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인데 이제 ‘버즈’ 노래 좀 그만 불러.” 나는 노래방을 나와 두 시간 동안 참았던 말을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내가 노래방을 가고 싶다고 할 때마다 군말 없이 동행해주는 착한 친구가 그 말에 걸음을 멈췄다. 친구는 그날 버즈의 〈Monologue〉 〈가시〉 〈겁쟁이〉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남자를 몰라〉를 불렀고 매 곡 민경훈의 두성 퍼포먼스(입에서 정수리까지 마이크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동작)를 보여줬다. 친구는 화난 눈으로 나를 노려보다 대뜸 〈겁쟁이〉의 가사를 읊조렸다. 날 사랑해줘요. 날 울리지 마요. 숨 쉬는 것보다 더 잦은 이 말 하나도… 나는 겁쟁이랍니다. 나는 너무 무서웠다. 말없이 걷고 있는데 친구가 “버즈의 감성도 모르는 애들이 사랑을 알겠냐?”라고 말했다. 나는 또 너무 무서웠지만 침착하게 되물었다. “버즈의 감성이 뭔데?” “사랑하는 여자가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 질척대는 ‘지질한 남자’의 절규.” “그래. 근데 넌 여자면서 왜 공감하는데?” “성별은 상관없어. 사랑 앞에서 인간은 모두 지질한 법이니까….”
친구가 제일 좋아하는 버즈의 노래는 〈남자를 몰라〉였다. 나는 그 곡에 대한 친구의 깊은 애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제목부터가 남자를 모른다는데 어떻게 성별 따위와 관계없이 이입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친구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다. “그 노래 가사에서 ‘남자’를 ‘남성’으로 바꿔봐. 관계에서 을이 되는 남자의 포지션을 이용해 역차별을 호소하는 노래의 본질이 들리면서 되게 싫어진다니까?” 친구가 나를 딱하게 바라보기 시작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친구를 설득하려 수많은 ‘남자 노래’들을 개사해 불렀다. 김영배의 〈남성답게 사는 법〉, 김장훈의 〈난 남성이다〉, 김종국의 〈한 남성〉…. 친구가 짜증을 냈다. “다른 노래는 그럴지 몰라도 〈남자를 몰라〉를 모욕하지 마! 그 노래는 ‘인간의 순정’에 대한 노래니까!”
발라드풍의 록은 대부분 마초적인 남자 가수들이 자신의 여린 순정을 노래하기 마련이다. 그 노래 속에서 여자들은 일찍 사망하거나, 병들어 아프거나,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나며 부재한다. 마초는 미간을 찌푸린 채 등장해 전주부터 비애에 젖어 있고, 모질고 못난 자신의 처지를 후회하는 빌드업을 통해 후렴의 샤우팅으로 질주한다. 한 차례 절규가 끝나면 간주를 이용해 눈물을 꾹 눌러 담았다가 다시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천둥처럼 포효한다. 마치 곡 밖에 있는 여자에게 슬픔을 전하듯이. 그러나 곡 밖에 있는 여자들은 ‘누가 내 얘길 하나?’ 하며 면봉으로 귀를 팔 것이다. 그 처절한 목소리가 닿는 곳은 반경 30센티미터. ‘록-발라드’는 그 곡 안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남성의 고통과 상처를 위로하는 노래이니 여성인 내가 공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 결과 여자들은 〈고해〉를 노래방 금지곡 리스트에 올리고 말았고….
“야. 〈남자를 몰라〉가 인간의 순정에 대한 노래라면 〈인간을 몰라〉로 했어야지.” 친구는 이제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너 왜 이렇게 ‘남자’라는 말에 집착해? 그럼 미쓰에이의 〈다른 남성 말고 너〉, 핑클의 〈내 남성친구에게〉, 스페이스A의 〈섹시한 남성〉은? 이런 것도 싫다고 말해봐.” 도저히 내가 싫어할 수 없는 곡들의 나열. 갑작스러운 공격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자 친구가 핸드폰에서 무언가를 검색해 내 앞에 들이밀었고 화면엔 〈남자를 몰라〉의 작사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작사 김진아. “봤지? 친구야. 우리 단어 하나에 매몰되어 명곡을 잃지 말자.” 외통수였다. 내심 패배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에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2021년에 방영된 〈아카이브K〉(SBS)는 ‘K팝 유행’의 절정기에 대한민국 대중음악사를 되짚는 다큐멘터리 시리즈였다. ‘다큐음악쇼’를 표방한 방송은 장르와 장소로 국내 대중음악의 계보를 구분했고, 대중에게 사랑받은 가수들을 호명해 회고와 공연을 모두 구현해냈다. 90년대를 어린이로 보냈던 나는 이 쇼를 통해 ‘문나이트’, ‘동아기획’. ‘학전’ 같은 서울의 음악 신을 제대로 알았고, 10대 시절 외로움에 찾아 들었던 ‘홍대 인디클럽’의 음악과 2000년대 중후반 본격적인 ‘K팝’의 태동기를 추억할 수 있었다. 볼거리가 무궁무진한 쇼였지만, 지금까지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단 두 장면으로, 하나는 ‘얼굴에 살이 많아서 무대에서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변진섭의 고백이었고, 또 하나는 ‘한국형 발라드의 계보 편’에 등장한 작사가 박주연의 존재였다.
자신이 처음 이걸(표현) 왜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떠올리고 고치기 위해 여전히 모든 가사를 손으로 쓴다는 그의 대표곡은 대부분 남성 가수들의 발라드였다. 윤종신의 〈오래전 그날〉,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 윤상 〈이별의 그늘〉, 성시경 〈외워두세요〉…. 남성 화자의 1인칭 시점으로 쓰인 노랫말 대부분이 여성 작사가의 경험담이라니. 나는 몹시 신비로운 배반감에 빠졌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듣고 무엇을 싫어한 것이란 말인가? 남성적인 록 밴드 음악? 록이 남성적이라는 것은 편견이 아닌가? 여성의 화법으로 쓰인 발라드 가사? 여성의 화법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작곡가, 작사가, 뮤지션, 곡의 화자… 나는 노래를 이루는 모든 요소에 성별을 붙였다가 뗐다가, 이건 남자 노래? 이건 여자 노래? 분류하며 깊은 혼돈에 빠지고 있었다.
여전히 노래의 성별을 가려 규탄하고 싶어 하는 나에게 친구는 경멸의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그냥 들어봐. 이건 노래가 아니야. 눈물이야.” 이미 마음 떠난 연인을 향해 그가 약속에 매번 늦어도 이해하고, 누굴 만났냐고 묻지도 않고, 수없이 어긋난대도 기다리고, 가슴 아파도 웃고…. 그러다 결국 오열하며 네 맘에 누가 있든 괜찮으니 내 강한 사랑을 알아 달라는…. 남자! 남자의 이야기! 결국 ‘남자’라는 단어를 넘지 못하고 집으로 가는 길. 유튜브에서 〈남자를 몰라〉를 재생해본다. 과연 명곡임은 틀림없었다. 노래가 한편의 영화 같았으니까. 홀로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한강 고수부지에서 소리를 지르고, 그러다 파출소 바닥에서 새벽을 맞는 것 같은 이 구질구질한 감정의 소용돌이. ‘남자가 주어가 아니라면 나도 이 노래를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순간, 마치 마법처럼 민경훈이 나를 보며 노래했다. “왜 너만 몰라, 왜, 널 지킬 쌈자를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