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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앞에서 글을 쓰려고 했다. 계획을 들은 사람들은 ‘그곳은 그럴 만한 곳이 아니에요!’라며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익히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정신없는 관광지인 것을 확인했던 터라 그곳이 글을 쓰기에 적합하지 않은 공간인 것은 나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도 화산 앞에서 글을 써보고 싶었다. 또 ‘화산 앞에서 글을 쓰려고요’라고 말해보고 싶었다.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스스로 좀 근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아도취에 빠져 케이블카를 타고 산등성이를 한차례 넘자 정거장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별 볼 일 없었다. 그날따라 날이 좋아서 역시 나는 운이 좋다며 신나게 숙소를 나섰는데 날이 심하게 너~무 좋아서 내리쬐는 태양 아래 증기도 연기도 신묘한 기세도 아무것도 없이 거대한 공사판 같은 날것의 흙바닥만 먼지를 피우고 있었다. 뭘 해야 할지 몰라 일단은 수명을 7년 늘려준다는 검은 달걀을 사서 먹었다. 따가운 햇볕 아래서 먹자니 목이 막혀 수명이 더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김세인의 데구루루] 일곱시에 열두번 우는 뻐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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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무주산골영화제에 다녀왔다. 시외버스에 몸을 싣기 전 터미널에서 김밥까지 사먹었더니 그야말로 제대로 ‘영화 소풍’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영화제 행사장 일대를 어슬렁거리며 오랜만에 만난 영화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것도 좋았지만, 사람들이 모인 곳을 조금만 벗어나면 인구밀도가 급격히 낮아지는 소도시의 특성상 발길 닿는 대로 이동하다 온전히 혼자 된 기분을 만끽하는 일이 무엇보다 좋았다. 그러다 유난히 키 큰 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다가가 안내 푯말을 보니 수령이 500년이다. 무주에서만 500년을 산 이 나무는 다른 땅, 다른 하늘이 궁금하지는 않았을까. 나무가 품은 경이로운 시간에 감탄하며 무주를 산책하자 어쩐지 <박하경 여행기>를 찍는 기분이 들었다.
미야케 쇼 감독도 신작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들고 무주산골영화제를 찾았다. 어깨너머로도 그를 보진 못했지만 이번주 특집 기사를 읽으며 그를 꽤 잘 알게 된 느낌이다. <씨네21>
[이주현 편집장] 청춘영화의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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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이었다. 채도와 명도가 높은 파란색 파도가 휘몰아쳤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비슷한 느낌이었는지 주위 사람들도 웃거나 탄성을 질렀다. 공항 건물이 살짝 흔들린 것도 같았다. 귀국한 아티스트 J가 공항 출구에서 자신의 차로 향하는 시간은 10여초였다. 몇 시간을 기다린 팬들이 그를 따라가며 환호한 것은 물론이고, 나처럼 누군가를 마중 나왔다가 난데없이 그 파도를 맞은 사람들도 왠지 들떠 웅성거렸다. 누군가 말했다. “와, 정말 대단하다.” 그건 K팝 스타의 인기라든가 팬들의 ‘열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갑자기 공기를 눈부신 것, 차가운 것, 또는 열렬한 것, 간지럽고 조금 눈물 나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사랑이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이만한 에너지를 가진 건 사랑밖에 없다.
사실 팬덤 문화에 대해서라면 나도 모르지 않는다. 한반도의 팬덤 역사에서 나는 신석기인쯤 될 것이다. 90년대 초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열풍이 시작되기도 전, 종로 어느 레코드 가게에서 재
[김소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사랑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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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인데 이제 ‘버즈’ 노래 좀 그만 불러.” 나는 노래방을 나와 두 시간 동안 참았던 말을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내가 노래방을 가고 싶다고 할 때마다 군말 없이 동행해주는 착한 친구가 그 말에 걸음을 멈췄다. 친구는 그날 버즈의 〈Monologue〉 〈가시〉 〈겁쟁이〉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남자를 몰라〉를 불렀고 매 곡 민경훈의 두성 퍼포먼스(입에서 정수리까지 마이크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동작)를 보여줬다. 친구는 화난 눈으로 나를 노려보다 대뜸 〈겁쟁이〉의 가사를 읊조렸다. 날 사랑해줘요. 날 울리지 마요. 숨 쉬는 것보다 더 잦은 이 말 하나도… 나는 겁쟁이랍니다. 나는 너무 무서웠다. 말없이 걷고 있는데 친구가 “버즈의 감성도 모르는 애들이 사랑을 알겠냐?”라고 말했다. 나는 또 너무 무서웠지만 침착하게 되물었다. “버즈의 감성이 뭔데?” “사랑하는 여자가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 질척대는 ‘지질한 남자’의 절규.” “그래. 근데 넌 여자면서 왜 공감하는데?” “성별은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날 밀어내도 깊어지는 이 사랑을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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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가 5월27일 폐막했다. 여전히 마음은 칸에서 배회 중인 듯한 송경원, 김소미 기자는 시차 적응에 실패했다며 다크서클을 주렁주렁 달고 출근했다. 영화 보랴 기사 쓰랴 사람들 만나랴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두 사람은 칸영화제 공식 굿즈 중 하나인 에코백 선물을 잊지 않았다. 칸영화제 출장자의 에코백 선물은 어느덧 <씨네21>의 전통 아닌 전통이 되어버려, 나는 칸영화제 에코백만으로 일주일 내내 새 가방을 들 수 있는 에코백 부자가 되었다. <씨네21> 기자들은 한동안 너도나도 한쪽 어깨에 ‘FESTIVAL DE CANNES’이 큼지막이 프린트된 가방을 메고서 묘한 동료애를 나눌 것이다. 시사회장에서나 거리에서 같은 가방을 멘 서로를 발견하고 슬며시 미소 지을 것이다. 사실 진짜로 기다린 건 에코백이 아니라 칸에서의 이야기다. 아직 두 기자는 칸에서의 이야기보따리를 제대로 풀어놓지 않았는데(나만 못 들은 건가?), 들리는 얘기에 따르면 <씨네21>
[이주현 편집장] 칸의 영화들, 수입 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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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건설노동자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결국 사망했다. “죄 없이 정당하게 노조 활동을 했는데, 집시법 위반도 아니고 업무방해 및 공갈이랍니다. 제 자존심이 허락되지가 않네요”라고 그는 유서를 남겼다. ‘심리적 G8’에 이르렀다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들의 심리는 세계 최정상 8봉 가운데 하나에 올랐는지 몰라도 내 마음은 바닥을 뚫고 한없이 추락한다. 도대체 그들의 심리와 나의 심리가 이렇게 ‘하늘 끝, 땅끝’만큼의 차이가 있단 말인가.
비록 나와는 달라도 같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만큼은 남겨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조선일보>가 나의 그 안간힘조차 걷어찼다. 당시 현장에 있던 주변 동료들이 분신 노동자를 말리려고 하지 않았고, 심지어 유서까지 대필한 의혹이 있다는 주장. 누군가는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위해 목숨을 던지고, 대부분은 그걸 보며 참혹해하는데, 다른 누군가는 그렇게 스러져간 목숨을 조롱한다. 같은 인간이 아닌 건가, 아니면 인간들 중 일부는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수치심 없는 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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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우리를 가끔 어딘가로 이끄는 도구라면, 잡지는 종종 그 도구를 통해 어딘가로 소환된 사람들의 흔적이다. 두 번째 취재를 위해 어디든 가야 했지만 아무 곳도 갈 수 없었다. 마감까지 주어진 시간은 기사를 송고한 후부터 20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기한 안에 무엇이든 써내야만 한다는 사실은 인간을 집 안에만 처박히게 만든다. 지역과 여행 기사에서 중요한 것은 더이상 정보가 아니다. 물론 해외여행이 신기했던 때만 해도 누군가의 여행기와 유학 성공기를 텍스트로 읽으며 다른 지역에 대한 정보를 얻고 선망을 키워왔겠지만, 정작 내가 그곳에 도달했을 때 대부분의 여행기나 유학 성공기는 8할이 거짓임을 깨달았다. 이제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새로운 지역, 아무도 가보지 못한 여행에 대한 정보는 유튜브에 널려 있다. 사람들은 이제 더 큰 진실을 위해 실시간으로 집 안에서 수많은 여행기(영화도 마찬가지다)를 다시 보고, 돌려 보고, 멈춰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행과 영화에 진실이 그렇게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지역과 여행 섹션: 완벽한 애틀랜타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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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계 축구계는 레알 마드리드 소속 선수 비니시우스 주니오르를 향한 인종차별 문제로 떠들썩하다. 지난 5월22일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발렌시아와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 도중 발렌시아의 홈 팬들이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수 비니시우스를 향해 인종차별적 발언을 퍼부었다. 비니시우스는 관중과 설전을 벌였고 경기 막판엔 상대 선수들과 몸싸움을 하다 퇴장까지 당했다. 이후 비니시우스는 자신의 SNS에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두 번째, 세 번째도 아니다. 라리가에선 인종차별이 일상화되어 있다”고 스페인 축구계에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가 브라질의 축구 스타이기도 한 만큼 룰라 대통령까지 나서 인종차별 행위에 대한 엄중한 대처를 촉구했다. 많은 동료 선수들이 비니시우스를 향해 연대 의사를 표했고, 25일 레알 마드리드 홈구장에서 진행된 경기에선 동료 선수들이 비니시우스의 유니폼을 단체로 입고 경기장에 입장했다. 구단은 공식 SNS에 이 사진과 함께 “우리는 모두 비니시우스다”라는 문장을 올렸다. 손
[이주현 편집장] NO ROOM FOR RA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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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로봇청소기를 쓰기 시작했다. 지난해 연구실이 생기자마자 샀던 것은 부직포를 붙여 쓰는 청소밀대였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내 손으로 연구실 구석구석을 쓸고 닦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이주일이 되고 이주일이 한달이 되고 한달이…. 그렇게 일년쯤 지난 후 난 청소할 생각을 접었다. 역시 바쁜 현대인은 기계의 도움이 필요해! 그렇게 로봇청소기를 주문했다.
기계가 나를 대신해서 연구실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게 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연구실 문 앞에 도착한 박스를 보며 깨달았다. 내가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된 사용설명서가 없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인터넷 검색으로 같은 제품을 쓰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고 대략적인 사용법을 익혔다. 별도로 구입한 전원 플러그를 연결하고 함께 온 여러 부품을 본체와 스테이션에 끼워넣었다. 연구실에 벽면 콘센트가 많지 않아 원래 있던 냉장고를 어정쩡하게 틀어놓고 나서야 스테이션이 놓일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앱을 다운받고
[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나의 로봇청소기 사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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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여름, 당근마켓에서 2만원 주고 산 소파에 앉아 풍경 소리를 들으며 한 계절을 보냈다. 당시 나는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 출품을 목표로 이야기를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크게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단지 잠자코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바람이 가로질러가며 풍경을 울리는 소리를 듣다보면 이야기도 불현듯 방문할 것 같았다. 꽤 간절하기도 하고 심드렁하기도 했다. 나와 주변에서 벌어지는 불가해한 일들을 바라보다 보면 이야기는 의미가 없다. 이야기는 아무 힘이 없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감사하게도 많은 축복과 응원을 받았음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 안에서는 이야기에 대한 경멸이 커졌다. 다시 이야기라는 것을 믿고 싶었기에 그 방문이 간절했고 끝내 믿을 수 없을 거라 예상했기에 심드렁했다. 그래도 뭔가 떠오르기는 했다. 중년 여성 ‘동경’과 어린이 ‘을래’라는 두 인물 사이에 흐르는 시간에 대한 것이었는데 트리트먼트가 완성되었지만 스스로도 도저히 그 인물들과 이야기가
[김세인의 데구루루] 이야기의 빛과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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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영화인들의 대축제, 제76회 칸영화제가 5월16일 개막했다. ‘과거의 오늘’을 상기시켜주는 SNS는 지난해 이맘때 내가 칸에 있었음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칸영화제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온라인 티켓 예매 시스템에 적응하느라 애먹었던 기억도, <헤어질 결심> <슬픔의 삼각형> <클로즈>를 보고 나온 뒤 벅차고 설레고 행복했던 기분도, 맛있는 크루아상을 먹고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매일 프렌치 무드에 취했던 시간도 이제는 그저 아득하기만 하다. 올해는 송경원, 김소미 기자가 칸영화제 취재를 맡았는데, 그들이 생존신고차 보내온 사진들을 보니 올해도 칸의 하늘은 쨍하게 푸르고 영화제의 열기는 기대만큼 뜨거워 보인다. 영화제 초반에 화제 혹은 논란이 된 작품은 개막작 <잔 뒤 바리>다. 논란의 이유는 <잔 뒤 바리>가 가정 폭력 혐의로 법정 공방을 이어갔던 배우 조니 뎁의 복귀작이기 때문이다. 문제적 배우의 복귀 시점은 언제나 논란 거리
[이주현 편집장] 영화제의 빛과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