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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이 자오와 켈리 라이카트, 202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의 가장 빛나는 이름인 두 감독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로부터 창작의 영감을 받았다는 점이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는 “새에겐 새집이, 거미에겐 거미집이, 인간에겐 우정이”라는 블레이크의 시 한 구절로 시작한다. 클로이 자오는 <이터널스>를 만들기 위해 마블의 수장 케빈 파이기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며 “한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의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는 블레이크의 시를 통해 영화의 비전을 제시했다고 한다. <퍼스트 카우>와<이터널스>의 개봉 시기가 겹쳐 윌리엄 블레이크의 이름을 우연히 발견한 까닭도 있겠지만 두 감독이 같은 예술가의 이름을 모티브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단순한 우연으로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창대하고 유구해 보이는 세계와 전통도 결국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무언가로부
[장영엽 편집장] 클로이 자오와 켈리 라이카트, 아메리칸 시네마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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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성과가 낮은 직원을 계속 고용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여기 와서 나름 열심히 했다고 말씀을 하시는데, 열심히 해도 성과가 나지 않는 직원에게 계속 기회를 주는 것은 불공정합니다.”
회사측 대리인이 열변을 토한다. 얄밉다. 사람을 앞에 두고 저렇게까지 말할 일인가 싶다. 얄밉다고 말할 수는 없어 반대편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인다. 딱히 쓸모도 없는 소심한 항의다. 속으로는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법리적으로만 보면 당신들이 이길 사건이잖아요? 꼭 이래야 해요?’라고 생각한다.
질 사건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전문가로서 승패를 가늠하지 못하고 희망찬 가정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는 일이 되지 않는다. 현실적인 가능성을 따져보고, 안될 일은 안될 일이라는 판단을 정확하게 하고, 제도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출구 전략도 궁리해야 한다. 전략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법리적, 현실적, 전략적.
허용, 인과관계, 취지, 예비적, 여
[정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말의 어려움, 어려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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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하루 사이에 많이 추워졌다. 마지막으로 만나서 이야기한 것이 여름의 막바지쯤이었는데, 어느새 겨울이 코끝을 스치고 귀밑까지 와 있는 기분이야. 그러기까지 걸린 시간이 한달도 채 안된다니 시간이 참 빠르다. 그때 네가 챙겨준 커피를 아직도 마시고 있는데 말야.
우리는 올해로 마흔번째 해를 살아가고 있고 내 생각에 우리의 시간은 그사이에 각자 다른 방식으로 몇번 정도 그 속도를 높여왔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유독 빠르게 느껴진다. 그만큼 주변을 미처 둘러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기분이야. 놓치고 나서 돌아갈 수 없는 것들도 점점 늘어난다. 예전에는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기만 했었다. 지금이라고 다르겠냐마는.
하지만 올여름은 너에게 주고 싶었던 선물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일까, 더위가 지나가고 난 뒤에도 그리고 이렇게 계절이 빨리 변했음에도 나는 상실감보다는 충만함이 크게 느껴진다. 아마도 두고두고 남을 만한 하나의 결실을 맺었기 때문이겠지. 바로 너에게 선물하려
[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언제나 다정한 은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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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마지막 주의 <씨네21>은 한국영화계의 거목이자 큰 어른이었던 두 선배 영화인의 발자취를 다시금 돌아보는 지면을 마련했다. <서편제> <춘향뎐> <취화선>의 제작자 이태원 태흥영화사 전 대표와 <꽃잎> <초록물고기>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촬영을 맡은 유영길 촬영감독이다. 이태원 전 대표는 지난 10월24일 향년 83살로 영면하며 영화인들을 슬픔에 잠기게 했고, 고 유영길 촬영감독은 힌츠페터국제보도상 수상을 통해 1980년 5월 광주를 최초로 보도한 영상기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세간을 놀라게 했다. 두 사람은 1980~90년대를 관통하며 한국영화의 가장 역동적이었던 순간, 역사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영화들을 남겼다. 이들은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두 영화인과 많은 시간을 공유했던 선후배, 동료 영화인들이 이번호를 통해 들려준 이야기는 더없이 소중하고 값지게 느껴진다.
먼저 김성훈 기자가 취재한 고
[장영엽 편집장] 이태원과 유영길, 한국영화계의 두 거목이 남긴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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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제작 남아진흥주식회사 / 감독 유현목 / 상영시간 114분 / 제작연도 1979년
유현목은 1956년 개봉한 <교차로>로 감독 데뷔하여 1994년 <말미잘>까지 40여년간 모두 43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했다. 39번째 연출작인 <장마>는 그의 후기 필모그래피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1973년 발표한 윤흥길의 중편소설이 원작이다. <분례기>(1971, 방영웅 원작), <불꽃>(1975, 선우휘 원작) 등 1970년대에도 그는 소설 원작의 문예영화를 연출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원래 과작 감독이기도 했지만, 이 시기는 문예영화를 만들 수 있는 우수영화 제도가 부침을 겪었던 탓에 꾸준한 작업이 쉽지 않았다. 그는 <분례기> 이후 장편 연출이 힘들게 되자 유프로덕션을 설립해 문화영화를 만들며 아마추어 영화인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필모그래피의 연속성으로 보면 1981년에 개봉한 <사람의 아들>
[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분단영화의 걸작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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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은 <씨네21> 기자들에게 출장의 시즌이다. 짐을 두둑이 챙겨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부산 센텀시티와 숙소가 있는 해운대를 오가다보면 어느새 10월도 절반이 지나고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다. 올가을엔 출장이 하나 더 늘었다. 이주현, 송경원, 김소미 기자가 부산 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김현수, 임수연 기자가 강릉국제영화제 데일리 마감을 위해 강릉으로 떠났다. 부산과 강릉 모두 바다를 지척에 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마침 강원도 바다를 배경으로 한 이번호 표지- 이시이 유야 감독이 강릉을 배경으로 한국, 일본 배우들과 함께 촬영한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이다- 가 데일리 시즌의 정취를 그대로 전해주고 있는 것 같다. 종종 출장지에서 일하다보면 바다를 눈앞에 두고도 백사장 한번 걸어볼 여유가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일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자들이 전해오는 영화와 사람에 관한 리포트엔 언제나 오직 그 장소이기 때문에
[장영엽 편집장] 영화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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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 다 지나서야 바닷가에 잠시 나갈 수 있었다. 햇살은 여전히 피부를 붉게 할 만큼 강했지만 바닷물은 차가웠다. 바닷바람은 청량한 정도로 식어 있었지만 곧 서늘함을 품기 직전이었다. 좀더 자주 올걸. 이제 여름은 거의 지나가버렸구나 느낄 때야 아쉬움이 든다. 여름이 내년을 기약하며 열차에 오르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여름이 가장 존재감이 큰 시기가 아닐까. 내년 여름이 다가올 때면 다시 바쁜 일정에 우선순위가 밀리겠지만.
여기 또 다른 여름이 있다. 항상 그 자리에서 여름처럼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는 음악가의 활동명이다. ‘생각의 여름’. 이것은 음악가 박종현의 솔로 프로젝트 이름이다. 일상적이지만 이전에 만난 적이 드물었던 단어들이 만나 새로운 이미지를 펼쳐내는 이 이름으로, 그는 비교적 길이가 짧고 단출한 구성에 깊이 있는 울림을 품고 있는 포크 음악을 만들어왔다. 여백이 많은 음악만큼이나 활동에도 공백이 많았지만 지난 10여년간 그 이름으로 꾸준히 활동해온 그가 구축해온 음악
[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도둑맞은 ‘생각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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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온라인 영화제로 전환된 2020년의 전주국제영화제가 팬데믹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 축제였다면, 2021년의 부산국제영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도래할 영화제의 풍경을 짧게나마 가늠해볼 수 있었던 페스티벌로 기억될 듯하다. 영화제를 찾은 감독, 배우들은 다시금 관객의 환호 속에 레드 카펫을 밟았고, 영화제 곳곳에서는 오픈 채팅방에 입장하는 대신 오랜만에 마이크를 잡고 육성으로 영화인들과 소통하게 된 관객의 질문이 릴레이처럼 이어졌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지난 2년여 동안 긴 호흡으로 관객을 만나지 못했던 감독과 배우들의 들뜬 표정을 보니 관객의 빈자리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반면 올해 영화제는 코로나19 팬데믹이 지난 1년간 제작된 영화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를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일정상 주로 한국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는데, 저예산으로 제작됐을 한국 독립영화의 대부분이 실내를 배경으로 하거나 인적
[장영엽 편집장]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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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독서의 계절인 이유는 독서를 하기에는 너무 좋은 날씨라 다들 독서를 안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약간의 의심을 가지고 있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말도 살쪄야 하고 햅쌀이 나오니 나도 살쪄야 하고 날이 선선하니 나들이도 가야 하고 하여간 다들 바쁜데 말이에요. 가을을 독서의 계절로 부르는 유래를 찾아보니 농경 사회에서 추수 후의 여유 때문이라고도 하고, 온도와 습도가 적합해서라고도 하고, 가시광선이 독서에 적합해서라고도 하고, 줄어든 일조량으로 세로토닌의 분비가 줄어 마음이 가라앉아서라고도 한다. 하지만 정작 책이 많이 대출되거나 팔리는 시기는 한해를 시작하는 겨울과 피서를 가는 여름이라고들 하니, 이런 이유들은 일단 가을을 독서의 계절로 정해두고는 그다음에 붙인 이유가 아닐지.
그럼에도 가을을 독서의 계절로 만들어주는 게 있다면 가을의 스산함, 나뭇잎이 뚝뚝 떨어지고 거리에 똑같은 옷이 300개쯤 있어도 굳이 트렌치코트를 꺼내게 만드는, 잊었던 일도 뒤돌아보게 만드
[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아마도 독서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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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et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즐겨 보고 있다. 전략적으로 싸울 상대를 고르고, 있는 힘을 다해 싸우고, 승부가 난 뒤엔 서로를 힘껏 껴안아주는 대한민국 정상급 여성 댄서들의 품격도 이 프로그램의 매력 포인트지만 개인적으로는 배틀에 참여한 댄서들이 선보이는 몸의 움직임을 구경하는 재미에 매 화를 챙겨 본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는 시그니처 포즈로 팔뚝의 알통을 자랑하는 팀이 있고, 머리채를 상모처럼 돌리는 댄서가 있고, 어느 부족의 전통춤처럼 힘차게 발을 구르며 몸통을 울리는 묵직한 춤을 추는 경연자들이 있다. 이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자면 그간의 대중문화가 미디어를 통해 구현해온 여성 댄서의 모습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는지 체감하게 된다.
이번호에서는 임수연·배동미 기자가 <스트릿 우먼 파이터>부터 <골 때리는 그녀들> 등의 예능 프로그램, 여자 배구 열풍이 주도적으로 촉발한 여성의 신체적 재현에 대한 질문을
[장영엽 편집장] 다양한 몸을 볼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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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만난 분의 팔목에 가느다란 팔찌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재질과 패턴이 정성스러워 보여 보여달라고 하니 팔찌 한가운데 작은 크라운 속 세밀한 바늘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1960년대 앤티크로, 이베이에서 산 클래식 시계가 장인에 의해 오버홀(분해수리)되어 21세기 한국에서 틱톡거리는 것을 보며 어디서도 주목받는 그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 하나를 보더라도 그가 생각나는 것이 그다운 것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최애 카페에서 불현듯 다프트 펑크의 클래식이 흐르기 시작했다. 단순한 리듬을 기반으로 선명하게 펼쳐지는 멜로디는 변주되며 확장되어 그들의 빛나는 헬멧을 떠올리게 한다. 아쉬운 해체 소식의 여운이 예술적 공간과 이질적인 앙상블을 만들어낸다. 부분이 전체의 모습과 같을 수는 없지만, 부분을 보면 그를 떠올릴 수 있다. 일관은 결국 그다움의 원칙을 얼마나 성실히 지켜오는가에 대한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나다움을 중시하는 자에게 그냥이라는 것은
[송길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당신의 모든 것이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