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 정치권력의 핵심 중 핵심으로 알려진 모 의원이 속칭 ‘험지 출마’ 요구를 받았다. 그의 응답은 실로 호기로웠다. 지역구 지지자로 이뤄진 산악회 창립기념식을 연 것이다. 100대에 가까운 버스가 동원됐고 수천명이 체육관에 운집했다. 한때 엄청난 욕을 먹었던 광고,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친구의 말에 ***로 답했습니다”가 떠올랐다. 멸사봉공의 자세로 사지를 향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파란 눈의 대통령”이 던진 말에, “웃기시네요”라고 답한 격이다. 실제로 각종 언론 보도에 올라온 사진 속에서 그는 여봐라는 듯 파안대소하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건 솔직히 관심은 없다. 대단한 뭐라도 되는 양 자신이 하는 모든 말에 엄청난 무게를 싣는 그도 우습고, 양손을 들어 환호하는 지지자들 사이에서 마이크를 쥐고 부흥사 행세를 하는 또 다른 그도 마뜩잖다. 나는 그저,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는 듯한 이 모든 광경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보통의 한국인과는 다른 외양을 하고 있는,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거꾸로 가는 시계
-
무리의 중앙에 서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양옆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주인공은 돋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주인공이라 여기고, 주인공이 아님에 좌절하며, 주인공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타짜>의 곽철용(김응수)이 잘난 놈 제치고, 못난 놈 보내고, 안경잡이같이 배신하는 새끼들 다 죽인 이유도,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최익현(최민식)이 남천동에서 느그 서장과 함께 밥도 먹고 사우나를 한 이유도… 모두 ‘센터 욕심’이라는 인간의 본능에 충실했기에 발생한 일인 것이다.
‘센터’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유통한 <프로듀스 101>을 생각해보라. 센터는 그 자체로 우승자의 특전이었다. 노래를 제일 잘 부르면 ‘메인 보컬’이 되고, 춤을 제일 잘 추면 ‘메인 댄서’가 된다.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모난 데가 없으면 ‘리더’가 된다. 얼마나 합리적인 역할 분담인가? ‘매력’과 ‘인기’라는 모호한 기준이 작용하는 것은 오직 센터를 결정할 때만이다. 센터는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완전 반해 반해버렸어요
-
“네 잘못이 아니야.”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천재와 심리학 교수 사이의 우정을 그린 영화 <굿 윌 헌팅>(1998)에서 현명한 어른 숀(로빈 윌리엄스)은 진심 어린 말로 윌(맷 데이먼)의 닫힌 마음을 두드린다. 이 장면의 힘은 ‘네 잘못이 아니’라는 내용에 있지 않다. 정답은 이미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번번이 좌절하는 건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이해와 공감은 서로 다른 차원의 우주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이토록 먼 우주를 건널 에너지를 확보할 방법은 마음을 연료 삼아 불태우는 것뿐이다. 내용보다 중요한 건 전달되는 방식과 타이밍, 그리고 기어코 가닿겠다는 간절한 의지다. 숀은 “나도 아는 게 많지 않지만 (너를 평가하는) 이 기록들 다 헛소리야”라고 운을 띄운 뒤 낮은 목소리로 반복해서 읊조린다. 숀의 눈빛, 표정, 몸짓이 온전히 윌을 향할 때 비로소 윌에게서 출발한 (마음의) 파동은 서로 다른 처지와 경험, 세대를 초월해 숀에게 당도한다
[송경원 편집장] 마블은 함정에 빠졌다
-
‘폼팩터(form factor)’라는 용어가 있다. 컴퓨터 하드웨어의 크기나 모양 등 물리적 사양을 지칭하는 용어였으나 이제 스마트폰과 같은 모바일 기기의 제품 외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예를 들어 2G 시대 휴대폰의 형태가 플립, 폴더, 슬라이드 등 다양했다면 (심지어 ‘가로 본능’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폼팩터가 등장하기도 했다) 3G 시대 이후의 스마트폰은 한동안 터치스크린 기능을 장착한 큰 화면과 얇은 베젤을 중심으로 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유사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인간의 외모가 그렇듯 사물의 외형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많은 전문가들이 폼팩터가 단순히 제품의 외적인 요소만을 뜻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잘 알려진 대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PC와 아이패드를 각각 트럭과 승용차에 비유한 적이 있다. 트럭과 승용차는 확연히 다른 외형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 점 때문에 운전자의 경험 역시 완전히 달라진다. 사용자 경험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이패드가 약속한 새
[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리얼하지 않을수록 혁신이다
-
-
“그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 어떤 위대함도 없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삶이 패배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커튼> 중
쿤데라가 죽었다. 부고 소식을 접했을 때 텅 빈 서점에서 오래도록 휴간 중인 잡지를 읽고 있던 차였다. 그가 만든 세상에 빠져 친구들과 쿤데라 전집 읽기를 했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 쿤데라도, 그의 글을 함께 읽던 동료들도 이젠 기억 속에 너무 멀어져 있다. 과거에 분명 밀란 쿤데라가 쓴 모든 책을, 심지어 외국 잡지에 기고한 단편이나 인터뷰까지, 찾아 읽었던 적도 있다. 마치 눈을 가린 사람처럼. 그때는 영영 그 순간이 영원하리라 믿었다. “우리는 눈을 가린 채 현재를 지나간다. 기껏해야 우리는 현재 살고 있는 것을 얼핏 느끼거나 짐작할 수 있을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예술과 문학섹션: 불멸과 애도
-
최근 가수 성시경과 나얼이 함께한 신곡 <잠시라도 우리>에 꽂혔다. 취향 저격한 노래는 물론이고 뮤직비디오의 애잔한 감성이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눈으로 듣는 것까지 즐거운 건 오랜만이기에 음원 사이트 대신 유튜브에서 무한 반복 감상 중이다. 흰옷을 입은 여성(천우희)이 손거울로 햇살을 반사시켜 눈가를 간지럽힌다. 밝은 꿈과 어두운 현실이 몇 차례 교차한 뒤 멀리서 들리는 헬기 소리, 흔들리는 물컵 그리고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나는 여성. 이윽고 나지막이 읊조리듯 노래가 시작된다. “가까스레 잠이 들다 애쓰던 잠은 떠났고…” 건조한 가을바람처럼 까슬거리는 단어를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감싸는 이 탁월한 도입부는 우리를 순식간에 다른 시공간으로 초대한 뒤 무장해제시킨다. (자매품으로 <너의 모든 순간>의 “이윽고…”가 있다.) 자주 쓰지 않아 살짝 녹슨 단어로 조탁한 가사와 친숙한 멜로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의 완벽한 조합.
짧은 영상이 대세 영상 콘텐츠로
[송경원 편집장] 상상력과 회상력
-
“윤통이 옛날부터 너무 보수적이었다는 말이 있더라.”(어느 정치 평론가) “법조 기자할 때 대화를 나눠본 윤 검사는 전혀 극우적이지 않았다.”(모 언론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성향을 두고 정치권 주변 사람들은 ‘선천설’과 ‘후천설’로 나뉜다. 나는 후자다. 보수우익적이다 싶은 것을 강박적으로 모아놓은 정책 체계가 되레 수상하다. 이명박씨와 박근혜씨도 그렇지는 않았다. 그는 거울 보고 작심한 사람 같다. “어이 브러더, 이제 고만 선택해라.” 여당의 보궐선거 참패 이후 ‘국정기조 전환’에 관심이 모인다. 나는 그런 것은 없거나 있어도 총선 전까지라는 쪽에 건다. 정치9단 김영삼 전 대통령도 임기 중반 전두환 세력을 단죄하고 총선에서 예상을 웃도는 성과를 올렸지만, 그 이후 야당 의원 빼가기, 공안 정국 조성, 노동법 및 안기부법 날치기로 치달았다. 지지 기반이 어느 쪽이냐에 달린 일이다. ‘호랑이를 잡는다’는 포부도 ‘호랑이굴’이라는 조건을 이기지 못했다.
“(민주당에서) 이탈한
[김수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신세계
-
친구 B와 우연히 일년 전 사진을 발견했다. 일년 전이라 하면 나나 B나 인생 최대 나락의 시기여서 거울을 보며 또 서로를 보며 우리는 모든 것이 소진되었고 한 시기가 훌쩍 지났구나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다시 꺼내본 사진 속 우리는 너무 앳되었고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은은한 광기와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거울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청춘의 심령이 카메라에 포착된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카메라를 통해 그 낯선 얼굴을 제대로,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청춘은 나에게 도깨비, 유령처럼 소문만 무성한 것이었다. 나는 줄곧 내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모든 것이 다 지나가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충분히 청춘이었던 적이, 제대로 청춘이었던 적이, 그저 청춘이었던 적이 이번 생엔 없는 거구나 싶어 섭섭했다. 창문 밖의 새순을 보며 수영복을 한참 골랐는데 현관문을 여니 이미 낙엽이 떨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만 그런가? 요
[김세인의 데구루루] 청춘의 표정
-
힘들고 지쳐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을 때 불현듯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인생의 등대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지난 10여년 영화주간지 기자 일을 하면서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질 때마다 장면 하나, 대사 하나가 머릿속에 자동 재생되어 등을 다독여주었다. 소년의 성장을 12년 동안 촬영한 <보이후드>(2014)의 마지막, 어느덧 성인이 된 메이슨 주니어(엘라 콜트레인)가 대학 진학을 위해 집을 떠난다. 자식들이 다 떠나고 다시 혼자 살게 된 엄마 올리비아(퍼트리샤 아켓)는 속없이 즐거워하는 아들이 못마땅하다. 올리비아는 급기야 복받친 감정을 이기지 못해 흐느끼며 나지막이 되뇐다.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허망함으로 쪼개진 심장 사이 스며나온 진득한 감정은 아직도 내 마음속 얼룩으로 남아 있다.
얼룩이란 게 참 희한한 것이 관점에 따라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으로 보이기도 한다. “결국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거야”라며 울음을 터트리던 올리비아의 한탄은
[송경원 편집장] 끝과 시작
-
나이가 드는 건 좋은데 노인이 되는 건 두렵다. 나는 생활의 경험을 쌓고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지금이 과거 어느 때보다 좋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런데 노인이 된 나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눈이 침침하고 근력이 부족하고 청력이 떨어지는 신체상의 노화도 걱정이지만, 사회적으로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 떠올리면 겁부터 난다. 모든 신기술에 꼴등으로 적응해온 나는 키오스크와 태블릿 주문에 익숙해지는 데만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따라잡을 자신도 없고, 초연해질 배짱도 없다. 나는 도태될 것이다. 광고 속 할머니는 보통 온 가족과 함께 등장한다. 희끗희끗한 머리가 단정하게 손질되어 있다. 깔끔한 니트를 입고 딸 아들 손주들에 둘러싸여 온화하게 웃는다. 이런 게 사람들이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할머니의 모습일까?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할머니가 될 수 없다. 자녀가 없으니까. 그런데도 마트 같은 데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를 “할머니”라고 부를 것이다. ‘할머
[김소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할머니
-
오늘 아침엔 발목에 검은 별이 그려진 금색 양말을 신었다. 내 양말 서랍에서 가장 무난한 디자인이었다. 반짝이, 땡땡이, 형광, 야광, 레이스…. 서랍 속을 한참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7년 전 어느 날이 떠올랐다. 친구 S는 밥을 먹다 말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가 검정색 옷만 입는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공포일 수도 있어.” K도 옆에서 거들었다. “어떨 땐 너가 사람이 아니라 그림자 같기도 해.” 어떻게 사람에게 그림자라는 그런 심한 말을…. 나는 말문이 막혀서 대꾸할 수 없었다. 가게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그날따라 더 그림자 같았기 때문에….
친구들의 충고는 일리가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검은 옷만 입던 내가 갑자기 무지개색 티셔츠를 입고 나타난다면 그들은 그 모습에 더 커다란 공포를 느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검정 옷을 고수하면서도 나의 내면에 자리한 사랑스러움, 귀여움, 순수함을 은은하게 드러낼 방법은 없을까? 액세서리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오직 하나뿐인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