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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들을 때 장소는 얼마나 중요한가? 최고급 음향 시스템이 갖춰진 청음실이나 아티스트와 오감을 나누는 콘서트장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매달리고 싶은 질문은 특정 음악이 ‘장소’로 인지되는 소소한 경험들에 있다. 2008년 겨울에 강남역에서 안경을 살 적, 가게 점원 중 한명이 너무도 서럽게 울던 것이 생각난다. 그때 가게에선 빅뱅의 <Forever With You>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지금도 그 노래만 들으면 강남역의 시리고 차가운 슬픔에 마음이 잠긴다.
종종 음악은 모든 기억을 되살린다. 거꾸로 하면, 음악이 없었던 순간은 아주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 2017년의 어느 겨울밤, 나는 회사 사무실에 있었다. 무슨 요일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업무가 쌓여 야근을 해야 했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었던가, 굶고 커피를 마셨던가. 그냥 정신없이 닥친 일을 쳐냈던 것 같다. 대충 마무리하고 나니 밤 12시였던가, 새벽 한시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아직도 니 얼굴이 이렇게 생생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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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의 비평지면 ‘프런트 라인’의 필자 4명(김소희, 송형국, 김병규, 송경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밀수> <더 문> <비공식작전> <콘크리트 유토피아>까지, 올여름 개봉한 4편의 한국영화 대작들을 중심으로 최근 한국 상업영화가 보여준 일련의 경향과 성패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조곤조곤 진행된 대담은 4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몰래 온 손님처럼 참석한 나는 이야기가 더 지속되기를 바랐지만 평론가들은 창문 없는 회의실을 이제 그만 탈출하고 싶은 눈치였고 이야기를 정리해야 하는 이우빈 기자도 이미 기사로 쓸 분량은 충분하다는 말로 평론가들의 귀가를 배웅했다.
‘한국 여름영화 빅4를 말하다’ 대담 시작에 앞서 김병규 평론가는 ‘개봉 시기가 비슷할 뿐인 4편의 영화를 왜 빅4라는 이름으로 묶어 이야기해야 하는지, 무기력한 관습과 인위적인 마케팅 용어는 아닌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했다. 옳은 말씀. 1년 중 가장 많은 관객이
[이주현 편집장] 2023년 여름의 한국영화가 남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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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같은 기억(photographic memory). 흔히 기억력이 좋은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무언가를 직접 보는 것 같은 기억력이라고 해서 ‘직관기억’(eidetic memory)이라는 좀더 전문적인 용어도 있다. 직관기억은 성인에게서는 보고되지 않는 특징이며, 아동기의 특정 사례에서도 무언가를 본 직후 아주 짧은 기간만 지속되는 것으로 관찰된다. 그에 반해 사진 같은 기억은 원한다면 언제든 다시 불러올 수 있다는 면에서 직관기억과는 구별된다. 스스로 ‘사진 같은 기억력’을 지녔다고 은근히 우쭐해하는 성인들을 만나는 것 역시 드물지 않다.
그런데 사진 같은 기억이든 직관기억이든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는 없다.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세부사항을 기억해내는 능력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만 그런 기억력조차도 사진이나 직접관람에 해당할 정도의 정확성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는 게 현재까지의 과학적 결론이다. 음정을 정확히 짚어내는 ‘절대음감’과 음질 차이를 칼같이 짚어내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제멋대로의 기억을 감히 역사라 말하는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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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코로나19 시기에 서점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와서 뭐라도 사가라고 하는 것조차 눈치 보이는 날들이 이어졌다. 뉴욕의 스트랜드(strand) 북스토어는 정말 망할 거 같다고 뭐라도 사달라는 메일을 보냈고 베를린의 두 유 리드 미?(do you read me?)는 수레에 잡지들을 싣고 근처 테이크아웃 전문 에스프레소 카페에서 잡지를 팔았다. 지금은 그때에 비해서는 조금 나아진 것 같지만…. 사람들은 예술을 좋아하고 문학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서점을 하다 보면 좋아한다는 마음에 무감해진다. 동시에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부담스러워진다. 왜냐하면 대부분 좋아한다고 떠들어대는 말은 진실인 동시에 거짓이고 거짓인 동시에 진심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마저 자신의 마음을 진심이라 믿는다. 그래 진심이지. 진실이지. 하지만 세상에 좋아할 것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는 것일 뿐. 좋아함의 순서에서 밀리게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예술과 문학 섹션 - 뉴 노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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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맣게 잊고 있던 부끄러운 경험 하나가 떠오른다. 대학 1학년, 몸담고 있던 교내 방송국에서 영상팀 친구들이 단편영화를 만들었고, 거의 모든 동기들이 크고 작은 배역에 동원된 가운데 나 역시 카메라 앞에서 연기라는 걸 처음 해봤다. ‘계단을 올라간다. 문 앞에 다다른다. 뒤돌아본다.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카메라가 내 얼굴을 줌인한다.’ 장르는 호러 아니면 스릴러였지만 누가 봐도 실소를 터뜨릴 연기였다. 이후 친구들이 다시는 나를 배우로 기용하지 않은 걸 보면 연기에는 영 소질이 없었던 모양이다.
내게 연기는 이해할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미지의 영역 중 하나다. 배우들의 존재가 늘 신기하고 신비로운 것도 그래서일까. 숭실대학교 영화예술전공 최익환 교수에게서 여름방학 기간 숭실대와 서울예대 학생들의 ‘대학 연기 배틀’이 열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순수한 호기심으로 현장에 초대해달라 청했다. 8월11일, 두근두근 두근대는 가슴 안고 숭실대로 향했다. 오후에 진행된
[이주현 편집장] 연기가 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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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이번에는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국내 최초 로봇 지휘자를 소개하는 TV 뉴스를 봤다. 지휘봉을 휘두르는 로봇을 바라보며 연주하는 수십명의 국립국악관현악단 단원들의 모습이 화면에 잡힌다. 며칠 후 국립극장에서 연주할 곡을 연습 중이었다. 요즘 각광받는 생성형 인공지능이라도 탑재한 로봇인가 했는데 그렇지는 않고 실제 지휘자의 동작을 따라 움직이도록 사전에 입력된 로봇이었다. 뻣뻣하게 고정되어 있는 하체와 대조적으로 로봇 상체의 팔은 아주 부드럽게 움직였다. 얼굴 표정은 굳어 있었지만 박자에 따라 살짝 까딱거리는 고개 덕분인지 전체적으로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로봇의 이름은 에버6(EveR-6). 에버(Ever)는 태초의 여성을 뜻하는 이브(Eve)에 로봇(Robot)의 R을 붙여 만든 이름이다. 2006년에 탄생한 에버1은 한국 연구진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만든 안드로이드 로봇이다. 인간 여성과 비슷한 외모와 행동은 물론 감정 표현까지 할 수 있게 얼굴에만 15개의 모터
[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우리 에버가 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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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안일하게도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떠났다. 한바탕 싸우고 아 정말 지긋지긋한 모녀. 언제쯤 벗어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아래쪽에서 뭔가 보였다. ‘그것’이었다. ‘그것’이라 하면 내가 다음 쓰고 싶은 이야기와 아주 밀접한 생물이다. 발걸음을 몇 발자국 옮기자 수십 마리의 ‘그것’이 있었다. 이 일이 나에게는 첫 번째 영화의 여파에서 벗어나려면 빨리 두 번째 영화에 돌입하라는 선명한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그것들을 열심히 휴대폰 카메라로 찍었다.
6월 오사카 개봉 일정을 보내고 있을 때 사실 약간은 지쳐 있었다. 5월과 6월에 첫 번째 영화의 일본 개봉 행사를 치르며 반갑고 즐거운 만남과 대화를 가졌지만 한편으로는 솔직히 스스로가 같은 말을 반복하는 앵무새같이 느껴졌다. 이제는 정말 다음 시나리오를 써야 할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며 육교를 건너는데 또다시 ‘그것’이 보이는 거다! 원래 이렇게 자주 보이는 걸까? 옆에 있던 일본 배급사 사장님도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
[김세인의 데구루루] 낫 오키, 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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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의 대작 시리즈 <무빙>이 8월9일 공개됐다. 시리즈를 미리 본 기자들은 하나같이 재미를 보장했다. 뒤늦게 강풀 작가의 원작 웹툰을 찾아봤다. 역시, 괜히 누적 조회수가 2억뷰에 이르는 메가 히트작이 아니었다. 초반부, 아기 봉석에게 공중부양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부모 미현과 두식(영화에선 한효주와 조인성이 연기하는 인물들)이 방에 그물을 쳐놓고 아기를 재우는 컷에서부터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수면 중 아기가 천장에 부딪힐까 싶어 젊은 부모는 방 안에 그물을 쳤고, 그물에 걸린 아기는 곤히 잠든 엄마와 아빠를 공중에서 행복하게 내려다본다. 초능력 아기의 시선 아래, 비범한 사랑을 품은 보통의 존재들이 잠들어 있다. 아기의 공중 시점으로 색다른 앵글을 만들어낸 것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의 너르고 따스한 시선 덕에 마음이 덩달아 두둥실 떠오르는 듯했다. 특별한 신체능력을 지닌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히어로물이니 분명 폭력을 동반한 갈등의 서사가 이어지겠지만
[이주현 편집장] 스크롤 내리거나, 스크린 향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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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이었으니 무척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졌다. 어머니는 어린이용 인명사전 ‘이승만’ 편에 적힌 ‘부정부패’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심각하게 설명하셨다. 마침 드라마 <제2공화국>이 MBC에서 한창 방영 중이었다. ‘최불암이 이승만 역인데 설마 악역일까’ 싶었다. 그러다 4·19가 일어나 이승만 동상이 철거되는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2년 뒤 러시아에서 레닌 동상이 철거되었을 때 나는 한국사를 자랑스러워했다.
지난 7월27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이승만의 동상이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동상과 함께 세워졌다. 파고다공원의 이승만 동상이 철거된 지 63년3개월 만의 일이다. 대통령 윤석열도 화환을 보냈다. 이들이 이러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두환과 노태우, 이명박과 박근혜는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 김영삼은 임기 말 경제 환란을 맞았기에 마냥 떠받들기
[김수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국부론(國父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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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카페베네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대학생이던 무렵, 카페베네는 발길이 닿는 모든 곳에 존재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이곳을 ‘바퀴베네’라고 불렀고, ‘베네’가 이탈리아어로 ‘좋아’라는 의미인 것을 상기하며 괴로운 웃음을 지었다. 친하게 지냈던 선배 중 한명은 그곳을 그냥 ‘바퀴’라고 불렀는데, 늘 내가 좋아하던 딸기빙수를 사주는 멋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바퀴로 와”라고 하면 나는 속으로 ‘베네’ 하며 고민도 없이 달려나갔다.
유적지에 오니 역시 이곳에 얽힌 추억들을 팔게 되는구나…. 하지만 추억할 것은 이름뿐, 이 공간은 내 기억 속 베네와 한 군데도 닮지 않았다. 커다란 벽시계도, 붙박이 화단에 심긴 가짜 식물도, 온갖 목재 무늬가 섞인 각진 가구도, 천장에 투박하게 설치된 레일 조명도 없다. 지독하게 오랫동안 유행한 인테리어였는데 지금은 아무리 외진 곳에 가더라도 이 양식을 보기가 힘들다. 나는 벽에 그려진 카페베네의 새 로고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그대 나에게만 잘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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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펄펄 끓고 있다. 유럽에선 40도가 넘는 폭염에 대규모 산불이 발생하고 있고, 미국 플로리다 남부 바다의 수온은 38도까지 상승했다고 한다. 멀리 눈 돌릴 일도 아니다. 최근 강원도 강릉에선 열대야를 넘어 밤 최저기온이 30도 이상인 초열대야가 발생했다. 정말이지 24시간이 덥다. 어쩌면 지금의 극단적 기후 현상은 지구의 비명일지 모른다. 그 비명을 인간이 모른 척한다면 아포칼립스 영화가 현실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한편 폭염 속에서 4만보를 넘게 걸으며 카트 정리를 했던 대형 마트의 청년 노동자가 사망했다. 야외에서 고강도 노동을 하는 건설 노동자와 플랫폼 배달 노동자들의 폭염 속 휴식권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휴식권. 일을 멈추고 쉴 권리. 건강에 무리를 줄 수 있는 환경일 때 잠시 일을 멈추고 쉬겠다는 게 무리한 요구일까. 상식적으로는 무리가 아니지만 ‘노동자들의 감독’ 켄 로치의 <미안해요, 리키>를 보면 플랫폼 배달 노동자
[이주현 편집장] 디스토피아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