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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분절된 신체와 놀이
<톰보이>를 보면서 루시아 푸엔소의 <XXY>(2007)를 떠올렸다. 주인공 알렉스는 거리에서 음악을 들으면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음악을 듣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과 그 순간과 그때의 음악이 좋아서 한동안 그 장면에서 나오던 음악을 듣고 다녔다. <톰보이>와 셀린 시아마의 다른 영화에도 종종 인물과 내가 같은 음악을 듣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이후 셀린 시아마 작품을 본다는 것은 그 이전과 다르다. 감독의 전작 <톰보이>(2011)는 9년 전이라면 10살 소녀가 자신 안에서 소년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으로 정리했을 법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일단 ‘정체성’ 이라는 단어부터 걸린다. 소년성과 소녀성은 또래 집단 내에서는 분명히 구분되지만, 로레(조 허란)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로레에게 소년성은 내재한 어떤 것을 부정할 필요없이 존재한다. 이미
'톰보이'와 셀린 시아마의 아이들이 허락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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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케 쇼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중반부엔 뜻밖의 장면들이 등장한다. ‘나’(에모토 다스쿠)와 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 시즈오(소메타니 쇼타)가 청춘의 활기로 스크린을 감전시켜놓는 클럽 신 뒤에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다. 세 인물은 밤이 되면 한데 모여 취하고 웃고 떠들며 가슴 벅찬 시간을 보내지만, 낮이 되면 각자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 같은 서점에서 일하는 ‘나’와 사치코는 저마다의 노동을 한다. 실업 상태인 시즈오는 집안일을 하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실은 시즈오의 일상은 단편적으로만 비쳐지기에 우리로서는 그의 일상을 모두 직조해볼 수 없다. 서점에서 일하는 ‘나’와 시즈코의 일상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지만, 한낮에 시즈오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쉽게 파악할 수는 없다.
한낮의 시즈오는 어디에 찍힐지 모를 유동하는 점과 같다. 가령 그는 직선으로 뻗은 길 위에서조차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걸어간다. 특히 클럽 신 이후에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미야케 쇼가 담아낸 것과 그것을 위한 시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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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표현이지만 예상보다 훨씬 솔직담백한 영화였다. 내겐 <사냥의 시간>이 마치 <구니스>(1985) 같은 10대 소년들의 어드벤처물처럼 보였다. 의도했던 것과 보여주는 결과물, 그리고 그것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방식 사이의 격차에 대해 살펴보고자했다. 때로 성공과 실패에 대한 평가보다 그 뒤에 남겨진 것들에 대해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
윤성현 인 원더랜드
“재밌네.” 이 한마디 대사는 <사냥의 시간>의 빛과 그림자, 과장된 평가의 콘트라스트를 선명하게 가르는 핀 포인트 조명이나 다름없다. <사냥의 시간>의 이야기는 대체로 말이 안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말이 안되는 장면은 한(박해수)이 준석(이제훈)을 놓아주는 순간이다. 조직의 해결사이자 윗선의 비호까지 받는 킬러 한은 지하 주차장에서 준석 일행을 몰아붙이고 제압한다. 두명의 친구, 기훈(최우식)과 장호(안재홍)가 기절해 있는 사이 준석은 한과 일대일로 마주한다. 머
많이 모자라지만 참 맑은 친구, '사냥의 시간'의 소년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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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타이거 킹: 무법지대>(이하 <타이거 킹>)는 섬뜩한 정보에서 시작한다. 지구상에는 감금되어 사육되는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이 야생의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보다 많다. 미국에서만도 5천 마리에서 1만 마리 사이의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이 사육되고 있는데, 야생 상태의 동물들은 기껏해야 3천 마리가 조금 넘는다. 동물원이 이들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위험하고,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쓸모도 없는 동물들은 왜 감금되어 있는 걸까? 이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면 몇년의 시간을 투자해 탐구해볼 가치가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리고 그건 <타이거 킹>이 올바른 작품이었다면 갔어야 할 길이다.
유감스럽게도 시리즈는 그 길로 가지 않는다. 이는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큐멘터리는 소재와 주제를 선택할 수 있지만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제할 수 없고, 종종 의도와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이야기에 휩
'타이거 킹: 무법지대'의 관찰하는 카메라의 윤리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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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계기로 최근 몇년간 소개된 일본영화를 연이어 보면서 이들 영화에서 괜한 안쓰러움을 느꼈다. 처음에는 상실과 허무의 시대를 안간힘을 다해 버텨내는 인물에 대한 느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정작 그 시대를 버텨내고 있는 것은 허구의 세계 그 자체였다.
허무와 상실의 세계에서 버텨내는 삶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인물들은 모순적이다. 생동감이 넘치다가도 그 활기의 끝자락에서 씁쓸함이 우리를 덮쳐온다.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면은 세 남녀가 클럽에서 맘껏 노는 장면이다. 특히 여주인공 사치코를 연기하는 ‘이시바시 시즈카’가 클럽 음악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는 순간은 여느 영화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영화적 쾌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중력을 지웠기에 가능한 생기다. 시즈오(소메타니 쇼타)의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 이후 그들은 여전히 어울려 놀지만 그들에게는 그 이전의 자유와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와 일본 청춘영화, 그리고 트라우마적 사건 이후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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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가 눈에 비치는 세계에 반응하는 인물을 관측한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손에 쥐어진 도구로 세계에 대응하는 존재를 다룬다. 비슷한 시기에 톰 행크스라는 배우를 공유하더라도, 스필버그는 창문 바깥과 다리 너머를 응시하는 변호사의 눈빛을 바라보고(<스파이 브릿지>) 이스트우드는 허드슨강에 비행기를 불시착시키는 기장의 손짓을 포착한다(<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이하 <설리>)). 도식적인 구분일 테지만 그만큼 이스트우드 영화에서 손의 활동은 특별한 문제다. 그의 주인공들에게 손은 개인의 전문가적 선택으로 세계와 매개하는 물리적 접촉면이면서, 또한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인 총잡이의 기억과 성흔(stigmata)이 새겨진 장소다. 그들이 더이상 총을 겨눌 수 없는 조건에 놓였을 때 수없이 변주되는 대체물들로 세계와 (재)매개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문제야말로 이스트우드가 구축한 픽션의 사라지지 않는 핵심이라 말할 수 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리차드 쥬얼'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손을 다루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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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不義)한 세계에서 박해받는 영웅의 수난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근 ‘다큐-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다큐-드라마’라 함은 그의 근작들 대다수가 실화 사건에 토대하거나, 심지어 <15시 17분 파리행 열차>(2018)처럼 현실의 인물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스트우드가 그런 이야기의 기저에서 발견하는 것은, 공동체의 안위와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궁극적인 좌절 혹은 배반이라는 쓰라린 현실이다. 애틀랜타올림픽 캠페인이 한창이었던 1996년, 센테니얼 공원에서 파이프 폭탄이 담긴 배낭을 발견한 경비원의 실제 스토리에 기초한 <리차드 쥬얼>(2019)은 이런 경향의 연장에 있다. 공원 벤치 아래에서 의심스러운 배낭을 발견한 경비원 리차드 쥬얼(폴 월터 하우저)은 그가 배운 매뉴얼대로 상황을 통제하여 수백명의 목숨을 구한다. 호사가들의 이야깃거리로 구미를 당기는 리차드의 무용담은 TV토크쇼의
<리차드 쥬얼>에서 ‘이스트우드 페르소나’가 초(超)자연적 신화의 힘으로 작동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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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이브>는 무엇보다 캐릭터를 위한 드라마다. 캐릭터를 큐레이션한다는 생각으로 두 캐릭터로부터 떠오르는 인물의 잔상을 붙잡아보았다. 이브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전혀 다른 패턴의 살인사건 속에서 빌라넬의 스타일을 발견한 것처럼, 그렇게 해보고자 한 거다.
우리 시대 (비)인간의 형상들
좋아할까, 말까. 아니 좋아해도 될까. <킬링 이브>의 빌라넬(조디 코머)은 관객을 고민에 빠뜨린다. 잔혹한 살인광인 그녀를 좋아해도 되는 것일까. 매력적인 캐릭터 스토리라고 방어하며 무차별적인 살인 행위를 즐기는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는 내가 ‘살인 행위’를 인식한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빌라넬은 조직에서 고용한 암살자고 이것은 장르물이다. 스파이물에서 살인은 장르의 정체성과도 같다. 이때 살해당하는 이들 중 다수가 엑스트라이며, 죽음의 무게는 인물의 비중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이를 염두에 둘 때 잔혹한 살인에 대한 페티시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 <살인마 잭의 집&
드라마 '킬링 이브', 인간성을 도려내니 인간이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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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오 감독의 장편 데뷔작 <이장>을 보기 전에 우연히 포스터를 먼저 보게 됐다. “세기말적 가부장제에 작별을 고하다”라는 타이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세기말’이라는 단어를 접한 게 오랜만이라 그렇기도 했겠지만, ‘가부장제에 작별’이라는, 20자평에나 등장할 법한 이 단정적인 선언의 무게를 과연 영화가 얼마나 버텨낼 것인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포스터의 저 문구가 일종의 ‘선언’이었다면 영화는 그 선언에 대한 하나의 ‘행동강령’ 처럼,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진행된다. 여기서 방점은 그 강박적인 ‘오차 없음’ 에 있다.
다섯개의 사연에 너무 짧았던 1박2일
이 ‘강박’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마 이 장면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모인 오남매와 큰아버지 내외는 이장 전 마지막 제사를 준비한다. 이장 후 동생의 묘를 제대로 쓰지 않고 화장한다는 결정을 한 조카딸들에게 잔뜩
어느 한 인물도 충분히 말하지 못한 '이장'의 안타까운 무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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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하우스>의 감독 로버트 에거스의 전작 <더 위치>(2015)는 전세계 호러 팬들에게 극찬을 받은 영화다. 고립된 한 가족의 공포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무섭게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들의 공포는 죽음보다 무서운 것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고, 그 설명할 수 없음이 무서운 공기를 만들어낸다. 이 영화가 무섭다면 어떤 사건이나 존재 때문이 아니라 무서워하는 자들이 내뿜는 공기가 무서운 것이며, 그렇기에 무서워하는 자들은 다시 무서운 자들이 된다. <라이트하우스>도 <더 위치>처럼 고립된 공간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4주간 섬에서 등대지기를 하는 토마스(윌럼 더포)와 그의 조수 에프라임(로버트 패틴슨)이 고립된 생활을 하는 동안 점점 더 광기에 사로잡힌다는 이야기이며, 고립과 광기라는 점에서 <더 위치>와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더 위치>와는 근본적으로 이야기의 결이 다르다. <더
'라이트하우스'의 흑백이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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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고백>의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이 호러영화를 만든다니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22회 공포소설대상을 받은 사와무라 이치의 <보기왕이 온다>가 원작이다. <보기왕이 온다>를 먼저 읽었다. 사와무라 이치는 호러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는 마니아였고, 데뷔작인 <보기왕이 온다>에 자신이 좋아하며 무섭다고 생각하는 호러의 요소들을 모두 산뜻하게 담았다. <불량공주 모모코>(2004),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 <고백>(2010), <갈증>(2014)은 모두 원작이 있었다. 원작의 매력을 살리면서, CF 감독으로 유명한 이력답게 현란하고 강렬한 이미지의 영화를 만들어왔던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이 호러라는 장르에서 어떤 이미지 그리고 장면을 만들어낼 것인지 궁금했다.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호러는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장르다. 유명한 호러영화의 오싹한 장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의 영화들과 그 연장에서 살펴본 공포영화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