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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음악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는 편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저런 일들을 다양하게 하고 있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일 말고도 방송에도 종종 출연하고, 가끔 글을 쓰기도 한다. 일주일에 한번은 심야 라디오방송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난다.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부터 격려와 위로, 공감이 필요한 사연들 그리고 가끔은 너무 힘든 상황들까지도. 밤늦은 시간이어서인지 모든 사연에 그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고 있는 고단함이 있지만, 웃으며 괜찮을 거예요 하고 말을 하려다가도 목 안에 소리가 걸리는 때가 있다.
힘든 사연은 뭐 어떻게라도 더 잘 이야기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방송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고, 방송은 매끄럽게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고, 원래 말이라는 것이 가진 한계가 있으니까…. 그들의 사연 너머의 섬세한 결을 다 알 길 없는 나로서는 더듬더듬 짚어갈 뿐인데, 그러다 혹시 아픈 곳을 물색없이 건드리게 되는 건 아닐까. 전파 너머의 상대
[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위로가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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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과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좁은 그 공간이 지옥 같았다. 도대체 그는 그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언제 그리고 어쩌다가 그렇게 취해버린 걸까.” 나는 이 문장이 등장하는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초반 부분을 꽤 좋아한다. 자기 연민에 가득 찬 두 남자가 술에 취해 서로의 사정을 토로하다가 말도 안되는 살인 계획을 주고받는 장면 말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 문장은 정신 나간 ‘브루노’의 집착 어린 모습에 섬뜩함을 느낀 ‘가이’의 독백인데, 그 브루노의 계획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내가 너의 아내를 죽일 테니, 너는 나의 아버지를 죽여다오.” 이 제안을 듣고 술이 깨지 않는다면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당연히 가이는 술이 깬다. 하지만 이 소설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이고, 그녀의 주인공답게 가이는 조금 이상하게 군다. ‘네’도 아니고 ‘아니오’도 아닌, 애매한 반응만을 남긴 채 자리를 뜬다. 물론 가이는 자신은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낯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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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종영한 <마인>의 최종회는 한국 드라마사에서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순간으로 남을 장면을 선보였다. 낳은 엄마와 기른 엄마가 우리 함께 아이를 잘 키워보자며 양쪽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장면이다. 아내가 두명 등장하는 드라마에서 분란의 원인을 제공한 남편은 쏙 빠지고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구도가 형성되는 것이 그간의 한국 드라마가 묘사해온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이었다면, <마인>은 갈등의 불씨를 제거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아이를 사랑하는 두 엄마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무언가 이질적인 것을 보고 있다는 낯설고도 복합적인 감정을 <마인>을 보는 동안 종종 느꼈다. 살얼음판 같은 재벌가에서 서로를 지키는 형님과 동서, 능력과 사랑은 별개임을 인정하고 첫사랑을 그리워하며 남편과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아내, 배다른 자식의 행복을 위해 책임의 무게를 대신 짊어지는 새엄마.
<마인>에서 등장인물들의 선택은 단
[장영엽 편집장] <마인>과 <블랙 위도우>, ‘여성스러움’에 대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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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식사 중 화제는 요즘 부쩍 친절해진 택시였다. 복잡한 도시에 좁은 공간의 이동수단이라 스트레스가 많을 수밖에 없는 택시 속 경험이 몰라보게 바뀌고 있음에 모두가 공감했다. 하차 전 별점을 읍소하는 기사 분들을 만난 경험 또한 자리에 모인 전원에게 있을 정도로 이제는 평판 때문에라도 질 높은 서비스가 당연해지는 플랫폼 시대가 도래했다.
기사보다 손님이 우위에 서게 된 지금의 상황이 기반시설은 열악하고 경제발전의 기울기는 가파른 시절에 자란 내겐 도무지 익숙지가 않다. 타고자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차는 항상 부족했기에 친절함까지 요구하기엔 승객의 입지가 한없이 작았다. 짐짝이 실리듯 모르는 이들과 함께 가야만 했던 ‘합승’의 기억까지 가지고 있는지라 요즘의 변화는 황송하기까지 하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것이 넷플릭스의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의 ‘추락’(Nosedive)이다. 모든 사람들의 사회적 평가가 5점 만점으로 실시간으로 보여지는 사회에 살고 있는 주인공
[송길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오점 만점에 오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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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절>
제작 화천공사 / 감독 하길종 / 상영시간 93분 / 제작연도 1973년
하길종은 영화 세계에 대한 평가를 떠나 197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임에 분명하다. 1972년 <화분>으로 충무로 영화계에 데뷔한 그는 유신 정권의 혹독한 검열을 몸소 겪었고 1979년 <병태와 영자>를 유작으로 남긴 채 38살에 요절했다. 그는 1970년대에 모두 7편의 상업영화를 연출했지만 결국 이 시기를 버텨내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상업영화 필모그래피는 유신체제 기간과 겹친다.
196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UCLA 대학원 영화과에서 공부하며 뉴 할리우드의 세례를 받았던 하길종은 1970년 7년간의 유학 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과 동시에 바로 영화계에 데뷔할 수 있으리라 자신에 차 있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대학 때 친구 김지하와 같이 개발했던 시나리오 <태인전쟁>을 첫 장편영화 연출작으로 모색했지만 뜻대로 되지
[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유신의 심장을 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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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씨네21> 통신원들이 보내오는 리포트를 매주 흥미롭게 읽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국내에 아직 개봉하지 않은 화제의 영화 소식을 미리 접하는 즐거움이 컸다면, 최근에는 코로나19 이후 각국의 영화계 상황은 어떤지, 유례없는 위기를 어떻게 돌파해내고 있는지 궁금한 마음에 원고를 유심히 보게 된다.
지난 1년간 통신원들이 전한 소식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전세계 영화계의 창의력 전쟁이라고 할 만하다. 록다운 기간이 길어지자 아예 비대면 프리프로덕션을 통해 비대면을 소재로 한 코믹 스릴러 영화를 연출한 감독(프랑스)부터 영화제(film festival)에서 영화(film)라는 단어를 빼고 TV시리즈, 팟캐스트, 게임, 콘서트를 포괄하는 축제로 거듭난 뉴욕 트라이베카페스티벌(미국), 영화제 중심부를 벗어나 고풍스러운 유적지에서 관객을 만나는 베를린국제영화제 서머 스페셜(독일)의 사례까지 그야말로 개인과 단체를 막론하고 각양각색의 대처 방식과 아이디어가 빛났다.
[장영엽 편집장] 창의력도 해결할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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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들이 저녁에 눕는 자리를 옮겼다. 얼마 전까지 담요를 씌운 작은 의자를 쓰던 첫째는 캣타워 높은 곳, 에어컨 바람이 잘 드는 칸에 누웠다. 지난달까지 폭신폭신한 해먹에 몸을 말고 자던 둘째는 이제 베란다 타일 위에 철퍼덕 누워 머리만 집 안으로 내밀고 있다. 장판보다는 타일이 시원할 터다.
고양이들과 함께 산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2013년 가리봉동에서 태어난 첫째, 커크는 어느새 여덟살이다. 사람이라면 지천명일 나이다. 원래도 똑똑했는데, 요즘은 정말로 세상사를 좀 아는 표정을 짓곤 한다. 2017년 연남동에서 태어난 둘째, 스팍도 어느새 네살이다. 고양이가 네살이면 어느 모로 보아도 다 자란 나이인 데다 몸집도 크지만 하는 행동은 아직 새끼 고양이 같다. 아침마다 오빠(동거인)의 뱃살에 열심히 꾹꾹이를 하고, 사료통 여는 소리에 겅중겅중 뛰어온다.
커크를 처음 데려왔을 때, 나와 동거인은 이 암컷 고양이의 언니와 오빠가 되기로 했다. 인간을 동물의 엄마, 아빠
[정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사랑해, 우리랑 살아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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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고향이 같은 내 또래들은 동네와 나이가 비슷한 셈이다. 어릴 적에는 건물이 아직 들어서지 않은 공터가 많았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학교 자리도 공터였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속도에 맞춰서 학교가 생겼다. 새로 학교가 생긴 덕에 3학년 때 전학을 가게 되었다. 오전반, 오후반으로 이부제 수업을 더이상 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학교 운동장에는 모래가 깔려 있었고 손톱만 한 돌멩이가 많았다. 아침 조례가 끝나면 두손 가득히 돌멩이를 주워 와야 교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내가 졸업할 때까지 돌멩이는 끝없이 나왔다. 학교 건물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건물 양쪽 복도 끝은 공사가 덜 끝나 철골과 콘크리트가 드러나 있었고, 학교 뒷마당에는 졸업할 때까지도 잡초가 무성했다.
잡초 중에서는 교과서에 나오는 질경이나 토끼풀이 인기가 많았다. 인기가 많았다고 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그들이 우리가 이름을 아는 몇 안되는 풀이
[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개망초 꽃을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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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잠자는 살인>의 일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탐정을 말하라면, 역시 미스 마플이다. 어릴 때는 아니었다. 나는 셜록 홈스에 열광했고, 좀 자라서는 필립 말로와 켄지 그리고 제나로를 좋아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스 마플을 싫어했던 건 아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사실 다른 추리소설들보다 미스 마플 시리즈를 더 많이 반복해서 읽었다. 하지만 어디서도 ‘제인’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선뜻 꺼낸 적이 없었다. 박진감이 좀 없다고 생각했달까.
그래. 더 솔직히 말해보자. 미스 마플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탐정의 모습과 거리가 있었다. 내게 제인은 현장에 가보는 일도 거의 없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뜨개질을 하며 수다만 떠는 할머니에 가까웠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탐정이라면 자고로 혈기왕성하고, 힘도 좀 쓸 줄 알고, 실패도 많이 하며, 인생의 온갖 험난한 일을 다 겪어봐야지. 뜨개질이라
[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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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그레타 툰베리>에는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환경운동을 위한 행진 도중 그레타와 아버지가 끼니를 두고 말다툼을 하는 장면이다.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에 끼니를 거르고 그들에게 돌아가겠다는 그레타와 밥을 챙겨 먹어야 하는 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아버지의 싸움은 결국 아버지의 승리로 끝이 나지만, ‘왜 그렇게까지’라는 의문을 남긴다.
그에 대한 답은 풀밭에서 그레타가 친구와 나누는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기후 문제가 인류에게 야기할 위기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온 정신을 쏟아야겠기에, 혹여나 기후 위기를 논하는 회의가 열릴까 싶어 주말 약속조차 잡지 못한다는 그레타의 절박함은 환경운동가로서 그가 얼마만큼 전력을 다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툭하면 연설문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는 감정 과잉의 소녀, 구체적인 대안도 없으면서 환경 문제를 운운하는 애송이라며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환경운동에 자신의 모든
[장영엽 편집장] 미래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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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대학로예술국장 대극장에서 연극 <단테의 신곡-지옥편>(나진환 연출)을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니고, 초청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보았다. 코로나19 한가운데라서 자리를 한칸씩 띄우고 앉았는데, 매진이라도 극단측에서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 아는 단테, 그것도 천국은 빼고 지옥편이라니! 듣기만 해도 안 보고 싶은 이야기 아닌가?
청년들이 ‘가성비’를 앞세우며 넷플릭스에 대한 찬미를 부르는 것을 듣는 일은 어렵지 않다. 정액제에 익숙해진 관객이 팬데믹 종식 이후 과연 다시 극장으로 돌아올 것인가, 이런저런 가설들이 많다. 한국에서 극장은 이미 끝났다는 영화인의 탄식을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날 대학로에서 휴식 시간까지 합쳐 세 시간 가까운 시간을 어두운 극장 안에 있으니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행히 연극은 그리스 신화 등 익숙한 인물들이 등장해 역사의 아이러니를 반추하게 해주어서 재미는 있었다. 그렇지만 세
[우석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우리는 왜 연극을 보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