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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마의 단도가 항상 부정한 여인에게 향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체리폴스>에선 순결서약을 지키려는 10대 여학생들이 주검으로 변하니까. 영화에서 체리폴스라는 지명이 은근한 속뜻을 드러낼 때, 급기야 10대들이 벌이는 광란의 섹스파티는 목숨부지를 위한 필사의 구원식이 된다. <체리폴스>는 “살기 위해선 끝까지 처녀로 남을 것”을 신신당부하는 공포영화의 고전적인 계율들을 일단 뒤집는 설정으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참신한 맛이 있다.하지만 그뿐이다. <체리폴스>의 설정은 당의정에 불과하다. 영화의 전반부는 웨스 크레이븐의 <스크림>을 철저하게 모사한다. 할리우드의 호러영화 도식들을 깔끔하게 요약정리한 <스크림>의 위력을 무시할 순 없는지라, 신선한 공포의 발원지를 개척한 것처럼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체리폴스>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살인마까지 모셔온다. 빠른 속도로 시신들이 뒹굴지만 남는 혈흔만큼 공포감이 흥
체리 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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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엔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 대신 말라빠진 개들이 하릴없이 어슬렁거리고 저마다 두툼한 시가를 물고 다니며, 방조제에 부서지는 파도가 만들어내는 물보라가 아스라한 도시 아바나. 그곳에 더불어사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노연주자들은 언뜻 그 배경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궁핍하고 앙상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음반녹음실,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모습과 각자의 삶, 음악 경력에 대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담아냈을 뿐인 빔 벤더스의 이 디지털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리듬에 맞춰 발목을 끄덕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벤더스 스스로 음악과 다큐멘터리가 만났다는 의미에서 ‘뮤지큐멘터리’라 부른 이 영화에서 음악은 음악가의 삶과 완전히 동일한 차원의 것이다. 어깨에 힘을 뺀 채 악기를 설렁설렁 매만지는 것 같은데도 이 ‘영감님’들의 음악에선 아직도 못다 피운 로맨스에 대한 열정, 흘러가버린 세월을 그리는 깊은 탄식, 오랜 역정을 이겨낸 환희 같은 것이 두루 섞인 진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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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의 거실에서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베티의 남편이 마약을 빼돌렸고 청부 살인자들이 그를 응징하러 찾아왔다. 이건 현실이다. 베티의 방은 사뭇 다른 분위기다. 베티는 지금, 달콤한 휴식이자 짜릿한 하이라이트인 일과를 수행중이다. 병원을 무대로 한 연속극 <사랑하는 이유>를 보는 시간. 이건 환상이다. 거실에서 남편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순간, 베티는 현실에서 빠져나와 환상세계로 발을 들여놓는다. 어이없게도 연속극이 현실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베티의 환상은 이렇게 그녀의 현실에 침투해 인생을 뒤바꿔놓는다. <너스 베티>는 백일몽을,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꿋꿋이 좇는 이들에게 바치는 힘찬 응원가 같은 영화다.<너스 베티>의 환상은 도피라기보다 자각이고 실현이다. 포복절도할 상황 속에서도 폭소를 터뜨릴 수 없고, 웃음 뒤에도 씁쓸한 뒷맛이 남는 것은, 모든 일탈 행위가 결핍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베티는 즐겨보던 연속극이 진짜 현실이라고 믿게
너스 베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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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살에 만든 데뷔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가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았을 때, 사람들은 스티븐 소더버그를 천재라고 불렀다. 그러나 운명은 가혹했다. 소더버그는 <리틀 킹> <카프카> 등 야심작이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몰락하면서 급전직하, <조지 클루니의 표적>으로 재기하기까지 오랜 터널을 거쳐야만 했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2000년 <에린 브로코비치>와 <트래픽> 두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로 올리면서 ‘천재’라는 칭호를 회복했다. 다시 그를 천재라 부르는 이유는, 두편의 영화가 주제나 형식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영화를 서로 다른 스타일로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에린 브로코비치>가 줄리아 로버츠라는 배우를 중심에 놓은 평이하고도 아기자기한 드라마라면, <트래픽>은 소더버그의 영화적 테크닉이 모든 것을 끌어가
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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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올빼미의 성>의 결말은 얼핏 이해되질 않는다. 어느 시골농가에서 젊은 남녀가 땀흘려 일한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고, 이 한쌍의 부부는 한폭의 그림처럼 불변의 사랑을 나눌 것만 같다. 언젠가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은 인터뷰중에 “난 해피엔딩으로 마감되는 영화가 싫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인물들이 과연 행복할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 적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건대 <올빼미의 성>의 평온한 결말은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답지 않다. 1960년대 일본의 누벨바그 세대로서, 줄곧 처절한 운명론과 자기파괴의 미학을 스크린에 펼쳐보였던 노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올빼미의 성>은 시바 료타로의 원작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일본 전국시대를 가로지르는 정치사가 작품 배경이 되고 있다. 가족을 몰살당한 닌자는 복수를 계획하고, 통치자에게 칼날을 들이대지만 그의 목을 베지는 못한다. 그저 “복수로 세월을 보내게 해줘서 고맙다”라
올빼미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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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천국>의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말레나>에서 자신이 역시 성장영화쪽에 강점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네마 천국>의 토토가 영화를 통해 세상과 사랑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 것처럼 <말레나>의 레나토는 한 여인의 존재로 인해 부쩍 자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말레나는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어 왕성하게 피어나는 레나토의 육체와 정신에 햇빛과 물과 영양분을 공급하는 여신이다. 그는 머릿속에서 그녀의 옷을 입히고 벗기기를 반복하며 침대 스프링이 떨어져나가라 수음을 하기도 하고, 결국 부치지도 못할 연서를 수없이 쓰고 구겨가며 감성의 푸른 잎을 피우게 된다. 세상을 좀더 빨리, 넓게 볼 수 있게 하는 자전거나 성인 세계에 입장할 수 있는 통행증 같은 긴 바지처럼, 말레나는 레나토에겐 어른들의 세계를 가르쳐주는 교과서인 셈이다. 토르나토레는 <시네마 천국> 때와 마찬가지로 이같은 이야기를 질펀하고 왁자지껄한 이탈리아 시칠리아
말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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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노래한다. 프레스 기계의 시퍼런 칼날이 하얀 손목 근처를 배회할 때 쿵쾅거리는 톱니바퀴와 나사의 소음에 맞춰 춤을 추며 노래부른다. 그녀는 다시 노래한다. 공장에서 쫓겨나 빛도 희망도 볼 수 없을 때 “과거도 보았고 미래도 안답니다. 난 다 보았어요. 더이상 볼 것은 없답니다”라고 체념의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또 노래한다. 돈을 훔친 남자가 자신을 도둑으로 몰며 시커먼 절망의 절벽 아래로 밀칠 때 “바보 같은 셀마, 다 너 때문이야”라는 자책의 노래를 들려준다. <어둠 속의 댄서>는 사형대를 향해, 비극을 향해 경쾌한 탭댄스를 추며 나아가는 영화다. 오직 노래와 춤과 뮤지컬이 맘껏 숨쉴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던 눈먼 여인은 아들에게 자기 운명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그녀는 장님이 되지 않을 수도, 가난하지 않을 수도, 아껴주는 남편을 얻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가련한 여인은 그 모든 걸 포기한다. 세상의 어떤
어둠 속의 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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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눈치챘겠지만, <더 댄서>는 춤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영화다. 이야기보다 춤이 강하고, 배우보다 댄서가 전면에 있다. 17살 때 뤽 베송에게 발탁돼 그가 제작하는 영화의 안무를 했던 미아 프레에게 뤽 베송은 언어장애가 있는 댄서 인디아 역을 주었다. 캐릭터에 신비를 더하는 한편으로 연기보다는 춤에 능한 그녀를 배려한 설정임을 짐작할 수 있다. 미아 프레는 이 영화에서 놀라운 춤솜씨를 보이는데 대사가 없는 역을 연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라기보다는 아직 댄서로만 보인다. 이러한 ‘춤의 우위’는 영화 전반을 규정한다. 뇌쇄적인 미아 프레의 춤추는 모습을 담는 카메라는 뮤직비디오가 대상을 보여주는 방식을 따르며, 영화는 종종 드라마에서 뮤직비디오로 전환됐다 돌아오곤 한다.보이는 그대로 <더 댄서>의 개성은 바로 그 담백한 ‘전시’에 있다. 애초에 댄서 미아 프레의 매력에 중점을 둬 기획된 영화인 만큼 <더 댄서>는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기꺼이 춤을
더 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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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사를 쓰는 감독이 있다 하자. “오래 산 부부들의 ‘사랑해’라는 말은 ‘치즈 샌드위치’라는 말과 차이가 없지.” 그리곤 남자는 여자를 쳐다보며 살짝 고백한다. “에이미, 난 널 치즈 샌드위치 해.” 재치있는 대사의 행간에 상큼한 연애의 방점을 찍고 여기에 끈적거리지 않는 섹스라는 소스를 친다는 점에서, <러브 앤드 섹스>는 여성관객 앞에 내놓는 저칼로리식 샐러드처럼 보인다. 산뜻하고 톡톡 튀는 근심걱정 없는 로맨틱 코미디의 세계에 다시 여류감독이 나타난 것이다. <러브 앤드 섹스>의 감독 발레리 브레이먼은 남과 여의 차이에 민감지수 100인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노라 에프론과 낸시 마이어스의 계보를 잇는 신예감독.특히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랑과 섹스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영화는 여주인공 팜케 잰슨의 내레이션을 통해 여성의 주체적인 시선으로 섹스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 나가려 한다. 사랑에 대해서뿐 아니라 자신이 관계를 맺은 13명의 남
러브 앤드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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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아프다. 가슴을 저리게 하고 때로는 갈가리 찢어놓는다. 더이상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랑이라면 고통은 배가된다. 이를테면 부재의 로맨스다. <도쿄 맑음>에서 사진작가는 자신의 모델이자 부인이던 여성을 한없이 그리워한다. 세상을 등지고 영영 이별한 여인을. 눈앞에 있는 대상이 아닌 심상으로만 오롯이 남아 있는 사랑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러브레터>와 흡사하다. 여주인공도 겹친다. 큰 눈망울의 그녀, 조용히 입가에 웃음을 띠우는 것만으로 주변 풍경을 바꿔버리는 마력을 지닌 나카야마 미호가 <도쿄 맑음>에서 이루지 못할 서글픈 사랑에 재도전한다.<도쿄 맑음>은 예쁜 영화다. 마치 사진첩을 한장한장 넘기듯 정갈하고 세련된 장면이 많다. 도쿄 시내는 물론이고 관광지의 수려한 경치까지 감상할 수 있다. 실내와 실외를 막론하고 은은한 파스텔톤으로 일관하는 색감은 이 영화의 큰 매력이다. 얼핏 다케나카 나오토의 영화라고 믿기지 않는다
도쿄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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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초콜릿을 맛보면, 누구든 사랑에 빠진다. 마약보다 더 좋은 것.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드는 그 무엇. 정체 모를 그 묘약은, 먼저 마음의 족쇄를 풀라고, 관능적인 매혹에 솔직해지라고 부추긴다. 달콤한 초콜릿의 성찬은, 금욕과 위선과 편견으로 무장한 한 마을에, 사랑의 훈풍을 불러온다. 달콤쌉싸름한 사랑의 맛이 오감으로 느껴지는 영화 <초콜렛>은, 사랑만이, 사람만이 세상의 희망임을 이야기한다.여느 음식영화처럼 식욕과 성욕을 연결짓고 있지만, <초콜렛>은 신비와 순수의 공기를 곁들인다. 초콜릿의 유래와 기능을 상징하는 여인의 존재도 그 속에서 빛을 발한다. 성당에서 앳된 신부가 “진리는 어디에 있냐”고 목청을 높일 때, 그에 대한 대답인 듯 거센 북풍이 불어닥치고, 이방의 모녀가 마을에 당도한다. 얄궂게도 빨간 망토를 뒤집어쓰고. 미혼모와 그 딸.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가슴팍에서 주홍글씨를 읽으려 한다. 괴상한 접시(마야의 유물로 밝혀지지만)로 점을 보면서,
초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