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중에 나와 있는 무수한 글쓰기 책을 섭렵하면 정말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글쓰기의 기본기를 익히고 좋은 글을 감별하는 눈은 기를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글쓰기에 정답은 없다. 그래서 재밌고, 그래서 괴롭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역시 직접 써보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본인이 글쓰기 초보라 생각된다면 글쓰기에 관한 책을 한두권쯤 읽어보길 권한다. 언급했다시피 기본기를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기본이란 무엇인가. 기본 중의 기본은 맞춤법 그리고 정확한 단어와 표현을 찾아 쓰는 것, 바른 어순으로 문장을 쓰는 것이다. 맞춤법과 문장은 보통 퇴고할 때 충분히 바로잡을 수 있다. 그만큼 퇴고는 중요하다. 거의 모든 글쓰기 책은 퇴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영화책을 탐독하고 영화이론을 공부하면 영화평론을 잘 쓸 수 있을까. 지식의 양과 글쓰기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 것처럼 영화 지식과 영화 글쓰기 실력도 비례하지 않는다. 영화 유튜버 혹은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을 할
[이주현 편집장] 영화평론상 심사를 마치고
-
파랑이와 노랑이는 만난 적이 없다. 같은 학년이지만 학교가 다르고, 사는 곳도 좀 떨어져 있다. 독서교실에서도 수업 시간이 달라서 마주칠 일이 없다. 그런 두 사람이 요즘 자신들도 모르게 만나는 장소가 있다. 교실 한쪽, <하이디> <톰 소여의 모험> <프랑켄슈타인> 같은 작품이 놓인 ‘클래식’ 책장 앞이다. 이 책들이 대부분 양장이라 무게를 생각해서 맨 아래 칸에 꽂아두었기 때문에 책 꺼내기가 조금 불편하다. 그래도 한명은 월요일에, 한명은 화요일에 똑같이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파랑이는 <삼총사>와 <홍당무> 중에서, 노랑이는 <꿀벌 마야의 모험>과 <폴리애나> 중에서 무엇을 먼저 읽을지 고민하는 정도만 다르다.
파랑이는 우리나라 동화를 좋아한다. 우리말로 되어 있어서 작가의 마음을 더 잘 알 것 같단다. 출판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종종 판권도 살핀다. “이 책은 제가 태어나기 10년 전에 나왔네요.
[김소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읽는 사람
-
인천 자유시장 입구에는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성인의 걸음으로도 제법 다리를 올려야만 하는 높이였다. 한낮에 입구에서 계단 위를 바라보면 그곳은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층에는 장터를 뺑 도는 창문 없는 복도가 사각형으로 이어져 있었다. 복도 한면만 해도 길이가 꽤 되었는데 고작 한두개의 전구만 꺼질 듯 희미하게 빛을 품고 있어 전혀 주변을 밝히지 못했다. 그래서 한쪽 모퉁이에서 다른 쪽 모퉁이를 바라보면 그저 한두개의 흰빛 덩어리만 보일 뿐이었다. 한층 아래는 활기 넘치는 시장의 소리가 들렸지만 한층만 올라서면 이따금 들리는 물 흐르는 소리와 전구 곁을 지날 때만 들리는 전기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긴 복도에 여러 개의 문이 줄지어 있었지만 그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층을 사이에 둔 소리와 빛의 간극 덕분에 복도를 한 바퀴 돌고 내려오면 우리는 아주 먼 곳에 오래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더위에 한껏 빨갛게 달아올랐던 두뺨도 어느덧
[김세인의 데구루루] 무서운 이야기
-
2년 전, 넷플릭스 예능 <먹보와 털보>의 인터뷰로 만난 노홍철은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여행’이 자신이 꿈꾸는 여행이라 했다. ‘너 커서 뭐 될래 했는데 뭐가 된 노홍철’은 지금도 그 꿈을 열심히 실천하며 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려서 TV 앞에서 코 박고 살았던 나도 ‘너 커서 뭐 될래’ 소리를 적잖이 들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뭐가 되려고 이러느냐’는 얘기를 종종 들었는데, 결국 영화 잡지를 만들며 살고 있다. 어쨌든 뭐라도 되었다는 얘기다.
이번주 <씨네21>에는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좋아하다 무언가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우선 <문라이즈 킹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프렌치 디스패치> 등을 통해 영화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확고한 스타일리스트 웨스 앤더슨 감독과 그의 신작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유전> <
[이주현 편집장] 덕업일치의 현장
-
-
세상이 참 천박해졌다. 이 낡고 지나치게 단정적인 문장을 써야 할까 잠시 멈칫했지만, 달리 표현할 길을 찾지 못하겠다. 더 맛나고, 더 멋지고, 더 화려하고, 더 높은 것을 얻으려는 데 거리낌이 없다. 죽어라 공부하고, 더 좋은 대학에 가고, 더 높은 학점을 따고, 더 좋은 데 취업하고, 더 빨리 승진하려는 이유는 그거다. 이들 여러 이유마저도 실은 한 가지 욕망으로 요약된다. 남한테 꿀리고 싶지 않다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데, 정작 중요한 건 꿀리지 않을 욕망인 시대.
2000년대 초반 유학 시절, 고국에서 찾아온 이들과 친분이나 일로 엮였을 때 받았던 느낌이 딱 그랬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하나같이 불만투성이였다. 묵는 호텔의 추레함에 대해, 먹는 영국 음식의 맛없음에 대해, 그래서 찾아간 한인식당의 비싼 가격에 대해. 그들은 현지에서 만난, 자신보다 싼 옷을 걸치고 있는 영국인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못했지만, 외양과 옷차림에선 거의 차이도 없는 한인식당 종업원을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중꺾마가 아닌 중꿀욕의 시대
-
사는 게 힘들 때마다 온갖 신통한 말들을 찾아다니지만 삶은 결국 늘 유행가 가사 한줄에 관통당하고 만다. ‘서른이 넘기 전에 결혼은 할는지’라는 충격적인 도입부를 떠올려보라. 서른도 안된 여자가 실연 좀 당했다고 부모에게 잔소리로 들을 법한 말을 자학처럼 뱉는다. 그런데 딱 10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되었나? 그 가사는 역대 최고 수치라는 한국의 30대 미혼율을 예언하고 만다….
내 이성의 심의에 따르면 그 가사는 여러모로 옳지 않았다. 청소년이 듣기에도(조혼을 장려함), 서른이 듣기에도(불안을 조장함), 노인이 듣기에도(가소로움), 페미니즘적으로도(말할 것도 없음). 씨스타가 누구인가? 여름 평균 기온이 상승한 것은 그들의 해체 때문일 거라는 음모론도 수긍하게 만들었던 한국 최고의 걸그룹…! 재앙의 위기에서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폭발적인 가창력과 퍼포먼스를 지닌 아이돌…! 그런데 그들의 노랫말은 나쁜 남자들만 만나다가 서른 넘어서까지 결혼도 못하는 노처녀가 되면 어쩌나 고민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서른이 넘기 전에 결혼은 할는지
-
아이들은 왜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할까. 아이들은 왜 즐겁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무섭고 이상한 이야기에 더 귀를 쫑긋 세울까. 공포에의 매혹을 심리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설명할 지식은 없지만, 아이들이 무서운 이야기를 즐기는 것은 겁쟁이가 아니라는 증명 혹은 어른스러움을 입증하는 행위 혹은 담력 테스트인 측면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나는 심장을 죄어오는 공포를 즐길 줄 모르는 겁쟁이였다. 겁쟁이인 걸 들키는 것도 싫어하는 겁쟁이였지만 어릴 적 <전설의 고향> 중 <내 다리 내놔> 편을 봤을 때의 충격과 뭣 모르고 봤던 <오멘>의 공포는 쉽사리 떨칠 수 없었다. ‘김세인의 데구루루’를 연재하고 있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김세인 감독은 자신이 괴담 마니아였다고 이번호에 실린 에세이 ‘무서운 이야기’에서 밝힌다. (“중학생 때 흔히 그렇듯 비 오는 날이면 선생님을 설득해 수업 대신 무서운 이야기를 했다. 그 순간만
[이주현 편집장] 괴담 속으로
-
인공지능이 아니라 응용통계라고 부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SF 작가 테드 창이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인공지능 개발자나 기자들이 챗지피티와 같은 챗봇을 “나”와 같은 인칭 대명사로 칭하게 하거나 인공지능 기술을 묘사할 때 “학습”이나 “이해” 등과 같은 인간 중심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인공지능에 대한 환상을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응용통계라니, 그동안 인공지능을 둘러싸고 과도하게 불붙었던 기대와 두려움 둘 다에 찬물을 끼얹는 이름이 아닌가. 테드 창의 표현을 빌리면 “섹시하지 않은” 이름이기 때문에 아마 아무도 사용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마침 또 이런 소식들이 들려온다. 자신을 본뜬 ‘인공지능 여자 친구’ 서비스를 출시한 미국의 인플루언서. 인공지능 앱에서 만난 가상 남성을 완벽한 남편으로 소개하는 여성. 챗지피티를 이용해서 나만의 여자 친구를 만드는 걸프렌드지피티 프로젝트를 개발하는 남성. 지난 화에서 이미 밝혔듯이 나는 인간을 닮은
[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윌슨도 아니고 사만다도 아닌
-
여행 기사를 쓰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는 삶은 일종의 환상이다. 현실은 하나의 기사를 위해 모든 것을 아껴야 한다. 제주에서의 삶도 그랬다. 특별한 것도 없이 나는 취재를 위해 가장 저렴한 숙소를 예약하고, 한잔에 2천원하는 커피를 주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하루 종일 취재를 위해 근방을 돌아다니다 잠이 든다. 이것을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그저 일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환상만 찾는다. 그리고 여행 기사는 어떻게든 환상을 만들어야 한다. 정작 환상을 만드는 에디터 대부분은 환상적이지 못한 삶을 살지만. 이제 더이상 나는 환상을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벌어지는 삶의 순간들에 그럴 수 있지라며 끄덕이고, 예상하지 못하는 사건에 그럼 그렇지 하며 순응할 뿐이다. 에디터에게 중요한 건 멋진 글솜씨나 찬란한 묘사 따위가 아니다. 마감을 지키는 능력, 충분한 수면 시간, 오래도록 걸을 수 있는 여유, 고요와 적막.
영화를 찍고 있는 다름씨와 함께 제주에 있는 한 예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지역과 여행 섹션: 제주에서
-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플래시>의 공통점은? 모두 멀티버스(다중우주)를 활용하는 영화들이라는 점이다. 멀티버스의 개념을 요약하면, 내가 살고 있는 우주 말고 또 다른 우주에 내가 아닌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여행이 유행이었던 시대가 저물고 이제는 우주와 우주를 가로지르는(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이야기가 유행하고 있다. 멀티버스 서사의 유행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 혹은 미래의 나를 만나는 것과 우주의 차원 이동을 통해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두 경우 모두 동일한(혹은 동일하다고 보이는) 자아와의 대면, 즉 거울 효과를 통한 셀프 코칭의 서사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반면 전자는 현재로의 수렴과 시간의 유한함을 얘기한다면 후자는 시공간의 우주적 확장을 통한 무한과 팽창의 서사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우리는 유한한
[이주현 편집장]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
“저는 요즘 윤석열 그분을 대통령으로 뽑은 사람들이 싫어 죽겠어요.”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푸념이다. 국민의힘 극성 지지층은 “무조건 민주당 찍는 좌파 콘크리트 40%는 인간이냐”고 조롱한다. ‘1찍(기호 1번 민주당 찍은 사람)’, ‘2찍(기호 2번 국민의힘 찍은 사람)’의 종특(종족 특성)을 운운하는 글과 말이 난무한다. 2022년 대선 직후 만난 유권자 몇몇에게 들은 말이다. “저는 국민의힘 지지자입니다만, 이재명에게 투표했어요.”(30대 초반 여성 A) A는 ‘2번’이 국정을 운영할 최소한의 자세도 안됐다고 보았다. ‘법인카드 유용’에 충격을 받았지만 ‘허위 이력’과 ‘주가 조작 의혹’에 더 경악했단다. “제 자신을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윤석열 찍었습니다.”(20대 후반 남성 B) 그는 조국 사태와 대장동 의혹을 거치며 ‘이번에는 1번이 져야 한다’고 생각을 굳혔다. 그는 여소야대가 여대야소보다 훨씬 낫다고 봤고 앞으로도 여소야대이길 희망했다.
세상에는 n개의
[김수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1찍과 2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