영엽 편집장] 2021년,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
-
서울에 산다는 감각을 가장 생생히 느끼게 하는 곳을 꼽아보라면 용산 아닐까. 남산을 끼고 둘러선 이 지역은 동네의 줄기인 산의 모양이 용과 같다 하여 이름도 용산(龍山)이 되었다. 흔히 서울의 얼굴 하면 종로를 떠올리지만, 궁과 광장으로 대표되는 그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도시인의 일상이 이곳 용산에는 남산의 능선을 따라 촘촘히 박혀 있다. 그중에서도 서울역 뒤 ‘푸른 언덕 마을’ 청파동은 서울살이의 오랜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다. 식민지 시대의 적산 가옥과 낡은 한옥 그리고 다세대주택이 좁다란 골목을 따라 공존하는 동네. 용산의 많은 곳이 유흥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청파동은 서민의 주거지로 여전한 모습을 갖고 있다.
《청파소나타》는 청파동에 사는 뮤지션 정밀아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서울에서의 삶을 노래로 빚어낸 음반이다. 세밀한 관찰과 관조하는 시선을 오가며 담아낸 서울의 모습은 소리만으로도 상당히 회화적이다. 청파동의 거리 소음으로 시작하는 첫 트랙을 따라 자연스럽
[Music] 청파동살이, 들어볼래요? - 정밀아 《청파소나타》
-
변호사는 답답해 미칠 노릇이다. 바틀비는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필사를 하고 나면 그걸 확인하는 절차가 있다는데도, 당신은 여기 직원이니 잠시 나를 대신해 우체국에 다녀와달라는데도 그의 대답은 한결같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그는 오로지 사무실 한켠에 은신한 채 오로지 필사 업무만을 하다가, 결국은 그 업무마저도 중단하고, 변호사와 바틀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물론 그 새로운 국면 속에서도 바틀비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뭘 어쩌라는 건가? 허먼 멜빌의 <바틀비 이야기>를 읽은 독자들은 생각한다. 아니, 다 안 하고 싶다고 말할 거면 회사를 왜 다닌단 말인가? 하지만 바틀비는 반복적이고 집요하게 우리의 이런 믿음을 건드림으로써, 우리가 합의하고 있는 사회적 약속이 말 그대로 ‘사회적 약속’임을, 즉 우리가 임의적으로 정한 규칙이고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님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기반을 뒤흔드는 일이기에 그는 불온한 인
[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
<걸후드>는 올해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슬픈 이야기다. 동시에 가장 흥겨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마 리한나의 <Diamonds>에 맞춰 춤을 추는 여자아이들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자유로운 시선과 몸짓, 그리고 웃음소리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이 난다. 덕분에 나는 십대 시절의 어떤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별일도 아닌 일에 큰 소리로 웃었던 일, 격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던 일,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고 또 보냈던 일. 물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이미 지나온 시간이고, 무엇보다 그런 격렬한 감정 상태를 경험하는 건 인생에서 한번으로 충분하다.
어쨌든 리한나의 음악과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기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그래서인지 그들에게 조금 더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 나는 노래가 끝나갈수록 불안해졌다. 음악이 멈추는 시간은, 마음껏 웃고 떠들던 작은 호텔방을 떠날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성장영화
[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그래도 길은 빛날 테니
-
<맨발의 청춘> 제작 극동흥업주식회사 / 감독 김기덕 / 상영시간 117분 / 제작연도 1964년
청춘영화는 196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장르였다. 1963년 <가정교사>(감독 김기덕)와 <청춘교실>(감독 김수용)의 흥행으로 촉발된 청춘영화는 1964년 <맨발의 청춘>의 폭발적인 관객 동원을 계기로 주류 장르로 등극한 후 1967년까지 장르의 생명력을 유지했다. 이러한 청춘영화의 유행이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특히 이시자카 요지로의 소설을 주목해야 한다. <햇빛 쏟아지는 언덕길>은 <가정교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1962년 내내 부동의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고, <그 녀석과 나>는 <청춘교실>로 번역되어 1963년 베스트셀러 순위를 계속 유지했다. 1963년 한국에서 영화 <가정교사>와 <청춘교실>이 만들어진 결정적 배경이다
[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일본의 이야기를 빌려 한국 젊은이들과 만나다 '맨발의 청춘'
-
[정훈이 만화] '레벨 16' 내년에는 탈출해야 할 텐데…
[정훈이 만화] '레벨 16' 내년에는 탈출해야 할 텐데…
-
올해의 영화, 영화인을 집계하는 연말 송년 설문 기간은 한해 동안 관람한 영화에 대한 정리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 작품, 저 작품을 떠올리며 영화 목록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영화의 이미지들이 겹치고 포개져 어떤 경향을 이루는 순간도 종종 마주하게 된다. 나에게 2020년의 한국영화를 상징하는 이미지는 어딘가로 헐레벌떡 도망치는 누군가의 당혹스러운 모습으로 기억될 듯하다.
<사냥의 시간>과 <#살아있다> <반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콜>에 이르기까지 올 한해 관객을 만난 화제의 한국영화에서 이러한 이미지를 만날 수 있었다. 벼락처럼 불현듯 닥친 재난 앞에서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의 탈주를 꿈꾸며 살아남기 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는 2020년의 한국영화 속 인물들의 악전고투는 코로나19 팬데믹 훨씬 이전부터 지금, 여기의 한국 사회에 디스토피아가 당도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생존 이외의 모든
[장영엽 편집장] 뜨거운 안녕
-
보아의 열 번째 앨범 《Better》는 망설이지 않는다. 첫곡 <Better>는 단 네 박자 여유를 준 뒤 확신에 찬 보아의 목소리를 묵직하게 떨어뜨린다. 영국 가수 아와의 <Like I Do>를 샘플링한 기본 골조 위로, 보아와 함께 지금의 SM 기반을 만든 작곡가 유영진의 익숙한 노랫말과 멜로디가 펼쳐진다. 이 기조는 다음 곡 <Temptaions>로 이어지며 ‘데뷔 20년차, SM 이사의 무게란 이런 것인가?’라고 섣불리 결론내리려는 찰나, 세 번째 트랙 <Cloud>가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여리게 불어온다. 보아가 직접 쓴 팝 R&B 트랙인 이 곡을 기점으로, 앨범은 쉽사리 예측할 수 없는 나만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앨범은 꽉 찬 11곡의 직구를 던진다. 요령부리지 않는 성실함에 ‘이게 보아지’ 익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다 디테일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본다. 그제야 보아의 보컬이 귀에 들어온다. 우리가 20년 동안 들어
[Music] K팝 그 자체, 보아 - 보아 《BETTER–The 10th Alb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