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하루 사이에 많이 추워졌다. 마지막으로 만나서 이야기한 것이 여름의 막바지쯤이었는데, 어느새 겨울이 코끝을 스치고 귀밑까지 와 있는 기분이야. 그러기까지 걸린 시간이 한달도 채 안된다니 시간이 참 빠르다. 그때 네가 챙겨준 커피를 아직도 마시고 있는데 말야.
우리는 올해로 마흔번째 해를 살아가고 있고 내 생각에 우리의 시간은 그사이에 각자 다른 방식으로 몇번 정도 그 속도를 높여왔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유독 빠르게 느껴진다. 그만큼 주변을 미처 둘러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기분이야. 놓치고 나서 돌아갈 수 없는 것들도 점점 늘어난다. 예전에는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기만 했었다. 지금이라고 다르겠냐마는.
하지만 올여름은 너에게 주고 싶었던 선물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일까, 더위가 지나가고 난 뒤에도 그리고 이렇게 계절이 빨리 변했음에도 나는 상실감보다는 충만함이 크게 느껴진다. 아마도 두고두고 남을 만한 하나의 결실을 맺었기 때문이겠지. 바로 너에게 선물하려고 했던 노래를 거의 3년이 지나서야 완성하게 된 일이다. 너무 오래 기다려서 그런지 음원 사이트를 확인하고 기뻐하는 너에게 내가 더 고마웠다.
아마 시작은 네가 두권의 시집을 연이어 내던 시기였을 거야. 그중에 두 페이지 가득하게 차 있던, 너의 빈틈없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던 시를 읽고 이건 노래구나 하고 강렬한 느낌이 왔었지. <갔다 온 사람>이라는 시 제목만큼이나 강렬했던 ‘여름이 다 갔네’, ‘긴팔을 아무리 걷어도 반팔이 되지는 않아’ 하는 구절들에서 여름 내음 가득한 노래가 떠올랐다. 어려울 것도 없이 스르륵 멜로디를 붙였고. 간단한 녹음을 들려주었을 때 너무 좋아하던 네가 생각난다. 처음 노래를 들려주던 여름에 곡 작업까지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면 너의 시집이 큰 상을 받던 순간에 함께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 나는 내내 아쉬웠어.
그래서일까, 그다음 해에는 왠지 너의 시에 나의 노래가 모자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모로 궁리를 해봤지만 결국 해를 넘기도록 노래를 완성할 수 없었다(여름이 끝날 때 나와야 할 것 같았는데 결국 넘기고 말았지). 올해 초에는 꼭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며 정말 이렇게 어영부영 넘어가버리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어. 알다시피 난 좀 나약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것들을 잘 포기하곤 하거든. 하지만 역시 마감을 확실히 정해놓으니 해결되긴 하더라. 조언해줘서 고마워.
그렇게 노래를 완성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때는 강보원 시인의 시 <완벽한 개업 축하 시>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처음에 노래를 들려주면서 저작권료를 많이 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정확히는 저작권료의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고) 호기롭게 이야기했던 것이 실수는 아닐까, 너의 시에 어울리는 노래를 적절한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나의 능력으로 영영 불가능하고 이 에피소드는 우리 둘 사이에 평생 주고받게 될 농담으로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지. (실제로 우린 그동안 가는 곳마다 그 이야기를 했지. 넌 사람들 앞에서 매번 노래를 부르기도 했어.) 그러나 지금 정말 대단하게도 우리는 농담도 얻었고 노래도 얻게 되었어. 엄청난 일이지. 어쩌면 약간의 인세도 기대할 수 있을지 몰라.
이렇게 편지를 쓰다 보니 ‘우리 마흔살이 되면 같이 글을 쓰자’라고 했던 너의 말이 생각난다. 올해가 두달도 채 안 남았지만 그 제안도 언젠가는 지켜지겠지. 이제 다 지나갔지만 아직 만 나이로는 어떻게든 가능할 거야. 괜찮아, 나도 서른 중반이나 되어서야 <서른>이라는 곡을 완성했는걸. <졸업>은 졸업하고 나서 완성했네. 생각해보니 이런 말들은 사실 내가 너에게 들었던 격려 같기도 하다. 돌아보니 그렇게 서로를 응원하면서 작고 큰 매듭들을 하나씩 지어가고 있었다.항상 망설이는 나에게 너는 망설임 없이 말을 걸고 다가오고 성큼성큼 나아가는 사람이다. 처음 만났을 때 갑자기 술자리 테이블 위를 성큼성큼 건너와서 말을 걸 때에도 그렇고, 잘 지내 지금 뭐 하니 하는 말에 불쑥 멀리서 찾아오기도 하지. 많이 망설이는 사람에게는 확고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힘이 될 수가 없다. 망설이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에 달려 있는 타이어를 떼고 더 빠르게 달려갈 수 있다. 너를 만나고 내가 마음을 편하게 풀고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너에게도 내가 그랬으면 좋겠다. 오은 없이는 죽고 못사는 오죽헌의 정예 멤버로서, 앞으로 우리의 중년도 잘 부탁한다.
-덕원 보냄
<여름이 다 갔네> _오은, 윤덕원
여름이 다 갔네
긴팔을 걷으며 네가 말했다
여름에 근접한 네가 말했다
긴팔을 아무리 걷어도 반팔이 되지는 않아
삶은 한번에 시작되거나 끝나지 않는 것 같아
한번 해볼까 마음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우리가 지금 여름과 겨울의 사이에 있는 것 처럼,
여름 낮이 긴 것 처럼, 겨울 밤은 더 긴 것 처럼,
들리지 않는 물음처럼, 나도 모르게 튀어나간 대답처럼,
나갔다 돌아온 사람처럼, 반팔을 입고 갔다가 긴 팔을 입고 온 사람처럼
긴팔을 걷으며 네가 말했다
여름에 근접한 네가 말했다
긴팔을 아무리 걷어도 반팔이 되지는 않아
여름이 다 갔네
여름은 낮에 겨울은 밤에 찾아온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단잠과 꿀잠은 간절하게 바랄 때에야 겨우 찾아온다
날씨가 좋아도 기분은 좋지 않을 수 있다 건조한 날씨에 축축한 기분으로 걷기도 한다
긴팔을 걷어도 반팔이 될 수는 없지만 반팔에 가까워질 수는 있다
낮이 짧아지면 밤이 길어지듯 여름이 가면 겨울이 올 것이다
그 사이에 환절기가 있어서 웅크리고 잠을 잤다
저녁이 되면 다음 계절을 끌고 네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