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에 세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서 먼저 맥주를 시켰다. 친구, 친구 애인과 인터뷰차 만나는 자리였다. 지금 쓰고 있는 글에서 새롭게 들어온 공간과 직업은 평소에 도통 관심이 없던 쪽이라 해당 분야 종사자와의 인터뷰가 필요했다. 이번 자리에서 내가 듣고 싶은 부분은 실무적인 것도 물론이지만 특히 해당 업계에서의 터무니없고 황당하고 유치한 사건들에 관한 것이라 카페가 아닌 호프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 그렇게 장소를 잡았다. 물론 내가 시원한 맥주를 너무나도 마시고 싶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퇴근 시간대가 되자 가게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변을 더 찾아보고 조용한 곳으로 갈걸’ 후회하며 다이어리를 펼쳤다. 맥주를 마시며 미리 작성해놨던 질문 리스트를 다시 살펴보는데 계속 딴생각이 들었다. 계속 남원랜드 아저씨 생각이 났다.
2016년 여름, 2주 정도 할머니 간호를 위해 지리산 구례에서 지냈다. 무료하게 병원과 집을 오가다 하루는 점심때쯤 혼자 남원랜드에 갔다. 입의 ‘쾌걸춘향 촬영지’라는 간판이 반가웠다. 남원랜드의 기구와 시설, 모형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되고 조악해서 마음에 들었다. 직원 없이 텅 비어 있는 매표소 앞에서 과연 정상 운영하는 곳이 맞는지 의심하고 있던 중 멀리서 아저씨 한분이 뛰어오셨다. 아저씨께서는 나에게 표를 건네며 말씀하셨다.
“4명 이상이 모일 때만 놀이기구가 운영돼요.”
혼자였던 나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고 다행일까. 구석에 서 있던 한팀의 가족을 발견했다. 그들은 세명이고 나는 한명이고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했다. 우리는 말없이 슬금슬금 바이킹을 향해 모였다. 역시나 아무도 없는 바이킹 부스 앞에서 모두가 난감해하고 있던 찰나 또다시 매표 아저씨가 어디선가 휘-릭 달려와 문을 열어주셨다. 바이킹을 타고 내려와 사슴열차로 향했다. 사슴열차에 다다를 때쯤 어김없이 뒤쪽에서 또 휘-릭 아저씨가 모두를 지나쳐 부스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그렇다. 그곳의 직원은 오직 아저씨 한명뿐이었다. 느긋하게 걸어오셔도 괜찮은데 아저씨는 손님들이 잠시 기다리는 새에 심드렁해질까봐 기구와 기구 사이를 닌자처럼 뛰어다니셨다. 사슴열차에서 우주전투기로, 우주전투기에서 범버카로. 황량한 놀이동산에 아저씨의 달음박질 소리가 울렸다. 덕분에 우리도 함께 기구와 기구 사이를 매끄럽게 옮겨 타며 다이내믹에 빠져들 수 있었다. 눌러쓴 스포츠 모자 아래 까맣게 탄 피부, 이마와 인중에 송골송골 땀을 달고 웃던 아저씨의 얼굴이 그 이후 오래도록 종종 떠올랐다. 아저씨의 얼굴은 특히 내가 어쩐지 슬프고 화가 날 때 종종 떠올랐다.
인터뷰 며칠 전의 일로 슬프고 화가 났다. 가끔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리는 말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화가 나다가도 조용히 슬퍼진다. 그리고 발끝과 손끝 그 언저리쯤에 고여서 탈탈 털어도 잘 털어지지 않는다.
사건과 사건 사이에 인물이 잘 흐를 수 있게 고민했던 시간들은 명확하게 눈에 보이거나 잡히는 게 아니어서 가끔은 스스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착각이 들 때가 있다. 영화를 만드는 것과 이야기를 생각하는 일을 모두 허깨비 취급하는 말을 들으면 아직은 완전히 무시가 되지 않는다. 그럴 때면 아저씨가 생각난다. 그야말로 완전히 죽은 것처럼 보였던 남원랜드가 땀에 젖은 얼굴로 웃던 아저씨의 기민한 움직임을 따라 그만의 생동력으로 피가 돌고 마침내 일어서는 마법을 목도했다. 나를 지나쳐 휘-릭 탁! 아저씨가 난간 철봉을 부여잡을 때 났던 소리, 땀, 세개의 계단을 한꺼번에 지나쳐 올라가던 발, 유머가 묻어났던 모든 몸짓이 리드미컬하게 머릿속에 돌아가면 이야기와 장면 사이 인물과 감정을 잘 운반하려 했던 노력이 허상이 아닌 실존으로 다가온다. 새벽에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문득 섬처럼 떨어져 있던 장면들이 하나로 꿰어질 때 주체할 수 없는 기운으로 실실 웃으며 좁은 부엌을 뱅뱅 몇십 바퀴 도는 것이 남들이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울지언정 그 에너지는 결코 허상이 아니라고. 기구 사이를 오갈 때 느껴졌던 아저씨와 나의 에너지 호흡처럼 언젠가 영화가 관객과 만나 딱 맞아떨어지는 다이내믹의 호흡을 타고 흐르기를.
2022년 여름, 무주산골영화제가 끝나고 다시 남원랜드를 방문했다. 남원랜드는 여전한 황량함으로 나를 맞이했다. 이번에도 매표소는 텅 비어 있었고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래, 이곳도 문을 닫았구나. 포기하고 나가려던 차에 저 멀리서 아저씨가 호미를 들고 뛰어오셨다. 놀이동산의 무성한 잡초를 직접 정리하고 계셨던 듯싶었다. 남원랜드에 손님은 나뿐이어서 혼자도 괜찮냐고 여쭤보았는데 혼자도 괜찮다고 하셨다. 직원도 한명, 손님도 한명. 이번에는 뛰지 않고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저씨는 같이 걷는 사이 종종 멈춰서 잡초를 뜯으셨다. 대관람차에 도착했다. 내 나이만큼 오래된 대관람차의 안전성이 약간은 걱정이 되었다. 앞으로 몇년이나 이걸 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보니 벌써 제일 높은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남원랜드가 한눈에 보였다. 참 작구나 여기. 그 작은 남원랜드 안에서 더 작게 보이는 아저씨가 다시 호미로 풀을 정리하고 계셨다. 위에서 바라보자 남원랜드가 아저씨같이 보였고 아저씨가 남원랜드같이 보였다. 사실 이전에 남원랜드 아저씨를 떠올리며 트리트먼트 2개를 썼다. 아무도 믿지 않는 일에 혼자 고군분투하는 인물을 쓰게 될 때면 이상하게 아저씨 생각이 났다. 친구와 친구 애인이 도착하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셋 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기에 인터뷰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기우가 무색하게도 인터뷰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쉬지 않고 사건들을 쏟아냈다. 인터뷰이가 울분을 토해내며 전해주는 이야기들은 미안하게도 별로 놀랍지 않았다. 나는 왜 이런 이야기들이 익숙하고 진부할까. 생각하다 보니 슬퍼졌다. 그 이상하고 슬프고 화가 나는 마음은 집으로 향하는 전철까지 내내 이어졌다. 흔들리는 전철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번 인터뷰는 망한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