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글이 안 써진다. 소질이 없는 걸까, 적성에 안 맞는 걸까. 가슴으로 써야지 하다가도 마감이 다가오면 어느새 가슴이 아니라 손가락이 자동기술하고 있다. 다른 작가들은 어떨까. 마감과의 씨름은 글 쓰는 자들의 숙명이지 싶어 올해 산문집을 출간한 세명의 작가들- <또 못 버린 물건들>의 은희경, <이적의 단어들>의 이적,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의 박상영- 에게도 질문을 던져보았다. “글이 안 써질 때 나를 책상 앞에 앉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요?” 1995년에 첫 장편소설 <새의 선물>을 발표하고 지난해 100쇄를 찍은 베테랑 소설가 은희경은 “안되는데 붙잡고 있지는 않는다”면서 환경을 바꾸고 몸을 움직이는 게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박상영 작가의 대답도 끄덕끄덕 공감하기 충분했다. 나를 충격에 빠뜨린 대답의 주인공은 이적이다. 과거 <씨네21>에 ‘이적표현물’을 연재하기도 했던 뮤지션 이적은 글이 안 써질 때가 “없다”
[이주현 편집장] 나만 좋자고 이러는 거야?
-
대학원과 늦은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 생전 처음으로 ‘내 차’를 갖게 되었던 날이 잊히지 않는다. 당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무척 많이 부르고 다녔는데, 내 서른 즈음은 학생운동과의 이별, 학문 세계로의 본격적 진입, 그리고 자동차였던 셈이다.
전국 구석구석으로 차를 몰고 다니면서 내 서른 즈음은 상당한 ‘시선 전환’을 겪었다. 주유소에 걸린 휘발유 가격표가 그 어떤 물가지표보다 중요해졌다. 차가 오는 걸 도무지 신경 쓰지 않는 골목길의 행인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고, 주차할 곳과 못할 곳(정확히 말하자면 주차 위반 딱지를 떼일 곳과 떼이지 않을 곳)을 가리는 눈이 발달했으며, 차기 시장이나 대통령은 교통 정체를 해결할 사람을 뽑겠다고 농반진반으로 말하고 다녔다. 그냥저냥 괜찮게 보았던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이 새삼 희대의 명작으로 재평가됐다.
이런 전환은 내게 여러 가지 숙고의 주제를 남겼다. 평범한 이들의 삶을 살피는 작가, 기자, 정치인들은 지하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그들의 질주를 바라보는 한 운전자의 눈
-
대구역 건너편 골목에 있는 교동시장은 1960년대생인 우리 엄마가 젊은 시절 친구들과 함께 놀던, 지역 최고의 번화가였다. 그러나 90년대, 도시의 중심이 한일극장이 있는 동성로 2가로 완전히 옮겨가자 교동시장 부근은 영업을 중단한 단관 극장과 오래된 금은방, 철거하지 못한 백화점만 남았고, 이내 그곳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노인들만 거니는 동네의 외진 그림자가 되었다.
도시의 모습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모두 안다. 위와 같은 히스토리를 가진 골목들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70년대와 80년대의 흔적이 적당한 낭만으로 남아 있으면서, 90년대와 2000년대에 받은 외면으로 자릿세가 낮은 모든 골목들. 교동시장 골목 역시 2010년대를 거치며 ‘O리단길’ 혹은 ‘제2의 성수동’ 같은 장소가 되고 말았다. 단관 극장, 금은방, 백화점이 있던 오래된 골목에 어느새 에스프레소에 레몬을 넣어주는 카페, 레코드판과 향초를 함께 파는 잡화점,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주는 바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이제 남은 건 절망뿐이야
-
뒤늦게 극사실주의 데이트 프로그램 <나는 SOLO>를 보기 시작했다. 화제의 16기 출연자들 방송분을 정주행하는데 듣던 대로 솔로나라에서 헤어 나오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8월28일 통계청이 발표한 ‘사회조사로 살펴본 청년의 의식변화’에 따르면 19∼34살 청년 중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36.4%, 즉 3명 중 1명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비혼 1인가구 역시 증가하고 있는 시대에 ‘결혼을 간절히 원하는 솔로들이 모여 사랑을 찾는 프로그램’이 매주 뜨겁게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연애 예능의 탈을 쓰고 있지만 문화인류학에 가까운 관찰 프로그램 <나는 SOLO>에서 최근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단어는 ‘경각심’이다. 경각심의 사전적 정의는 ‘정신을 차리고 주의 깊게 살피어 경계하는 마음’인데, 이 단어를 사용할 때 주의할 점은 스스로도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경각심이 불러온 나비효과 혹은 가짜뉴스가 불러온 파국의 교훈은 (
[이주현 편집장] 경각심을 가지고
-
-
핑크를 기대했지만 온통 그레이다. 회색 콘크리트 아파트부터 핵폭탄이 만든 잿빛 하늘까지. 미국을 비롯해서 전세계적으로 흥행 중인<바비>가 유독 한국에서는 상영관을 찾기 힘들 정도로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천쪽이 넘는 과학자 평전을 사 읽고 과학 공부까지 하며 보러 가는 <오펜하이머>와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냥 켄, 아니 백인 남성 과학자의 이야기에 한국인들은 왜 이토록 진심인 것일까? 아, 물론 나도 과학에 진심이다.
<바비>의 많은 것들이 좋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영화 후반부에서 바비는 바비랜드와 현실 세계 중 후자를 택한다. 바비가 청바지와 면티에 베이지색 재킷을 걸치고 슬리퍼를 신은 채 현실 세계에 발을 내딛으며 처음 방문한 곳은 다름 아닌 산부인과 의원.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러 왔어요”라는 대사를 듣기 전까지 나는 바비가 직장 면접을 보거나 출근하러 가는 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바비가 인간 여성
[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신비롭지 않은 바비들
-
1.
잡지는 요물이라 한번 만들면 자꾸 만들고 싶어진다니까. 시작은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다름씨는 함께 잡지를 만들자며 꼬드겼다. 시도, 소설도, 인터뷰 섭외까지 알아서 해야 했고 심지어 돈도 꽤 드는 일이었다. 이것은 초대를 빙자한 영업에 가까워보였고 지역과 여행사를 그만둔 이후에 잡지는 두번 다시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여전히 나는 예술과 문학 따위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 다름씨는 편집장을 시켜줄 테니 잡지 발행에 필요한 돈을 내달라고 했다. 수중에 돈이 없지는 않았지만 뉴욕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모아두던 것이라 고민이 되었다. 이 돈은 조금 다른 미래를 그리며 모으던 돈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내색하지 않았지만 계좌에 켜켜이 쌓아두는 자본의 축적은 더이상 미래를 발산시키는 게 아니라 정해진 미래로 수렴시키고 있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이 돈을 쓴다는 것은 더이상 나에게 정해진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으므로. 결국 뉴욕으로 돌아가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예술과 문학 섹션: 소설가의 문학 수업
-
지난여름 이 지면에 영화 기자의 비애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씨네21> 기자라면 넘어야 할 산 몇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담력 약한 사람도 공포영화를 보고 기사를 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영화잡지 편집장의 비애도 있다. 영화와 드라마의 스포일러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기 일쑤라는 것이다. 최근엔 <마스크걸>에서 누가누가 죽음의 퇴장을 맞이하는지 스포당했다. 자고로 영화잡지 편집장이라면 스포일러에 의연해야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보지 못했으나 이미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영화들이 자주 생겨난다. 이번주 긴 페이지를 할애해 소개하는 <어파이어>의 시사회 기회를 놓쳤다. 그럼에도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인터뷰, 페촐트의 배우들, 지난 작품들, 독일 영화사에서의 위치 등을 총정리하고 났더니 <어파이어>를 보지 않았는데도 <어파이어> 속 붉게 물든 하늘을 이미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씨네21>은 크리스티안
[이주현 편집장] 크리스티안 페촐트와 지하철의 영화
-
새만금 잼버리 실패를 빌미로 불거진 ‘전북 지역 혐오’를 보며,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잠겼다. 나는 경북 구미에서 사반세기쯤 살았다. 대구경북이 겪는 곤경을 호남이 당해온 차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툭하면 지역 혐오에 노출되는 처지는 점점 비슷해진다. 고작 ‘선거 결과’가 혐오의 근거가 되고, 지역 내의 다양성과 활력이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혐오는 어느 일방의 힘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지역 안에는 이견을 무시하고 지역 전체를 참칭하는 다수파가 있고, 지역 밖에선 지역을 통째로 싸잡아 매도하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다.
나는 2010년부터 2014년 사이에 종종 ‘박정희 기념 공공 사업을 반대하는 구미시의회의원’으로 언론에 소개되었다. “구미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군요”라는 식의 댓글은 거의 달리지 않았다. 광신자들의 도시로 몰아가는 혐오만 난무했다(서울에도 떡하니 박정희기념관이 있으면서). 2016년 5월에 실시된 구미시민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할가량이 당시까지 진행
[김수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도(道)리엔탈리즘
-
약속 시간에 세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서 먼저 맥주를 시켰다. 친구, 친구 애인과 인터뷰차 만나는 자리였다. 지금 쓰고 있는 글에서 새롭게 들어온 공간과 직업은 평소에 도통 관심이 없던 쪽이라 해당 분야 종사자와의 인터뷰가 필요했다. 이번 자리에서 내가 듣고 싶은 부분은 실무적인 것도 물론이지만 특히 해당 업계에서의 터무니없고 황당하고 유치한 사건들에 관한 것이라 카페가 아닌 호프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 그렇게 장소를 잡았다. 물론 내가 시원한 맥주를 너무나도 마시고 싶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퇴근 시간대가 되자 가게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변을 더 찾아보고 조용한 곳으로 갈걸’ 후회하며 다이어리를 펼쳤다. 맥주를 마시며 미리 작성해놨던 질문 리스트를 다시 살펴보는데 계속 딴생각이 들었다. 계속 남원랜드 아저씨 생각이 났다.
2016년 여름, 2주 정도 할머니 간호를 위해 지리산 구례에서 지냈다. 무료하게 병원과 집을 오가다 하루는 점심
[김세인의 데구루루] 어쩐지 슬프고 화가 나면 생각나는 남원랜드 아저씨
-
<헤어질 결심>을 10번 봤다거나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20번쯤 봤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렇게까지 보고 또 보는 마음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나의 최다 N차 관람 영화는 영어 섀도잉을 해보겠다며 선택한 <라라랜드> 되겠다. 스스로의 노래 실력에 크게 실망해, 영화에 등장하는 두 번째 노래 <Someone in the Crowd>까지만 열심히 따라하다 반복 관람하길 중단했다. 어쨌거나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116회나 본 관객이 있다는 소식에 꽤 놀랐다. 8월30일 열린 ‘2023 CGV 영화산업 미디어 포럼’에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116회 예매한 관객의 사례가 소개됐다. 이날 포럼에선 ‘소확잼(소소하지만 확실한 재미), 역주행, 서브컬처의 부상, 비일상성’이 코로나19 이후 관객의 영화 소비 트렌드가 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디깅 모멘텀(Digging Momentum). 자신이
[이주현 편집장] 과몰입의 시대
-
나는 53번 버스를 좋아했다. 그 버스를 타려면 집에서 좀 떨어진 정류장까지 걸어가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시간도 많고 체력도 충분했다. 일단 타기만 하면 종로까지 한번에 갈 수 있으니 감수할 만했다. 서점과 음반 가게, 영화관 등 중학생에게 필요한 거의 모든 게 있는 종로. 버스가 서울역을 지나 남대문을 끼고 돌 때면 앞 유리창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서울시청에서 광화문까지 쭉 뻗은 길을 보면 마음이 트였다. 일요일의 도심을, 눅눅한 집과 서늘한 학교를 잊고 쏘다녔다. 영화관 입장권은커녕 메모지 묶음 하나 살 돈도 없을 때가 실은 더 많았지만, 새것을 실컷 보는 나들이는 언제나 재미있었다. 집에 돌아갈 때면 시간도 부족하고 체력도 떨어졌다. 남대문시장쯤으로 걸어와 57번이나 58번 버스를 탔다. 집에서 가까운 정류장에 내리기 위해서였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탈 수 있는, 타야 하는 버스도 늘어갔다. 나는 ‘빠르고 정확한’ 지하철보다 ‘확실하지 않은’ 버스를 더 좋아하는 어른이 되었
[김소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버스를 타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