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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과 초연결이 중첩되는 시대는 수백년간 매일같이 직장에 나가야 했던 사람들에게 일하는 장소를 고를 수 있는 특권을 갑자기 허락해주었다. 랩톱 화면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면 하얀 파라솔과 푸른 바다가 보이는 감동은 여름휴가 성수기의 살인적인 비용을 지불한 휴양지에서 겨우 며칠간 누리던 호사가 아니라 일상이 될 수 있다. 숲속 작은 집에서 화목난로 안 참나무 장작이 타는 냄새를 맡으며 키보드를 누르다 바라본 창밖의 하얗게 쌓인 눈은 어릴 적 성탄 카드의 현실화로 다가올 것이다. 이처럼 각자가 자신의 일을 짊어지고 어딘가로 떠날 수 있는 사회는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낸다. 그간 주요한 산업이 대도시로 집중되며 발전의 수혜가 고르게 나누어지지 못해 소멸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까지 언급되는 지역에는 예기치 못한 수혜가 열릴 수 있다.
문제는 직장을 유동화한 사람들이 지역을 고를 때 무엇을 고려하는가 하는 것이다. 멋진 풍광만 있다고 온전한 생활이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경치와 더불어 무엇을
[송길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로컬리티, 로컬 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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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마음으로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신의 손>을 보았다. 축구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시시껄렁한 태도로 <신의 손>을 볼 순 없다!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인 파올로 소렌티노의 자전적 이야기이며, 축구선수 마라도나가 나폴리에서 활약하던 때가 시대적 배경’이라는 기본 정보만으로도 느슨하게 휜 척추를 바로 세우기에 충분했다. 세상의 기이한 아름다움을 탐지하고 수집하는 데 특별한 재주가 있는 소렌티노의 영화적 시선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알려주는 이 영화에서 내 심장을 세차게 고동치게 한 장면은 주인공 파비에토(필리포 스코티)의 부모가 별장에서 보내는 평화로운 시간을 고요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서사의 전환점이 되는 이 장면에서 나는 벽난로에서 새어나오는 일산화탄소의 냄새를 미리 감지하곤 여러 번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나폴리 근처엔 가본 적도 없으면서, 나폴리 앞바다의 파도처럼 철썩대는 감정을 가누어야 했던 스펙터클한 체험을 하고 난 뒤, ‘신의 손’이
[이주현 편집장] 각자의 스펙터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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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새 식구가 왔다. 아기 고양이다. 원래 우리 집에는 고양이가 두 마리 있었다. 8살짜리 커다란 치즈태비 커크와 몸집이 더 큰 4살짜리 턱시도 스팍이다.
셋째는 우리 집에 온 지 석달됐는데 온갖 무늬와 색이 다 있는 고양이라 커크나 스팍처럼 외모를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카오스와 치즈태비와 턱시도와 삼색이가 희한하게 섞여 있는 정체불명의 한국 고양이다. 추정하건대 10월에 길에서 태어나, 어느 지하상가에서 치즈태비인 남매 고양이와 함께 구조됐다가 우리 집에 왔다.
나는 미국 SF 드라마 <스타트렉>의 열렬한 팬이라 첫째 고양이의 이름을 함장인 캡틴 커크에서 땄고, 둘째 고양이는 부함장의 이름에서 가져와 스팍이라고 붙였다. 그러나 부함장 스팍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장수하는 외계 종족인 ‘벌컨’인데, 우리 집 스팍은 이름과 달리 단순하고 해맑고 밥 많이 먹고 간식에 금세 혹하는 고양이다. 솔직히 <스타트렉>의 부함장 스팍과 너무 안 닮았다.
[정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오늘 가장 사랑한다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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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을 맞아 새로운 앨범 구상을 위해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책상에 앉아 있는다. 예전에 써뒀던 내용들을 들여다보며 고치기도 하면서 기타도 좀 치고… 를 반복하다 보면 밤도 금방 깊어지는 일상이다. 오랫동안 반복해온 일이지만 여전히 과정은 평탄하지만은 않다. 최단거리로 목적지에 바로 도착할 수 있는 일이라면 참 좋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 과정은 효율성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어릴 적 시장에 심부름하러 갔다가 무엇인가에 홀려(장난감이나 게임기였겠지?) 해가 다 지고서야 돌아왔던 경험을 떠올리지 않아도 작업을 하기 위해 준비한 이 방과 책상에는 주의력을 빼앗아가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렇게 무엇인가에 주의를 빼앗기기를 반복하는 것이 작업자의 숙명이겠거니 하면서도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혹시나 인터넷에는 그런 방법이 있을까? 프리랜서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다는 책을 읽으면서 집중력을 회복하기 위한 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지만 사실 그
[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비트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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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인격과 직업적 인격 사이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전지적 시점으로 인식할 때가 있다. <씨네21>에 입사할 운명이라 핸드폰 뒷번호도 ‘21’로 끝난다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했던 적도 있지만, 가끔은 영화기자로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영화기자를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박식한 척, 유능한 척, 영화와 연애하는 척 가면을 꺼내 쓰는 느낌. 확실히 메소드 배우과는 아닌가보다. 어쨌든 13년간 이 역할을 놓지 않았던 건 영화기자이기에 누릴 수 있었던 아름다운 순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연말엔 이것이 영화기자로서의 마지막 화양연화인가 싶은 순간들을 경험했는데, 그중 하나는 꼭 한번 만나고 싶었던 배우 조승우를 전화로 인터뷰하며 그의 느긋하고 나긋한 목소리에 취했던 것이고 또 하나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개봉을 앞두고 국내에선 유일하게 스티븐 스필버그와 일대일 전화 인터뷰를 하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최근 편집장이라는 새로
[이주현 편집장] 편집장은 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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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일본식으로 각색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을 20대에 처음 보았을 때, 정말 충격적이었다. 미친다는 게 뭔지, 제정신이라는 게 뭔지, 세상을 새로 보는 느낌이었다. <춤추는 대수사선>은 총리실에 근무하던 시절에 봤다. 내가 보던 공무원과 공기업의 모습과 그렇게 똑같을 수가 없었다. <에반게리온>도 충격적이었고, <공각기동대>와 함께 나는 그런 일본의 얘기들이 너무 좋았다. 하다못해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시리즈는 애니메이션은 물론 실사판까지 전부 챙겨서, 그것도 여러 번 봤다.
그 시절에 비하면 일본영화나 애니메이션이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것 같다. 세계적인 문제작이 잘 나오지 않고, 다루는 얘기들도 점점 덜 충격적이다. 물론 작다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협소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일본 정치만 보면 세대교체에 실패한 대표적인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나
[우석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새로움을 경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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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마지막 에디토리얼을 쓰게 된다면 어떤 영화와 더불어 독자 여러분과 인사를 나눠야 할지 고민하곤 했다. 언젠가 경험하게 될 그 순간을 위해 뜨거운 안녕을 고하는 영화들의 목록을 마음속에 하나둘씩 저장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막상 글을 시작하려다 보니 생각지 않았던 한편의 영화가 머릿속을 맴돈다. 어떤 이야기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지면을 할애받은 사람의 마지막 특권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더 포스트>와 나누고 싶다.
얼마 전에 이 영화를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워싱턴 포스트>의 발행인과 편집부 기자들의 고군분투에는 언제 보아도 기자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드라마가 있었지만 4년 만에 다시 본 영화에서는 다른 순간들이 눈에 밟혔다. 무엇보다 <더 포스트>는 협업의 아름다운 메커니즘을 이야기하는 영화였다. 공식석상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이든, 우연히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을 기밀문서
[장영엽 편집장] 협업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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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 책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대해, 개인성과 역사성을 교차시키는 방식에 대해, 역경을 극복하는 내용에 대해, 인간의 본질을 통찰하는 방식에 대해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 책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그 책을 온전히 느낄 기회를 박탈당할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인간의 통제 욕구에 대해 말하려 한다.
근대인이 빠져 있는 줄도 잊고 빠져 있는 환상들이 있다. 교환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아득히 뛰어넘어 그 자체로 물신이 된 화폐라든지, 모든 것을 인간을- 혹은 자신을- 위해 진열된 상품으로 보는 시선 같은 것이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과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라는 달콤한 환상이 있다. 이 환상은 우리의 문명을 발전시키고 이끌어간다. 나는 나의 몸을 통제할 수 있어. 나는 나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어. 우리는 자연을 통제할 수 있어. 우리
[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인류라는 컨트롤 프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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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2022년이 다가오고 말았다. 먼 미래에는 우주로 모험을 떠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2020 우주의 원더키디>를 보던 80년대 어린이들은 이제 하나둘씩 40대가 되어가고 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세상이 바뀔 듯 호들갑을 떤 적도 있지만 새해가 된다고 해도 특별하게 마음에 다가오지 않는다. 왜일까. 이제는 마음이 각박해지고 굳어버린 걸까 걱정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그건 우리가 점점 레벨이 잘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경험치를 쌓아가는 과정이 개인차와는 별개로 시간에 대략 비례한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레벨업은 지수그래프에 가깝다. 게임을 해보면 알겠지만 처음에 레벨을 1에서 2로 올리는 데 필요한 경험치가 100 정도라면 2에서 3으로 가는 데 200, 3에서 4로 가는 데는 500 이상이 필요하다. 아주 고레벨인 경우에는 이제껏 쌓아온 만큼의 경험의 총합을 더해야 다음 레벨로 갈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
[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레벨업이 더뎌지는 2022년의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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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유튜브 채널 <삼프로TV>가 기획한 대선 후보 인터뷰 영상을 보며 새해를 맞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심상정 정의당 후보 등 네명의 유력 대선 주자가 출연해 경제 정책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는 자리였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의 공약을 점검하는 수많은 콘텐츠가 기획되지만 유독 <삼프로TV>의 인터뷰가 1천만뷰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열띤 반응을 이끌어낸 건 상대 후보에 대한 흑색선전이나 하나의 사안에 대해 답변하는 시간의 제약 없이 오롯이 정책에 대한 각 후보의 의견에 집중하는 자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시간30여분이라는 긴 시간을 두고 한 사람의 생각을 경청하다보니 각 후보가 바라보는 국정 운영과 정책의 방향이 보였다. <씨네21> 또한 대선 후보들의 문화 정책, 영상 정책을 비중 있게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독자 여러분께 드린다. 이번호에서는 2022년 개
[장영엽 편집장] 2022년의 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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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식이 꽤 된 집에 살고 있으면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곤 한다. 관리소로부터 공용 파이프가 낡아 누수가 발생해 이를 교체한다며 각 가정의 배관은 알아서 고치라는 통고를 받았다. 수리 전까지 난방이 안된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부랴부랴 업체를 알아보니 일이 밀려 일주일 이상 기다려야 한단다. 집 떠나길 두려워하는 고양이 두 마리를 힘들게 켄넬에 넣어 어머니 댁에 맡기고 임시 숙소를 찾아나섰다. 열흘 만에 간신히 집을 고친 후 돌아오니 고양이들은 훌쭉해졌고 사람들은 집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그 뒤 일주일 만에 전국을 강타한 한파 속 따뜻한 집 안에서 이 글을 쓰며 미리 고장난 난방이 고맙게 느껴졌다. 어차피 고장날 것이라면, 본격적으로 추운 겨울이 오기 전 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란 생각에서다. 이처럼 일어날 일이라면 빨리 일어나는 것이 고마울 때가 있다. 집 떠나 있는 동안 식구들끼리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색다르게 지내보고, 그중 며칠은 호텔에서 호사도 부렸기에 나름의
[송길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미리 망가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