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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서의 한글 창제를 기념하는 한글날이 언어로서의 한국어를 기리는 날처럼 혼동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글이라는 문자 체계의 우수성을 따지는 건 괜찮다. 그걸 지나 한국어의 우월함을 이야기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물론 한국어로 표현된 고유의 정서와 사상이 아름다울 수는 있고, 그것은 오로지 한국어로서 접근될 때에만 그 온전한 맛을 누릴 수 있다고 역설하는 건 옳다. 한국어에 잘 밀착된 한글은 그것의 문자적 표현과 접근을 더 용이하고 효과적이게 해줌을 환기시키는 일 역시 필요하다. 따라서 한글은 바로 우리말글 환경이 처한 현실의 제유(提喩)이며, 한글날을 계기로 그 현실에 대한 성찰을 북돋으려는 취지라 이해해줄 법도 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렇게 의식적으로 대유법적인 고찰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면에서 보면 한국 어문의 현실은 나날이 비루해지고 있다. 구매자는 물론 판매자조차 잘 모르는 외국어 문자로 메뉴판이나 간판 등속을 쓰기 시작한 지는 한참 됐다.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언론이라는 어불성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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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멘토링을 들으시면 열에 아홉은 창업을 포기하시게 될 겁니다.”
어쩌다 보니 요즘 팔자에도 없는 멘토링 수업을 하고 있다. 창업을 준비하고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 잡지를 만드는 일도, 사진을 찍는 것도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이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자신의 세상을 조립하는 일은 생각하는 것만큼 유쾌하지 않다.
잡지 전문공간을 같이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일론에게 처음 받았을 때의 당혹감이란. 잡지 전문공간? 수많은 서점이 책 한권 팔지 못하고 망해가는 처지에 잡지를? 잡지만 다룬다고? 그것도 공간으로? (나는 그가 일론 머스크가 아닐지 의심했다. 선구자 또는 사기꾼. 혹은 둘 다.)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잡지’와 ‘서점’이라는 이 말도 안되는 조합(둘 다 망해간다는 점에서)을 떠올리자마자 헛웃음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밥 먹는데 체할 거 같으니,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일론에게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예술과 문학섹션: 세상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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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아부 아사드 감독의 <노래로 쏘아올린 기적>은 특별한 목소리를 타고난 한 소년의 아이돌 오디션 참가기다. 중요한 설명이 빠졌다. 영화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으로 불리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사는 한 소년이 이집트에서 열리는 오디션 예선에 참가하기 위해 분리 장벽을 넘어 가자지구 밖으로 향하는 여정부터 찬찬히 살핀다. 2013년, 팔레스타인 난민 최초로 ‘아랍 아이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무함마드 아사프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하니 아부 아사드는 전작 <오마르>에서도 거대한 장벽(서안지구 분리 장벽)을 넘나드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일상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단지 총알이 빗발치는 장벽만 위험한 게 아니다. 주인공 청년 오마르는 친구를 밀고하도록 협박받고 이중첩자가 되길 강요당한다.
연일 뉴스를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전쟁 소식을 접하게 된다. 10월7일, 팔레스타인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이후 이
[이주현 편집장] 전쟁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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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닮은 기계를 열망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는 시대, <프랑켄슈타인> 읽기 딱 좋은 때다. 마침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빅터의 창조물이 처음 등장하는 부분을 학생들과 소리내어 읽었다. 괴물의 외형을 묘사하는 구절을 읽던 중 유독 ‘쭈글쭈글한 얼굴 살갗’이라는 표현이 귀에 들어왔다. 문득 수년 전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분만실에서 처음 만난 아기는 참 쭈글쭈글했었지.
책을 읽기 전 저자인 메리 셸리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을 훑어봤다. 영화 속 메리의 삶은 단 한순간도 순탄치 않았다. 어머니는 그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시고 이후 그가 어린 나이에 낳은 아이는 병으로 곧 죽어버렸다. 그가 몸소 경험한 탄생과 죽음의 연쇄가 소설 속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며 생명 창조의 꿈을 꾸고 그러한 꿈의 결과로 탄생한 창조물이 여러 사람을 죽이는 괴물이 되어버리는 이야기에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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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출장은 유독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커피를 들이부어도 금세 의식이 넘어가 꾸벅꾸벅대다가 그대로 꼬꾸라질 것만 같았다. 걷고 있는 내 발에 닿는 것이 땅인지 매트리스인지 모를 감각으로 무대 인사를 하러 시네테카에 갔다. 행사까지 시간이 떠서 다른 팀원들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고 나는 혼자 극장 앞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았다. 강렬한 햇볕에 눈을 감아도 여전히 눈이 부셨다. 선선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자꾸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렇게 졸다 보니 시간이 다 되었다. 조용한 관객들은 이 선선한 바람처럼 극장에 흘러들어갔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기에 분명 아주 적은 관객이 들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적은 관객이지만 깊은 인사를 나누자 마음을 다잡았다. 프로그래머와도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상영관에 들어섰는데 이런. 단 한명의 관객도 있지 않았다. 텅 비어 있는 극장에 당황스러운 기시감이 들었다. 아주 오래도록 꾸었던 악몽의 실물을 이렇게 마주하다니. 에이, 아닐 거야. 애
[김세인의 데구루루] 너그럽게 열린 극장 문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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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이 분주해서 극장으로 도망친다. 이곳에선 오직 영화만이 나를 기다린다. 잠시나마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영화를 본다. 운 좋게 좋은 영화를 만난다면 잡생각도 사라질 것이다. 영화로 도피하기에 영화제만큼 완벽한 곳도 없다. 문제는 숨을 곳이 너무 많다는 것뿐. 10월4일부터 13일까지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렸다. 영화제에서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저마다 다를 텐데, 나의 올해 전략은 국내 개봉이 확정된 해외영화제 수상작 혹은 화제작을 발 빠르게 챙겨 보는 것이 아니라 국내 개봉이 요원해 보이는 탓에 영화제가 아니면 만나기 힘든 영화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중하게 만난 두 영화는 프레데릭 와이즈먼 감독의 4시간짜리 다큐멘터리 <메뉴의 즐거움-트와그로 가족>과 루이 빌게 제일란 감독의 3시간짜리 영화 <마른 풀에 관하여>다.
<메뉴의 즐거움-트와그로 가족>은, 뉴욕 공립도서관의 시공간을 기록한 <뉴욕 라이브러
[이주현 편집장] 시네필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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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21일 대한민국 국회는 최초로 ‘국무총리 해임건의안’과 ‘국회 단독 과반 정당의 현직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가결했다. 총리 해임건의는 현 정부 국정운영의 총체적 실패를 사법적 또는 헌법적 차원에 이르기 전의 한도에서 최대치로 선고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불수용하면 그의 막돼먹음과 옹졸함만 부각되고, 이 역시도 총체적 국정 실패의 근거가 된다. 체포동의의 결과는 ‘구속’이 아니라 ‘구속영장 실질심사’다. 제1야당 대표의 주변에서 거대 부패사건들이 벌어졌던 것은 사실이니 그의 책임을 놓고 중간 판단이 필요했다. 거대양당의 당론이나 다수 의견은 하나만 찬성하고 다른 하나는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다들 가결돼 이 사안들에서 나같은 시민들은 그들보다 더 크게 이겼다. 둘 다 찬성한 시민들이 거대양당을 역이용해 전승을 거뒀다. 이런 날이 언제 있었더라.
2010년 기초의원으로서 구미시 박정희 기념사업을 반대했을 때, 사퇴를 요구하는 친박단체, 면전에서 비난하는 지역 유지, ‘생매
[김수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주유소 습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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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3일부터 시작된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10월 8일 폐막을 앞두고 있다. 길었던 추석 연휴도 아시안게임 덕분에 짧게만 느껴졌다. 올해 아시안게임이 재밌었던 건 황선우, 안세영, 신유빈 등 여러 종목에서 황금세대의 활약을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대회 초반 치러진 수영 종목. 한국은 수영에서 메달 22개를 따며 아시안게임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금·은·동메달 각각 2개씩 총 6개의 메달을 목에 건 황선우를 비롯해 남자 수영 장거리의 샛별로 떠오른 3관왕의 김우민, 여자 수영 대표팀의 든든한 주장 김서영과 십대의 이은지 등 고른 종목에서 다양한 선수들이 최고의 기록을 써내려갔다. 그야말로 한국 수영의 르네상스다.
여자 탁구 복식에선 신유빈과 전지희 선수가 환상의 호흡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두 선수는 우승 직후 귀여운 큐피드의 화살 세리머니를 선보여 국민들을 절로 미소짓게 만들었다. 이밖에도 남자 높이뛰기 국가대표인 ‘스마일 점퍼’ 우상혁은 최선을 다해
[이주현 편집장] 뉴 제너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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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놓고 나면 시시해지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잡지를 만들고 싶다’, ‘영화를 찍고 싶다’, ‘서점을 하고 싶다’ 같은 말들. 이것들은 사고 속에 있을 때 완벽하다. 분명 머릿속에서는 손쉽게 시대를 가로지르는 고전을 쓰고, 쓰타야에 버금가는 서점을 만들고, <뉴요커> 뺨치는 잡지를 찍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만들고 난 순간 모든 것은 보잘것없어진다. 그 오염과 타락은 발화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꿈같은 것들을 이야기할 때마다 사람들은 장르는 뭐야? 어떤 컨셉의 서점이야? 무슨 주제를 다루는 잡지야? 하고 물어올 것이다. 그때부터 자신이 상상한 세계가 얼마나 별 볼 일 없는지 깨닫게 된다. 고민하던 꿈과 논리는 옹색해지고 허술해진다. 간직하고 있는 꿈과 계획에 대해 대답하면 할수록 완벽해 보이던 미래는 실체화되고 단순화된다. 사람들은 흥미를 잃는다. 결국 네가 하겠다는 건 다른 데서 다 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걸로 돈은 벌 수 있겠어? 왜 그런 쓸데없는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예술과 문학 섹션: 예술의 넝마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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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04년, 지중해 로도스섬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것을 기념하는 동상을 세웠다. 태양의 신이자 섬의 수호신인 헬리오스 상이었다. 로도스섬은 원래도 동상으로 유명해서 이미 수천 개의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동상은 그 어떤 것보다 컸다. 당시 아테네의 아테네 상이 12m였다. 로도스섬의 거상은 높이 32m로 완성되었다. 공사는 철근 뼈대에 작은 청동판을 조각조각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당연히 발부터 시작해야 했다.
항구에 커다란 발이 나타난다. 엄지발가락이 사람 하나만 하다. 발등이 매끈하고 뒤꿈치가 단정한, 잘생긴 발이다. 구릿빛 피부는 태양 아래서 화려하게 빛난다. 이 발은 천천히 자란다. 정강이와 종아리, 무릎이 생겨나서 마침내 횃불을 치켜든 거대한 사람의 모습이 된다. 뼈가 강하고 근육이 아름다운 태양의 신이다.
나는 이 이야기가 좋다. 거상이 완성되는 과정을 상상하는 게 좋다. 대단한 광경이었겠지. 바닥부터 서서히 자라는 신이라니. 헬리오스는
[김소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사라진다 그리고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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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선배 감독님과 동료 감독님을 만나 카페에서 대화를 나눴다. 아이스크림 와플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연애 이야기에서 영화 이야기 그리고 괴상한 경험담까지 달고 쓴맛이 절묘하게 섞인 시간이었다. 그 자리에서 요즘 고민이 하나 있어 꺼내놓았다. 답이 없거나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고민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요즘 A이야기를 구상하며 살을 붙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B시나리오를 먼저 써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어떤 감독, 작가들은 대여섯개의 이야기를 동시에 쓰기도 한다는데 나는 영 그런 타입이 되지 못한다. 멀티는커녕 한 가지 일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버벅거리기 일쑤다. 그래서 B를 쓰다가 A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달아나버리는 건 불 보듯 뻔하고 이런 고민을 하는 시점부터 이미 A이야기는 나에게서 슬쩍 뒷걸음질을 시작한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는 없다. 애초에 B작업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B작업을 우선적으로 마쳐야 한다는 건 이미 정해져 있는 답이고 A작업이 흐릿해지는
[김세인의 데구루루]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