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K팝은 ‘듣는 음악’이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물론 누구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야 당연히 나는 음악가도, 음악 평론가도 아닌데 ‘복길’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가끔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라고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복길씨의 말은… ‘덕질’을 지양하고 음악을 음악으로만 듣자는 거죠?” “네 그렇죠!” “그래서 뮤직비디오도 보지 말고, 음악 방송 무대도 보지 말고, 멜론으로 음원만 들어야 한다는…?” “네 맞아요! 그런데 멜론도 사용하지 않는 게 좋아요! 잘 모르시겠지만 멜론으로 청취하는 건 결국 덕질에 속하는 행위거든요? 이왕이면 집계 출력이 어려운 애플뮤직을 쓰고… 아 포토카드! 그런 것도 절대 사지 말아야 합니다!” 일방적인 대화의 흐름으로 알 수 있듯이 나는 이런 주장을 반복하며 수많은 사람을 잃었다.
그렇다면, ‘K팝이 정말 듣는 음악일까?’ 내가 좋아했던 K팝들을 떠올려보자. 첫 번째, 이정현의 <와>. 무협지를 모티브로 한 의상과 눈알이 그려진 부채, 새끼손가락에 낀 마이크가 없었다면 나는 <와>를 좋아할 수 있었을까? 두 번째, 미나의 <전화받어>. 전주만 들어도 2002년 ‘그날의 함성’이 들리고 태극기로 탱크톱을 만들어 입은 미나의 얼굴이 떠오른다. 세 번째, 비의 <태양을 피하는 방법>. 멜로디가 아무리 좋다 한들 가죽점퍼를 입고 라이방을 쓴 채 몸을 꿀렁이는 비의 퍼포먼스를 빼고 그 음악을 논할 수 있는가. 그래. 인정하자. 나는 그 누구보다 열렬히 K팝을 ‘보는 음악’으로 소비한 사람이다. 그런데 대체 왜, 언제부터 ‘K팝은 듣는 음악’이라는 주장을 하게 된 걸까?
근래 한국의 대중음악 평론가들은 ‘K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냥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성실한 그들은 다시금 피로감을 이겨내고 K팝의 정의와 범주에 관해 이야기한다. K팝을 제도나 산업으로 보는 시각, K팝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시각… 견해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그들은 K팝을 단순히 하나의 음악 장르로만 분류할 수 없다는 공통된 함의를 밝힌다. K팝이란 단순히 듣기만 하는 유행이 아니라 다채로운 수용과 입체적 해석이 가능한 하나의 문화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나의 문제는 바로 그 해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2019년 3월. 나는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의 초청으로 <슬픔의 케이팝 파티>라는 디제잉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총 10명의 DJ를 섭외했고 12시간의 러닝타임이 예정된 큰 행사였다. 공연 기획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주변의 도움을 받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 밤, 주최측에서 전화가 왔다. “혹시 뉴스를 보셨나요?” 정신없이 바빴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뉴스에 나온 상상을 했다. 가슴을 졸이며 인터넷에 접속했더니 뉴스 세션이 온통 ‘버닝썬’, ‘승리’, ‘정준영’, ‘YG’라는 키워드로 도배되어 있었다. 연예인부터 사업가, 조직폭력배, 정치인, 법조인, 경찰 등 연루되지 않은 이들이 없을 정도의 조직적 성범죄 게이트의 서막을 마주했다. SNS는 매일 K팝에 대한 보이콧으로 불타올랐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들에 대한 분노와 절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슬픔의 케이팝 파티>를 처음 기획할 때 우리는 ‘여성 기획자, 여성 DJ, 여성 관객이 만드는 공연’임을 수없이 강조했다. 여성이 만든 K팝 팬덤 문화에서 여성들이 피해자인 범죄 사건의 용의자가 지목되자 우리가 만든 구호는 모두 힘을 잃었다. 나는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공동 기획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린 “어쩌죠?” “엎어야겠죠?” “그럴 필요까지는” “하지만 아무래도…” 같은 내용의 말을 30분 동안 반복해서 주고받았다.
K팝 음악의 윤리적 소비를 함께 고민하자던 우리의 신념은 위기를 맞았다. DJ는 음악과 음악을 조율하는 아티스트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DJ에게 연락해 이미 완성된 셋리스트에 ‘빅뱅’, ‘YG 소속 가수’의 음악을 제외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범죄에 연루된 K팝 아이돌들이 새롭게 밝혀질 때마다 제외해야 할 노래도 계속해서 늘어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발생했다. 한 DJ는 지친 기색을 드러내며 “이게 의미 있는 일일까요? 차라리 그냥 (음악을) 틀고 관객한테 야유를 듣는 게 더 도덕적인 건 아닌가 싶어요”라고 하기도 했다. 나는 공연 당일까지 ‘슬케파’를 강행하는 것에 아무런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이런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한 공연장 관계자가 홀연히 나타나 한마디를 남겼고 바로 그때부터 나의 ‘듣는 음악’ 타령이 시작되었다. “노래는 죄가 없잖아요. 그냥 해요.”
비의 <태양을 피하는 방법>은 각종 이유로 K팝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K팝 제너레이션의 슬픈 숙명에 관한 이야기와 다름없다. 아무리 달려도 태양은 계속 자신의 위에 있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내 안에 있다는… 결국 내 마음과 감정을 위로하는 것은 K팝뿐이라는 가사! ‘태양’을 빅뱅의 ‘태양’으로 치환해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는 가사! K팝 중독 상태를 벗어나고 싶어 절규하듯 노래를 끄려 하면 비는 마치 그 마음까지 예측한 듯 세번이나 반복하며 읊조린다.
제대로 살고 싶어 (애절하게)
제대로 살고 싶어 (한숨을 쉬며)
제대로 살고 싶어… (여운을 남기며…)
‘K팝을 단순히 음악의 한 장르로만 규정할 수 없다’라는 평론이 사실이라면, K팝을 이루는 모든 요소에서 ‘노래’만을 도려내 면죄부를 주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었고, 믿어야 했다. ‘음악’만 사랑할 수 있다는 어설픈 믿음은 ‘K팝’과 ‘덕질’이 곧 정체성인 내 세대의 특질에 대한 폄하로 이어졌고, 그것은 결국 모두 내 지난 시절의 추억을 향하는 화살이 되어 내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
오세연 감독의 자전적 ‘탈덕’ 수기 영화 <성덕>에는 ‘K팝’, ‘덕질’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태어나고 자란 MZ세대 여성 청년들의 고민과 치유의 과정이 담겨 있다. 좋아하던 아이돌의 범죄 사실이 드러난 뒤 그로 인해 자신의 소중한 추억이 훼손당하고, ‘내 사랑이 피해자에겐 2차 가해’라는 죄책감까지 안게 된 감독은 열심히 모은 굿즈들을 태우며 장례를 치르고, ‘거울 치료’를 위해 태극기 부대를 찾아 맹목적인 사랑의 근원을 묻기도 한다. 감독은 그런 노력에도 여전히 ‘탈덕’ 후유증으로 남은 흔적들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했을 많은 이들에게 ‘우리의 시간을 모욕하지 말고, 다친 마음을 성실히 돌보며 다시 사랑하는 힘을 기르자’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나의 사랑과 그 사랑의 좌절을 살피는 태도는 얼마나 성숙한가. 그 사람이 남기고 간 분노를 어루만지는 것까지가 사랑이라니. 언제나 ‘성덕’이 되고 싶었던 나는 영화의 교훈처럼 이제 더는 ‘탈K팝’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K팝의 노래 가사만으로 내 생각과 마음을 전부 말할 수 있는 극성 K팝 팬이며, SM왕국의 백성이자 JYP네이션의 국민이다. (조금 수치스럽다.) 그래서 이제부터 내가 사랑한 K팝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