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노래한다. 프레스 기계의 시퍼런 칼날이 하얀 손목 근처를 배회할 때 쿵쾅거리는 톱니바퀴와 나사의 소음에 맞춰 춤을 추며 노래부른다. 그녀는 다시 노래한다. 공장에서 쫓겨나 빛도 희망도 볼 수 없을 때 “과거도 보았고 미래도 안답니다. 난 다 보았어요. 더이상 볼 것은 없답니다”라고 체념의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또 노래한다. 돈을 훔친 남자가 자신을 도둑으로 몰며 시커먼 절망의 절벽 아래로 밀칠 때 “바보 같은 셀마, 다 너 때문이야”라는 자책의 노래를 들려준다. <어둠 속의 댄서>는 사형대를 향해, 비극을 향해 경쾌한 탭댄스를 추며 나아가는 영화다. 오직 노래와 춤과 뮤지컬이 맘껏 숨쉴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던 눈먼 여인은 아들에게 자기 운명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그녀는 장님이 되지 않을 수도, 가난하지 않을 수도, 아껴주는 남편을 얻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가련한 여인은 그 모든 걸 포기한다. 세상의 어떤 사랑은 그렇게 완성된다. 그것은 ‘어머니’라는 이름의 사랑이다.
2000년대 첫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어둠 속의 댄서>는 서구 평단에서 찬반양론이 격돌했던 작품이다. 앞 못 보는 여인이 도둑으로, 살인범으로 몰려 사형수가 되고, 죽음 앞에서도 오직 아들의 눈수술을 염려하는, 말만 들어도 슬픈 줄거리가 ‘통속적이고 작위적인 멜로드라마’라는 비판의 근거였다. 실상 <어둠 속의 댄서>는 ‘눈물없이 볼 수 없는’이라는 고풍스런 수식어에 걸맞은 구태의연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특히 비극을 향한 가파른 절정에 누가 봐도 용서할 수 없는 못된 인간을 등장시킨 점은 수준높은 드라마에서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결점이다. 타고난 서글픈 운명에 대해 숙고하는 대신 ‘재난’이나 ‘참사’로 느껴질 갑작스런 파국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 라스 폰 트리에는 드라마의 결함을 사소하게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그것은 <어둠 속의 댄서>가 뮤지컬이기에 가능하다. 근본적으로 조화와 화해와 화려함의 장르인 뮤지컬은 주인공 셀마의 환상이자 언어이며 내면이다. 그녀가 행복과 체념과 자책의 노래를 부르며 구원의 빛을 발견하듯 드라마는 셀마를 연기하는 비욕의 목소리로 인해 승화된 예술형태로 도약한다. 100대의 디지털카메라를 동원해 찍었다는 춤과 노래의 시퀀스는 고전기 할리우드 뮤지컬처럼 빈번하게 등장하지 않지만 <어둠 속의 댄서>의 또다른 언어로 보는 이의 영혼에 말을 건다. 고작 천둥번개를 무서워하는 아이들에게 안도감을 주는 데 그친 <사운드 오브 뮤직>의 노래 이 <어둠 속의 댄서>에선 교수형을 앞둔 자의 두려움을 어루만진다. 해피엔딩의 장르인 뮤지컬은 여기서만큼은 비극이 물러설 자리를 주지 않는다. 음악이 흐르면 춤추는 셀마의 순진하고 행복한 표정이 보는 이를 더 슬프게 할 뿐이다.
‘도그마 95 순결서약’으로 유명한 라스 폰 트리에는 <어둠 속의 댄서>에서 자신이 말한 원칙들을 아낌없이 버렸다. 이 영화는 디지털카메라로 찍었고 인공적인 양식인 뮤지컬을 도입했으며 미국 현지에서 찍지도 않았다. 거창한 선언만 내뱉고 책임지지 못하는 작자라는 비난에 휩싸일 만한 짓이지만 <어둠 속의 댄서>엔 스스로 규정한 형식에 대한 제약을 뛰어넘는 미덕이 있다. 그건 <브레이킹 더 웨이브> <백치들>에 이어 <어둠 속의 댄서>에 묘사된 강하고 희생적인 여인상에 있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베스와 <어둠 속의 댄서>의 셀마는 같은 피를 타고났다. 비욕은 에밀리 왓슨이 그랬듯 선한 의지로 말미암아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고행을 택한다. 그들은 왜 맨발로 가시밭길을 걷는 수난을 감수하는가? 라스 폰 트리에는 거기서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화형대에 선 잔 다르크의 표정을 떠올린다. 말하자면 그는 피에타를 거듭 그리는 화가다. 비교적 단순하고 아주 고전적이지만 진심으로 대하면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림 말이다.
너무 착해서 바보처럼 살았던 어머니들을 떠올리면 <어둠 속의 댄서>에 동화되기란 아주 쉽다. 객석에서 “그럼, 안 돼”라고 소리지를 정도로 주인공 셀마는 어리석고 상황을 악화시킬 행동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그녀의 못난 행동이 이끌리는 숭고한 희생에 대해 누가 손가락질하겠는가? 어쩌면 시력을 잃어가는 이는 셀마가 아니라 약삭빠르고 이기적인 그래서 정상적인 우리들이었는지 모른다.
남동철 기자 [email protected]
타고난 가수, 태어난 배우...<어둠 속의 댄서> 배우들이기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없고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불행을 자초하는 여인 셀마로 나온 비욕은 널리 알려진 아이슬란드 출신 음악가다. 그녀는 연기를 하고 춤을 추며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 촬영 당시 감독과 심한 불화를 겪었다고 알려진 비욕은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는 자리에서 “더이상 연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 놀라운 재능을 가진 예술가를 더이상 스크린에서 볼 수 없는 건 안타깝지만 설사 다시 영화에 나온다 해도 <어둠 속의 댄서>보다 적역이긴 어려울 것 같다. 1965년에 태어난 비욕은 11살 때 첫 음반을 낸 타고난 음악가. 그녀가 유명해진 것은 1988년 결성된 얼터너티브 록밴드 슈가큐브에서 보컬을 하면서부터다. 1993년 솔로로 데뷔한 뒤 <데뷔> <포스트> <호모제닉> 등의 앨범을 발표했고 지금까지 700만장 넘는 음반이 팔렸다고 알려졌다. 라스 폰 트리에가 비욕을 발견한 것은 <존 말코비치 되기>의 감독 스파이크 존즈가 만든 그녀의 뮤직비디오를 통해서다. 비욕의 천진한 외모와 독특한 음색이 없었다면 분명 <어둠 속의 댄서>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어둠 속의 댄서>에는 비욕 외에 국적이 다른 다양한 배우가 등장한다. 카트린 드뇌브는 셀마를 돕는 공장 동료 캐시로 등장한다. 일찍이 뮤지컬 <쉘부르의 우산>으로 스타가 된 그녀는 그간 보여줬던 우아하고 귀족적인 이미지와 달리 친근하고 다정한 아줌마의 얼굴을 드러낸다. 셀마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 제프 역은 스웨덴 출신으로 할리우드영화에도 꽤 많이 나온 피터 스토메어다. <파고> <아마겟돈> <위대한 레보스키> 등에서 그를 볼 수 있다. 악질 경찰관 빌로 나오는 데이비드 모스는 <더 록> <그린 마일> 등으로 낯익고 빌의 아내로 나오는 카라 세이모어는 <유브 갓 메일> <아메리칸 사이코> 등에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