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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두 번째 장편영화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일을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2016년 첫 번째 장편 <로우>로 관객에게 자기 이름만큼은 확연히 각인시켰을 감독 줄리아 뒤쿠르노의 얘기다. 현재까지 언론을 통해 얼마간 알려진 수상작 <티탄>에 관한 정보는 어린 시절 사고로 머리에 티타늄을 심은 알레시아가 괴기한 욕망에 따른 기행을 벌이다 10년 전 실종된 아들을 찾는 뱅상과 만나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는 것 정도다.
이 짤막한 정보만으로도 <티탄>에서는 뒤쿠르노의 전작과 같이 신체에 대한 과도한 탐닉과 변형, 훼손, 성 집착, 피칠갑의 향연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 주인공이 자동차와 성적 관계를 맺고 임신을 하며 휘발유로 수유한다는 SF 장르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고 하니 그 기이함은 상상 이상일 것으로 판단되면서도, 전작 <로우>를 성장통에 관한 우화로 본 시선을 호기롭게 무력화는 데서 오는 통쾌함도 느낀다.
성장이
올해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티탄'을 기다리며 '로우'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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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영화들에 있는 두개의 심각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몇년 동안 떠들고 다녔는데, 지겹지만 이번에도 거기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이걸 빼먹으면 <블랙 위도우>라는 영화가 설명이 안된다. 하나는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멤버 구성이다. 이건 눈치 없이 시대를 따라잡지 못한 결과가 아니다. 마블 코믹북 유니버스에서 어벤져스가 이렇게 백인 남자로만 구성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건 심지어 마블의 기존 이미지와도 맞지 않는다. DC가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을 추구하는 회사라면 마블은 늘 격변하는 시대를 반영하는 회사로 알려졌다.
어벤져스가 얼마나 이상한 모양인지 알려면 역시 같은 회사에서 나왔고 코믹북에서는 같은 우주를 공유하며 심지어 몇년 일찍 나온 <엑스맨> 시리즈를 보면 된다. MCU를 만든 사람들은 그냥 눈치 없었던 게 아니었다. 이것은 의도적인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혐오 행위다. 이렇게 10년 가까이 단물을 빼먹고 절대로 당연시
'블랙 위도우'로 블랙 위도우를 떠나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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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의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엔딩을 되새기며, 서정시가 불가능함을 증명한 서정의 영화에 대해 썼다.
재건과 복원의 딜레마
<피닉스>의 넬리(니나 호스)는 육체로 자신을 증명하며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얼굴을 감싼 붕대를 풀어 자신을 증명했던 넬리는 영화의 엔딩에서 팔에 새겨진 숫자로 다시 한번 자신을 증명한다. 넬리의 육체는 그 자체가 아우슈비츠를 증명한다. 아우슈비츠는 설명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뿐이다. 우리는 이 육체적 증명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아우슈비츠를 생략하려 했던 전후 독일의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육체에 새겨진 아우슈비츠의 고집스러움은 그 흔적을 지우려는 모든 시도를 실패하도록 했음을 보여준다. 아우슈비츠를 생략하려 했던 역사, 그럼으로써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이전 상태로 돌아가려 했던 시도
'피닉스'에서 보여준 페촐트의 역사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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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이 영화를 보았다. 당시에는 벽화 속의 말 그림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진부한 욕망의 기표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시 보니 조금 다른 해석을 하게 된다. 시각화에 있어서는 여전히 아쉽지만 장점이 훨씬 더 많이 보인다. <죽어도 좋은 경험: 천사여 악녀가 되라>(이하 <죽어도 좋은 경험>) 는 김기영 필모그래피의 원형(archetype)이라 할 수 있는 <하녀> (1960)의 뒤를 잇는 작품으로, 물질의 화신인 남성 캐릭터의 세계로 그로테스크한 혼동의 여주인공이 침입하는 서사를 지녔다. 이른바 ‘악녀’와의 조우다. 하지만 <하녀>의 주인공이 ‘자본주의’라는 거대 유령과 싸웠던 것과 달리 이번 주인공은 처음부터 악이었거나 혹은 악의 영역으로 서서히 침범하는 다른 여성 캐릭터와 다투고 있다.
연출자 김기영의 단호한 목소리
김기영의 남성주인공은 아무리 권위 있는 자라 해도 결코 정신의 영역
'죽어도 좋은 경험: 천사여 악녀가 되라'에서 인간의 극단적인 열망이 드러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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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의 초반부, 유대인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인 넬리(니나 호스)는 훼손된 얼굴을 복구하는 성형수술을 받고 머리에 붕대를 두른 채로 병실 침대에 누워 있다. 집으로 되돌아가 남편 조니(로날드 제르펠드)와 재회하는 꿈을 꾸던 넬리가 문득 고개를 돌리면 그녀와 똑같이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환자복을 입은 여인이 반쯤 열린 문 앞에서 넬리를 바라보고 있다. 다음 장면에 잠에서 깨어난 넬리는 그녀를 지켜본 여인의 발걸음을 따라 복도를 걸어간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벽면에 여러 장의 사진이 걸려 있는 또 다른 작은 방이다. 그곳에서 넬리는 자신의 원래 얼굴이 찍힌 흑백사진을 발견하고 바라본다. 외견상으로 두 사람을 구분하기 어려운 데다, 넬리를 지켜보고 사진이 걸린 방으로 이끄는 여인에 대해 이렇다 할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장면은 꽤 기묘한 인상을 자아낸다. 별다른 전조나 예비도 없이 불쑥, 기원이 불분명한 영화적 분신(‘double’)이 각인되는 것이다. 나와
'피닉스'의 붉은 원피스와 검은 상의가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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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말을 하지만, 루카(제이콥 트렘블레이)만큼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인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소년은 바다에서는 초록색 생물이고, 육지에서는 인간이다. 그는 바다에 살면서 육지 위의 세계를 동경한다. 루카 안에는 여러 가지 정체성이 있고 그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자식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엄마에게, 오래 살며 여러 꼴을 목격했던 그녀에게 자식의 호기심은 공포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녀는 미지의 세계를 투박하고 자극적인 용어들로 환원해 자식의 호기심을 잠재우려 한다. 괴물. 위험. 우리를 죽이러 오는 자들. 그럼에도 어린 소년은 이세계(異世界)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을 감추지 못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내면에 다양한 정체성을 품고 있고, 누군가는 당신의 여러 조각들 중 하나를 싫어한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스스로를 적당히 감추고 사회에 녹아들기
'루카'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대면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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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의 비평가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초대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연극과 미술 비평이 더는 존재하거나 볼 수 없는 작품에 대한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영화 비평과의 두드러진 차이점으로 인식했다. 관람한 이가 드문 작품에 관한 글을 쓰면서 영화 비평 역시 때때로 그와 같은 가치를 지닐 수 있을지 생각했다.
목적에서 떨어져나온 선동
최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요리스 이벤스 회고전이 진행되었다. 이 글은 회고전에 맞춰 요리스 이벤스의 영화 세계를 조망할 의도로 쓴 것이 아니다. 요리스 이벤스의 영화를 오늘날 체험하는 일과 그 의미에 관한 기록이다. 더 솔직하게는 같은 날 동시에 관람하게 된 두 영화를 중심으로 어떻게든 이벤스의 영화 세계와 접속해보려는 시도다. 그의 작품 중 특정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작품, 특히 초기작 <우리는 건설한다>(1930)에 주목했다. 긴급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그 목적의 시효가 다한 뒤에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이 작품이
요리스 이벤스의 영화는 어떻게 회고의 대상이기를 거절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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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신체의 감각을 차단하는 방식을 영화의 주된 설정으로 잡은 영화들이 있었다. <버드 박스>(2018)의 사람들은 미지의 존재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눈을 가린다. <런>(2020)에선 삐뚤어진 모정으로 인해 딸이 다리의 감각을 잃고 휠체어를 탄다. 눈과 다리를 쓸 수 없다는 것은 다름 아닌 이동 제한을 의미한다. 차단된 감각으로 인해 심해지는 답답함은 생존과 탈출에 대한 압력을 높이게 만든다. 영화는 종국에 주인공의 감각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버드 박스>에선 주인공이 어떤 장소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 안심하며 안대를 벗는다. 전보다 자유롭지만, 여전히 새장이다. <런>은 지팡이를 짚고 걷게 된 딸이 자신을 가뒀던 어머니가 있는 감옥에 면회를 가 복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이 감시를 받았다는 입장에서 시각을 오감 중 최종 심급으로 여기고 있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은 곧 통제를
'콰이어트 플레이스2'가 공포를 구축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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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주목받은 독립영화에선 아이와 이주, 여성감독이라는 공통점이 보인다. 그 공통점의 배경을 생각해봤다.
앙상한 기억의 시절
김보라의 <벌새>(2019), 윤가은의 <우리집>(2020), 윤단비의 <남매의 여름밤>(2020), 정연경의 <나를 구하지 마세요>(2020) 등 최근 한국 독립영화는 아이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공교롭게도 이들 작품은 여성감독이 연출했다. 이 리스트에 이지형, 김솔이 공동 연출한 <흩어진 밤>까지 더하면, 국내 영화제에서 수상하거나 화제가 된 독립영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아이’와 ‘여성감독’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넓은 맥락에서 보면, 이환의 <박화영>(2018)과 <어른들은 몰라요>(2021) 등을 함께 거론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일단 제외하려 한다).
그런데 이들 작품들은 ‘이주’의 상황을 아이들이 헤쳐가야 하는 어떤 현실적 위기와 곧잘 연결시키곤 한다.
'흩어진 밤'은 왜 아이들을 불안정한 이주의 상황 속으로 던져놓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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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죽었다. 직업 군인 마르쿠스(매즈 미켈슨)는 훈련을 마치고 기지로 돌아온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한 군인의 표정과 걸음걸이만 보고도 그 사실을 직감한다. 이는 수년간 타지에서 가족과 떨어진 상태로 단체 생활을 했던 그가 보고 들은 수많은 사례를 통해 얻게 된 능력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은 마르쿠스가 처음 겪는 일이다. 결과를 인정할 수 없는 마르쿠스는 영화 초반부 아내에게 ‘일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을 어기고 아내에게로 향하고, 그렇게 아내의 손을 만져보고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한 뒤에야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같은 이야기를 겪고 있는 두 번째 시선이 있다. 그 시선은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된다. 아빠와 통화하고 있는 엄마의 표정만 보고도 아빠가 집에 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마틸드(안드레아 하이크 가데버그)는 아빠와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사고를 겪은 마틸드 역시 마르쿠스처럼 주어진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가 보여준 명확한 오프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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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단락으로 구성된 홍상수의 <인트로덕션>에서 가장 짧은 분량을 차지하는 1부에는 유독 ‘기다림’을 가리키는 대사와 상황이 자주 나온다. 첫 장면에 책상에 앉아 기도하는 영호 아버지(김영호)의 모습을 시작으로, 아버지가 불러 한의원을 찾은 영호(신석호)는 동행한 여자친구 주원(박미소)에게 밖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다. 한의원 안에서 영호는 오랜만에 재회한 간호사 누나(예지원)와 진료 중인 아버지에게 번갈아 가며 기다리라는 말을 듣는다. 그보다 더 안쪽의 진료실에선 먼저 치료를 받던 여자 손님과 이곳에 예기치 않게 방문한 연극배우(기주봉)가 커튼으로 가려진 침대에 누워 영호의 아버지를 기다린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계단을 올라와 다시 책상에 앉으며 영화의 첫 장면에서 보인 자세를 되풀이한다. 영화는 바깥에서 안으로, 문밖에서 진료실 내부로, 다시 그 안의 작은 침대로 영화는 크기를 좁혀가며 인물들의 위치를 조정하고 붙잡아둔다. 하나의 공간 너머에 작은 공간이 있다.
'인트로덕션'의 수많은 기다림이 의미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