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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 이야기를 향한 멈출 수 없는 욕망은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죽음마저 미룰 정도로 강력하기에, 오래전부터 이야기에 중독된 인류는 ‘다음 이야기’를 발굴할 갖가지 수단을 발명해왔다. 이러한 욕망을 실로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구현한 모델 중 하나가 바로 속편이다. 반복되는 패턴이 주는 안정감 위에 새로움을 더하는 약간의 변주는 모르는 사람 없는 흥행의 기본 패턴이다. 속편은 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실패의 위험을 줄이기 위한 장치로 활용되지만 실은 안정제에 가깝다. 무슨 말이냐면, 실제로 성공할 확률을 높인다기 보단 '이렇게 하면 잘 될 거'라는 심리적 위안에 가까운 경우가 다반사다.
단순히 넘버 링으로 이야기의 생명줄을 이어가던 시대는 지났다. 이른바 ‘세계관’ 모델이 제시된 이후 이야기를 잇고 확장하는 방식은 다채로워졌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보였던 것뿐’이었던 걸까. 안전한 길을 걷겠다고 야심차게 기획된 후속작들이 줄줄이 외면받는 것을 보니 생
[송경원 편집장] 인간의 호기심은 끝이 없고, 이야기는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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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즐겨봤다. 그전에는 <사이렌: 불의 섬>을 열심히 봤고 <골 때리는 그녀들>도 좋아한다. 공통점은 ‘움직이는 여자들’을 실컷 볼 수 있다는 것. 그 여자들의 몸은 대체로 마르고 여리여리하지 않으며 그들의 움직임은 예쁘고 섹시해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이 프로그램들을 보고 나면 해독 주스를 마신 듯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많은 이들이 미디어에서 여성의 몸이 지나치게 대상화된다는 점을 비판한다. 많은 챗봇이 여성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고 많은 안드로이드가 여성의 외형으로 만들어져왔듯이 미디어에서 찬사를 받는 많은 몸들은 여성의 것이었다. 챗봇이나 로봇을 남성으로 만들고 미디어에서도 남성의 몸만 재현하자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미디어가 여성의 몸을 보여준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여성의 ‘어떤 몸’을 보여주는가에 있다. 우리는 여성이 어떤 몸이어야 사랑받는지 알고 있다. 섹시하지만 너무 섹시해서는 안되고 예쁘
[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새해에는, 움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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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계절의 변화에 둔감했다. 나는 바람이 차가운 초겨울까지 반바지를 입고 외출했고, 걸으면 땀이 나는 늦은 봄에도 두꺼운 스웨터를 입고 다녔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거나 에어컨 없이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여름옷’, ‘겨울옷’을 입었다. 그래서 내 방 옷장엔 언제나 사계절 옷이 함께 걸려 있었다. 엄마는 반팔 티셔츠와 롱패딩이 같은 행거에 걸린 것을 보고 화를 냈고, 동생은 나의 무신경함이 정신적 문제일 수 있다며 상담을 권유했다. “게을러서 그래, 미안해.” 나는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곤 했다.
억울하다. 비록 옷차림 때문에 대충 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내게도 엄연히 나만의 계절 의식(Ritual)이 있다. 봄에는 두릅을 사서 먹는다. 데쳐서 초장에 찍어 먹고 튀겨서 간장에 찍어 먹었다. 올해는 전에 꽂혀서 두릅전에 도전해보았전. 여름에는 공포영화를 본다. 이번 여름엔 끌리는 영화가 없어서 강태진 작가의 공포 웹툰 <사변괴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너를 만난 건 어느 추운 겨울 날, (원타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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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 나가보지도 못하고 기간 종료된 헬스장 문을 겸연쩍게 다시 두드린다. ‘처음은 가볍게’라는 핑계로 운동 같지도 않은 운동을 마치고 시내 나가는 길. 버스에서 괜히 어학원 수강료 한번 검색해본 뒤 마지막으로 서점 한 바퀴. 새해가 되면 연례행사처럼 도는 코스다. 올해는 헬스장보다 건강검진을 먼저 받아봐야 할 것 같고, 어학원 대신 어학 앱을 찾아보는 등 해마다 디테일에 변동은 있지만 본질은 변함없다. 새해에는 달라져야겠다는 각오 절반. 혹시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절반으로 시작하는, 예정된 배드 엔딩. 꾸준히 실패에도 같은 실수를 적극적으로 반복하는 건 이거라도 해야 내가 덜 모자란 인간이 될 것 같은 불안 때문이다. 연말이 감사와 반성에 젖어드는 과거 시제의 단어라면, 새해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의 미래 시제에 묶여 있다.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의 주술.
오랜만에 서점을 찾았더니 베스트셀러 코너에 온통 쇼펜하우어다. ‘기대가 낮으면 실망도 적다’를
[송경원 편집장] 배드 엔딩, 새드 엔딩, 해피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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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은 임기가 있고 의회에서 ‘n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이상으로 민주주의가 성숙한 나라들에 국회의원 소환제 따위는 없다(영국에 있다는 건 잘못 알려진 것이다).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잘 뽑는 것이 목표고, 선거에서도 개별 의원이 아니라 의회 전체의 구성에 주안점을 둔다. 투표로 의원 1명만 정하는 소선거구제는 국가 체계가 미숙하던 시절 중앙 권력과 지역 유력자가 결탁한 산물이다. 미국과 영국은 거기서 멈췄지만 민주주의 수준이 더 높은 네덜란드, 스웨덴 등등은 100년 전쯤 대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자질이 떨어져서 선거제도든 권력구조든 바꿔봤자 소용없다”고 주장하는 시민들이 있다. 구조를 통찰하지 않으면서 인물은 어떻게 가려낼지 궁금하다. 같은 배우도 극의 작품성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이다. 나는 지금 한국 정치인들의 면면이 괜찮다고 두둔하는 것이 아니다. 왜 나쁜 사람이 정치를 하게 되거나 멀쩡한 사람도 정치를 하면 망가지는가. 한국은
[김수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대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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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학 파트에서 맛과 요리 파트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부서 이동을 하게 되었다. 계획된 이동이다. 그래도 데스크에 부서 이동 메일을 보내고 나니 덜컥 걱정부터 났다.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가 맛과 요리에 관해 이야기한다니. 조금 우습다. 그래도 정확히는 맛과 요리를 다루는 잡지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할 테니 상관없을지 모른다. 해보지도 않고 전전긍긍하기보다 일단 해야 할 일부터 차근차근 처리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여러 부서에서 일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잡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단 시간을 지키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걱정이 아니라 늦지 않게 출근해야 한다. 새로운 부서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맛과 요리 부서는 다른 부서와 마찬가지로 정사각형 형태의 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거 말고는 모든 것이 다르다. 우선 개인 사무 공간이 없는 대신 거대한 원형 테이블에서 모두가 근무하고 있다. 유일하게 분리된 개인 책상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4-1. 맛과 요리 섹션: 부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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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인생의 길잡이라 할 만한 경구가 있다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먼저 떠오른다. 20년째 메모장에 꾸준히 업데이트 중인 명문장 리스트는 교체가 빈번한데 <안나 카레니나>를 접한 이후 제일 첫줄만큼은 바뀐 적 없다. 원어의 정확한 뉘앙스까지 파악할 능력은 안되지만 여러 한국어 번역 중에는 2009년 문학동네 버전을 특히 좋아한다. 문학동네 버전의 ‘고만고만’과 ‘나름나름’이란 표현에선 설사 톨스토이 문체의 원본일지라도 온전히 표현하기 힘든 여백의 매력이 느껴진다. 의미 전달보단 마음의 형상을 그리는 데 집중한 이 짧은 형용사가 한국어의 말맛을 살려 친근하게 거리를 좁힌다.
완벽한 이해란 환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법이다. 손실 없이 온전히 생각을 전달하는 건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대체로 오해를 경유하여 소통한다. ‘오해’라는 단어가 부정적이라면 ‘나름나름의 해석’이라고
[송경원 편집장] 고만고만했던 시간들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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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가 독서 교실에 윷놀이 꾸러미를 가지고 왔다. 어린이들은 독서 교실에 놀거리를 잘 가지고 온다. 공깃돌부터 트럼프 카드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그런데 윷놀이는 정말 뜻밖이었다. 게다가 봄이가 가져온 윷은 척 봐도 아주 좋은 나무로 만든 ‘작품’이었다. 놀이 방법을 적은 책자도 함께 들어 있었는데, 영어로만 쓰여 있었다. ‘백도’(표준어다)도 ‘BACK DO’라고 표시되어 있어 색다르게 느껴졌다. 봄이는 어머니가 회사 일로 어찌어찌 갖게 된 걸 자기한테 주셨다고 했다. 짐작하건대 외국인들에게 선물로 주는 고급 기념품인 것 같았다.
“윷놀이는 전통 놀이야. 알고 있지?” 봄이는 “그걸 누가 몰라요?”라며 나에게 핀잔을 주더니 “근데 전 몰랐어요” 하고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학교에서 배우긴 했는데 이해가 잘 안 가더라고 했다. 독서수업을 먼저 하고 시간이 되면 윷놀이를 하자고 했지만 봄이는 완강했다. “선생님이랑 하고 싶어서 일부러 가져온 건데, 그냥 먼저 하면 안돼요?” 많은 한국
[김소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윷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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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겐 각자의 겨울이 있다. 내 경우엔 겨울 하면 <성냥팔이 소녀>가 자동 연상된다. 이 의식의 흐름에는 나름의 프로세스가 있는데, 우선 소복하게 눈 쌓인 거리에 서서 추위에 몸을 떨며 실내를 바라보는 모습이 기본 배경이다. 이어 여러 가게에서 새어나온 불빛 덕분에 거리가 주황빛으로 물들면 차가운 거리마저 따스하게 데워지는 기분이다. 이쯤 되면 노래가 한곡 흐를 차례. 머릿속 음반은 해마다 바뀌는데 최근엔 마이클 부블레가 부른 가 재생 중이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해./ 어디를 가든/ 잡화점을 봐. 다시 반짝이고 있어/ 지팡이 사탕과 화려하게 꾸며진 마을.” 실은 한번도 직접 겪어본 적은 없지만 누구나 친근감을 느낄 만큼 보편적인, 내 안의 겨울 풍경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보며 오랜만에 겨울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술에 의지해 살아가는 일용직 노동자와 폐기 처분할 음식을 챙겼다고 실직 위기에 놓인 마트 직원의
[송경원 편집장] 잔잔한 고통의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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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마치 코로나19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취약한 이들의 사망 원인 가운데 무척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현재진행형의 위협이다. 단지 미디어가 다루지 않을 뿐이고, 국가가 관심을 거두었을 따름이다. 특정 위협에 대한 사회의 과민한 반응도 과소한 관심도 이들이 어찌 하느냐에 달렸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우리말로는 꽤 이상한 용어에 짓눌려 살았던 지난 몇년. 그동안 우리가 알던 사회라는 건 꽤 많이 파괴됐다. 거리두기를 거두었어도 한번 벌어지기 시작한 거리는 도통 좁혀지지 않는다. 물론 단지 얼마간의 강력한 방역정책 탓만도 아니고 오로지 코로나19가 원흉인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이미 진행되고 있던 사회의 해체를 가속화시켰을 따름이다. ‘언택트’라는 더 괴이했던 용어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다면, 수시로 ‘접속’하되 여간해선 ‘접촉’하지 않는 우리의 사회적 변형을 꽤 정확히 찌르고 든다는 점일 테다.
세기말의 분위기로 접어들던 199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냉정과 열정 사이에는 온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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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당진으로 세트를 확인하러 다녀왔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P 피디님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각종 TMI들과 작품에 임하는 각오, 미래에 대한 계획 등 끝도 없이 떠들어댔다. 나는 왜 항상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걸까. 운전 중의 무료함을 달래주려 수다를 떤 것이 되레 그들을 피곤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요즘 나는 스스로 다짐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번에도 그 말을 꺼내놓았다.
“저는 작업할 때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항상 예민하고 강박이 심했기 때문에 사실 영화를 찍는 과정 자체에서 재미를 크게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재미있어요. 요즘은 마음이 편안해요. 강박적인 것이 꼭 좋은 작품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즐겁게 찍어도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경험을 이 드라마 작업을 통해 이루고 싶어요. 그 경험이 앞으로 지속적인 작품 활동을 위해 저에게 꼭 필요해요. 피디님, 저는 요즘 너무 즐거
[김세인의 데구루루] 모든 것이 고양이의 꿈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