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디를 분리해도 그 자체로 감상이 완성되는 노랫말들이 있지만 <외톨이>는 가사만으로는 곡이 가진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노래는 가사만 놓고 보자면 연인과의 이별로 상처받은 채 고립되어가는 한 남자의 절규다. 기억 속에 남은 전 연인의 흔적을 모두 지우려고 노력하지만, 매일 밤 꿈에 연인이 나타나 그 고통을 위로해주니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는 슬픈 읊조림. “아무도 모르게 다가온 이별에 대면했을 때, 또다시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워 외면했었네”와 같은 가사는 관계의 끝에서 가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예감이고, “한없이 소리쳐 봐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널” 같은 가사 또한 이별 직후 많은 사람이 느끼는 보편적 감정이다. 그렇기에 좀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외톨이>에서 가사란 그저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이 노래는 반드시 무대를 보아야 완성된다.
현악 오케스트라가 전주부터 예민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가면을 쓴 댄서들 사이에 앞머리로 한쪽 눈을 가린 채 검은 깃털 장식의 의상을 입은 가수가 우뚝 서 있다. 카메라 렌즈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그의 이름은 ‘아웃사이더’. 서글픈 바이올린 선율 위에 그의 자기소개가 울려 퍼진다.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는 마에스트로. 그렇다. 그의 정체는 바로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호흡을 통제하는 지휘자. “혼자가 되는 게 두렵고 잊히는 게 무섭다”라는 내용의 랩을 초당 7음절의 속도로 쏘아 뱉고, 가사에 어울리는 자기 연출로 무대에 빈틈을 내어주지 않는 힙합 금난새. 제목, 랩 네임, 랩 스타일의 3요소가 만들어낸 마스터피스. 무대를 보고 나면 <외톨이>는 더이상 한 사람의 실연에 관한 노래가 아니라 ‘중2병’, ‘히키코모리’ , ‘오타쿠’와 같은 아웃사이더 문화와 사춘기 정서를 아우르는 하나의 역사적 기록으로 받아들여진다….
강남역에 있는 클럽에 처음 간 것은 스물한살 때였다. 일행은 없었다. 너무 추워서 빨리 클럽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계속 망설여졌다. 옆에 있던 약국에서 괜히 치약을 사고, 버스 정류장에 서서 입장하는 이들의 옷차림을 훔쳐봤다. 그날은 집 밖을 나가지도 않고, 누구도 만나지 않던 내가 이상한 용기를 내 1년 반 만에 밖으로 나온 날이었다. ‘내가 절대로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가야 해!’ 클럽으로 향한 건 나와는 다른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일 거라는 단순한 선택의 결과였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게이트로 들어가는데 직원이 나를 멈춰 세웠다. 나는 속으로 ‘귀신이다. 내가 히키코모리라는 걸 몇초 만에 알아보네’ 하며 재빨리 도망쳤다. 어려 보여서 신분증을 확인하겠다는 직원의 목소리가 점점이 들려왔다.
그렇게 무작정 버스를 탄 뒤 내린 곳은 광화문이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매연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 무렵 내 방은 쓰레기장이었다. 예능 프로그램 <화성인 바이러스>에 쓰레기집에 사는 ‘쓰레기녀’가 나왔을 때 진행자들은 경악했다. 그렇구나. 저게 경악할 일이구나. 나는 방송을 보면서 그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했는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광화문에 간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삼청동까지 걸었다. 밤이 늦어 문을 닫은 미술관, 술집이 없어 인적이 드문 고요한 상가는 내게 무관심했다. 이런 공간에게 받는 외로움은 평생 느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날이 밝아오면 이 아름다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나를 누구도 반기지 않겠지. <화성인 바이러스>의 진행자들이 얘기하던 “청소는 인간의 기본” 같은 충고를 떠올리면 고개가 푹 고꾸라졌다.
그날 나는 만보 정도를 걸었다. 광화문에서 안국을 지나 인사동을 거쳐 종로3가에 다다를 때까지 걸었다. 낙원상가는 언제나 서울을 배회하는 나의 최종 목적지였다. <공각기동대>에 나올 법한 건물 밑으로 사거리가 있다는 것. 건물 안엔 악기를 연구하듯 팔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옥상에는 옛날 영화를 상영해주는 영화관이 있다. 노포를 지나야 입구가 나오는 탓에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선 모두 은은한 수육 냄새가 났고, 영화를 보고 나오면 술에 취해 노상 방뇨하는 노인들을 지나 집으로 갔다. 비리고 역겨운 냄새 속에서 나는 안락했다. 막 상경한 촌뜨기일 때도, 학교를 자퇴한 비행 청소년일 때도, 쓰레기집에서 나온 ‘쓰레기녀’일 때도 언제나 그 냄새는 나를 숨겨주었다. 새벽 세시. 탑골공원을 지나 남산타워가 보이는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나는 은둔하는 생활을 끝내자고 결심했다. 단절한 관계를 회복할 수 없을 거란 막막함이 가슴에 맺혀 있었지만 그래도 후련한 마음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종로의 오래돼 고여버린 냄새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나는 더이상 쓰레기장에 살지 않고 산책도 자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친구는 없다. 친구가 없는 사람의 글을 누가 읽고 싶어 할까? 사람들은 모두 관계에서 오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하고, 고민을 나누며 해결하길 원하는데 내게는 그런 비전을 내어줄 경험 자체가 없다. 누군가는 나를 두고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할 시기를 놓친 딱한 사람’이라며 혀를 찰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제 별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쌓여가는 고립감은 누군가 홍대나 서면에서 술을 먹고 춤을 췄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해소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그럼에도 한 가지 희망하는 것은 이 길고 긴 외톨이 수행이, 남의 슬픔과 고독 앞에서 실소하지 않을 능력을 가져다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평생을 외로움에 심취해 사는 ‘만성 중2병’을 만나더라도 그 낭만에 함께 취할 수 있는 일시적 우정, 냄새나는 누군가가 곁으로 올 때 더 큰 악취로 그 냄새를 숨겨줄 수 있는 초능력 말이다.
나는 아웃사이더의 <외톨이>를 수시로 듣는다. 비장한 멜로디, 외로움을 부르짖는 노랫말, 연극 같은 무대의 잔상이 감상을 버겁게도 만들지만, 그 무거운 소외감이 내 마음에 안착하면 나는 거기서 더 큰 해방감을 얻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새벽 감성에 취해 더 많은 외로움을 말했으면 좋겠다. 나는 친구가 없어서 그런 흔적들과 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