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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보존하라는 법은 없다. 건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사람이 건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재개발/재건축이 원형 보존보다 공익에 부합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 건물이 무엇인지에 따라 사람의 생각은 움직일 수 있다. 원주시가 허물려는 원주 아카데미극장은 1963년에 세워져 현재까지 원형을 간직한 건축물이다. 오래 공존했던 원주 시내 다른 단관 극장들이 사라지고 홀로 남았다.
원주시가 전임 집행부의 복원 계획을 뒤집고 철거로 방향을 틀자,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보존론과 주차장과 야외공연장으로 바꿔보자는 철거론이 맞섰다. 양쪽 모두 자신의 방안이 인근 시장을 살리는 것이라 주장한다. 원주시의회는 이 문제로 연신 파행을 겪다가 희한한 중간 결과를 내놨다. 추가경정예산안 처리는 다음 회기로 넘어가 철거 집행이 지연되었지만, 철거 계획을 담은 ‘공유재산 관리계획 변경안’은 표결에서 간발의 차이로 통과되었다. ‘계산’만 미룬 채 ‘주문’을 질러버린 꼴
[김수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극장의 밑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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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디를 분리해도 그 자체로 감상이 완성되는 노랫말들이 있지만 <외톨이>는 가사만으로는 곡이 가진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노래는 가사만 놓고 보자면 연인과의 이별로 상처받은 채 고립되어가는 한 남자의 절규다. 기억 속에 남은 전 연인의 흔적을 모두 지우려고 노력하지만, 매일 밤 꿈에 연인이 나타나 그 고통을 위로해주니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는 슬픈 읊조림. “아무도 모르게 다가온 이별에 대면했을 때, 또다시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워 외면했었네”와 같은 가사는 관계의 끝에서 가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예감이고, “한없이 소리쳐 봐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널” 같은 가사 또한 이별 직후 많은 사람이 느끼는 보편적 감정이다. 그렇기에 좀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외톨이>에서 가사란 그저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이 노래는 반드시 무대를 보아야 완성된다.
현악 오케스트라가 전주부터 예민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가면을 쓴 댄서들 사이에 앞머리로 한쪽 눈을 가린 채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사랑도 사람도 너무나도 겁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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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처님오신날 등이 모여 있는 5월은 지출이 늘어나는 달이지만 감사의 말을 전하기 좋은 달이다. 어버이날,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는 본인의 딸로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주었고 나 역시 나의 어머니여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나의 사회적 자아는 <브로커>의 “태어나줘서 고마워”처럼 진지한 대사에 저항하려 하지만 현실에선 영화보다 더 낯간지러운 상황을 끌어안기도 한다. 5월은 감사의 달이니 오늘은 낯간지럽더라도 감사의 에디토리얼을 써볼까 한다.
마침 1406호 표지를 장식한 배우 김우빈은 감사 일기를 꾸준히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15년째 감사 일기를 쓰고 있다는 김우빈은 “자기 전에 다섯 가지 감사를 쓰는데 15년 하다 보면 쓰는 데도 얼마 안 걸린다”며, ‘운동을 즐겁게 할 수 있어서, 쉴 수 있는 집이 있어서, 즐겁게 스트레칭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전날 쓴 일기를 소개했다. 오늘 나의 다섯 가지 감사한 일은… 첫 번
[이주현 편집장] 감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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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종이는 좋은 미술 도구다. 예쁘고 가볍고 흔하다. 접어서 토끼나 비행기 같은 걸 뚝딱 만들 수 있다. 잘못 접어도 별로 표나지 않는다. 다만 고쳐 접을 때는 손톱에 힘을 주어 싹싹 문질러야 한다. 무엇보다 색종이는 가위질하기가 쉽다. 조금 무딘 가위로도 기분 좋게 잘라진다. 마분지나 켄트지보다 풀칠도 잘된다. 사실 너무 잘된다. 오려 붙이기를 할 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계획과 다른 작품이 탄생한다. 작은 조각이 손끝의 통제를 벗어나 엉뚱한 자리에 붙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점만 주의하면 색종이는 정말 좋다. 특히 어디에 좋은가 하면, 어린이와 대화를 나누기에 좋다.
나는 독서교실에 온 지 얼마 안된 니은이 마음을 얻으려고 안달복달하고 있었다. 니은이는 일찌감치 ‘스스로’ 독서교실에 온 오빠와 달리 책에 ‘전혀’라고 할 만큼 관심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나와 인사하기도 싫어했다. 새로운 관계에 마음을 여는 데 오래 걸리는 편이라는 어머니의 귀띔대로였다. 막상 수업을 시작하
[김소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색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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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1일. 전날에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한숨도 자지 못하고 새해를 맞이한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끝내주는 커피 한잔을 마시고 새해를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마음을 먹은 까닭은 2022년 12월31일에 완벽한 커피를 찾아 2만원짜리 게이샤 원두커피를 포함해 6잔을 때려 마셨지만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았고, 하지만 이것이 7천원 정도라면 매우 훌륭한 커피라고 감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 ‘제3의 물결인가 뭔가가 커피 시장을 망쳤군’이라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요즘은 카페에 가면 뭐라도 아는 척 원두를 골라야 하고, 차려입은 바리스타들은 취향에 맞는 커피를 골라주지 못해 안달이다. 그저 맛있는 커피 한잔 마시고 싶을 뿐인데 거기서조차 멍청해 보이지 않으려 애써야 한다니. 이런 커피 문화에 조금 지쳐 있었고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행동하는 것도 이제 좀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아직 끝내주는 커피를 맛보지 못한 까닭에 자꾸만 새로운 카페를 찾아, 그리고 어딘가에 있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지역과 여행 섹션: 잃어버린 커피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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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수행이 필요했던 저연차 기자 시절. 백흥암에서 수행 중인 비구니들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를 감명 깊게 보고 이창재 감독을 인터뷰했다. 이후로도 감독의 차기작에 늘 관심은 기울이고 있었지만 대면할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그러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이하 전주영화제)에서 10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다큐멘터리 <문재인입니다>를 들고 전주를 찾은 그는 미소를 머금은 편안한 얼굴로 고생담을 술술 들려주기 시작했다. 최소 1박2일은 들어야 전말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 이번주 특집 ‘전주에서 만난 사람들’ 인터뷰 기사에서도 그 고생담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선 기사에서도 빠진 뒷이야기 일부를 전하려 한다. 기사에선 이창재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 이가 하나 빠졌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2.5개의 이가 빠졌을 만큼 문재인 전 대통령을 섭외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대통령을 직접 만나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전공과
[이주현 편집장] 전주를 기억하게 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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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에는 다락방이란 게 있었다. 집을 짓다 보면 생기게 마련인 허드레 공간인 셈인데, 좀 작으면 그냥 ‘다락’이었고, 사람이 들어갈 만한 여지가 있으면 다락‘방’이 되었다. 어릴 적 나는 이 다락방에서 많은 걸 했다. 사촌 동생과 놀아준다는 핑계로 어른들의 눈을 피해 나는 갖지 못했던 좋은 장난감을 충분히 만져볼 수 있었다. 보퉁이에 싸인 잡스러운 것들을 뒤져보는 재미에 더해 가끔씩 요긴한 물건을 ‘득템’하는 행운도 찾아왔다.
대개는 그곳에서 책을 읽었다. 퍽 학구적인 아동기를 보낸 것 같지만, 실은 계통이 잘 잡히지 않는 독서였다. 이른바 ‘남독’에 빠져 있던 셈인데, 삼중당문고 한국 근대문학 소설에서부터, 일본 대하소설 <대망>의 해적판, 고모가 보던 하이틴 잡지, 할아버지가 길거리에서 산 <생활상식백과>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꿈을 해몽하는 법을 배웠고, 일본의 전국시대를 머릿속에 그려넣었으며, 이름이 비슷한 김동인과 김동리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다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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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한 영화에서 연출팀으로 일을 했다. 그날의 촬영지는 모델하우스였는데 현장에 들어서자 이미 촬영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서둘러 배우와 가장 가까우면서 화면에 보이지 않을 만한 곳에 모니터를 설치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간 길을 지날 때마다 티슈, 행주 등을 봉투에 담아 다가오는 모델하우스 직원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저는 돈이 없어요’ , ‘제 통장에 든 액수는 고작 000원뿐이에요’를 속으로 되뇌며 돌아가곤 했다. 때문에 모델하우스 안에 들어와본 것은 처음이었다. 새로이 진입하는 생의 챕터에 대한 낯섦, 설렘과 긴장을 안고 이 공간에 발을 디뎠을 방문자들, 그런 마음을 품었을 영화 속 인물, 그 인물을 꿈꿨을 감독, 장면을 꿈꿨을 스탭들. 여러 사람의 조용하고 분주한 발걸음들이 겹쳐 보였다. 촬영 현장의 오묘한 분위기가 모델하우스라는 공간과 어울렸다.
거대한 아파트 모형 앞에 서보았다. 생각보다 꽤나 정교한 모양이었다. 집들마다 같은 색과 양으로 빛이 났다.
[김세인의 데구루루] 나무 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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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의 잡지를 만드는 데에는 생각보다 방대한 인력과 노동량과 자본이 투입된다. 매주 한숨과 스트레스의 파티를 벌이고 나면 이 일이 지속 가능한 일인지 수지타산이 맞는 일인지 자문하게 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매주 잡지를 만든다. 끊임없이 자신을 연마하며, 이 일이 지속 가능해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며.
주먹을 불끈 쥐고 서두를 쓴 이유는 1404호 특집으로 젊은 영화평론가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런저런 생각이 복잡하게 엉켜서다. 블로그, SNS, 팟캐스트, 메일링 서비스 등 다채로운 플랫폼을 활용하는 것은 물론 글쓰기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방법론으로 비평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동시대 신진 영화평론가들이 늘어나고 있는 흐름 속에서 <씨네21>은 그들의 활동 양상을 살피고 그들의 생각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씨네21> 지면에서 자주 보았을 이름들에게 만남을 청했다. <씨네21> 영화평론상을 통해 2018년, 2020년, 20
[이주현 편집장] <씨네21>과 비평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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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주 흥미로운 제목의 논문을 접하게 되었다. ‘당신의 무기를 선택하라: 우울한 인공지능 학자들을 위한 생존 전략.’ (Choose Your Weapon: Survival Strategies for Depressed AI Academics) 각각 뉴욕대학교 컴퓨터 과학 및 공학과 그리고 몰타대학교 디지털 게임 연구소의 교수로 있는 두 인공지능 연구자가 쓴 글이다. “당신은 학술 기관의 인공지능 연구자인가요? 현재의 인공지능 발전 속도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불안해하고 있나요? 인공지능 연구 혁신에 필요한 컴퓨팅 및 인적 자원에 대한 접근이 전혀 없거나 매우 제한적이라고 생각하나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저희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논문의 초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논문을 읽으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우울했구나! 지난 글에서 썼듯이, 나는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수많은 젊은 여성의 이미지가 불쾌했다. 그 불쾌함의 심연에 여성 대상화의 유구한 역사가 있기에 더욱
[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우울한 인공지능 시대의 생존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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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K팝은 ‘듣는 음악’이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물론 누구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야 당연히 나는 음악가도, 음악 평론가도 아닌데 ‘복길’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가끔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라고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복길씨의 말은… ‘덕질’을 지양하고 음악을 음악으로만 듣자는 거죠?” “네 그렇죠!” “그래서 뮤직비디오도 보지 말고, 음악 방송 무대도 보지 말고, 멜론으로 음원만 들어야 한다는…?” “네 맞아요! 그런데 멜론도 사용하지 않는 게 좋아요! 잘 모르시겠지만 멜론으로 청취하는 건 결국 덕질에 속하는 행위거든요? 이왕이면 집계 출력이 어려운 애플뮤직을 쓰고… 아 포토카드! 그런 것도 절대 사지 말아야 합니다!” 일방적인 대화의 흐름으로 알 수 있듯이 나는 이런 주장을 반복하며 수많은 사람을 잃었다.
그렇다면, ‘K팝이 정말 듣는 음악일까?’ 내가 좋아했던 K팝들을 떠올려보자. 첫 번째, 이정현의 <
[슬픔의 케이팝 파티] 아무리 애를 써도 넌 내 안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