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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철>은 두 남자의 차 사고를 둘러싼 진실을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주변인들의 비밀도 들춰보는 서스펜스영화다. 그러나 마치 봉준호 감독의 영화처럼, 진실의 실체보다는 거기에 도착하는 과정에 도사리고 있는 전경들이 빛을 발한다. 봉준호의 서스펜스 뒤편에는 한국 사회의 뒤틀린 구조도가 펼쳐져 있다면, <빛과 철>의 후면에는 진실을 얻으려는 자가 관통해야 하는 엄중한 법칙이 버티고 있다. 진실에 다가서는 자와 그 주변인들이 감내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배종대 감독은 자신이 축조한 영화적 세계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영화는 묘한 영상으로 시작된다. 도로를 따라가던 카메라는 이미 두대의 차가 파손된 사고 현장에 도착한다. 막 사고가 난 듯 열기가 가득한 현장. 여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도로의 질료마저 감각할 수 있는, 현장의 생생한 현실감이다. 이 장면의 생생함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돋보
'빛과 철'의 냉혹한 성취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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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클로드 카리에르에 대한 부고이자 그가 직간접적으로 흔적을 남긴 세편의 영화(<세브린느>(1967), <세브린느, 38년 후>(2006), <사랑을 카피하다>(2010))에 공명하는 제스처와 소리를 둘러싼 짧은 생각이다. 지나고 보니 미로처럼 만들어진 묘지를 헤쳐왔다는 인상이다. 카리에르에서 루이스 부뉴엘로, 부뉴엘로부터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로, 올리베이라에서 미셸 피콜리로, 다시 카리에르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로, 또다시….
종소리가 들리면 영화는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스크린에 비친 영화를 볼 뿐인 우리는 어떤 흔적을 가지고 시나리오작가에 접근할 수 있을까? 카메라에 붙잡힌 장면의 세부적 요소, 혹은 배우가 선보이는 강렬한 이미지와 대사, 그도 아니라면 영화가 펼쳐내는 이야기의 구조와 형식에 대한 인상 같은 것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거론한 요인들 가운데 어느 것도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각본가의 텍스트가 완
프랑스 시나리오작가 장 클로드 카리에르의 죽음이 남긴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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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영화는 각자의 자리에서 반란을 도모한다. 세 영화 속 세 인물이 마구 뒤섞이는 투쟁과 화해의 장으로 당신을 소환한다.
반동의 트라이앵글
남자들이 죽었다. 여자들의 만남이라는 ‘빛’ 뒤에는 남자들의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남자들은 존재하지 않거나(<아이>), 이미 죽은 상태이거나(<빛과 철>), 죽은 것과 다를바 없는 상태를 거쳐 죽임을 당한다(<고백>). 잠깐, 이러한 분석에는 수상한 데가 있다. 이미 죽었거나 죽임당하는 존재의 자리에는 주로 여성이 놓여왔다. 영화 속 여자들은 리얼리즘적 현실 반영이라는 조건 아래 이미 죽은 상태이거나,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를 거쳐 죽임당했다. 현실이 재현을 만드는지, 재현이 현실을 만드는지 혹은 재현이 그러한 현실을 강화하는지에 대한 반성 없이 그것은 영화를 향유하기 위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처럼 보였다.
이는 너무도 익숙해서 삭제된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읽어내지 않을 때는 쉽게
<아이> <빛과 철> <고백>이 남자를 죽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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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화면 안에 두 소녀가 밤길을 달리고 있다. 조그만 아이의 손을 꼭 붙든 조금 더 큰 소녀의 몸짓은 불안하며, <세자매>를 열고 있는 이 밤은 불길하다. 겉옷 하나 걸치지 않은 내의 차림의 아이들이 차가운 겨울밤을 달려야 하는 상황적 배경이 밝을 리는 없다. 하지만 더 암담한 사실은 두 소녀가 언젠가 이 밤을 다시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장면을 설명하는 장면이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게다가 플래시백의 한 부분이라면, 이 밤 속으로 영화의 감정들이 고여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자매>의 서사를 복기한 결과가 아니다.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는 전개다. 영화의 시작부에 등장하는 플래시백 장면이 인물들의 현재와 동떨어져 기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 상태의 징후로서 기능하든 기원으로서 작동하든, 그것은 대개 현재와 과거 사이의 인력을 형성한다.
인물들의 온갖 기행을 나열하며 세상의 보편적인 감정에 기어코 다다르려 하는 이승원 감독 역시 인물들의
'세자매'가 감정을 분출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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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하면서 봤다. 아마도 한국영화 역대 최고의 가성비 영화일 것이다. 이만한 예산에 이만한 결과물을 뽑아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꼭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를 집에서 보는 아쉬움을 삼키며 이 영화가 지닌 초월성에 대해 썼다.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의 말순이가 초월적으로 귀여웠다면 <승리호>의 꽃님이는 초월적으로 사랑스럽다. 그리고 순이.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네버랜드와 원더랜드 사이 어딘가에서
<승리호>를 싫어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우주를 무대로 한 영상의 완성도는 한국영화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빼어나고 공간을 휘젓고 다니는 속도감은 경쾌하고 유려하다. 우주 쓰레기 청소선 승리호를 운항하는 승무원은 모자란 듯 꽉 차 알뜰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배우들의 연기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참 쉽고 친절하며 착하다. 조성희 감독의 영화가 언제나 그랬듯 <승리호>는 인간에 대한 믿음
'승리호'를 마냥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힘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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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옥 월드는 기본적으로 ‘집’을 빼앗는 자와 되찾으려는 자의 싸움이다.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인물들이 지닌 욕망의 궁극으로 그려진다. 이 세계의 입문작인 <아내의 유혹>(SBS)과 최근작인 <펜트하우스>(SBS)가 모두 부동산 투기로 부를 축적한 상류층 집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김순옥 월드를 향한 뜨거운 반응의 핵심에는, 갈 데까지 간 막장의 재미보다 부동산공화국 한국의 욕망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순옥 월드의 3단 진화
김순옥 월드의 역사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아내의 유혹>, <왔다! 장보리>(MBC), <황후의 품격>(SBS)이 각 시기의 출발점이다. <아내의 유혹>으로 시작된 김순옥 월드 1기가 복수 위주의 이야기라면, <왔다! 장보리> 이후는 기존 복수에 성공의 욕망이 더해지고, <황후의 품격>부터는 그 욕망의 서사가 블록버스
김순옥 월드의 종합판 '펜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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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페촐트가 ‘유령의 영화’를 만든다면, 유령의 역량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유령은 우리에게 정확히 무엇을 돌려주는가. 페촐트의 ‘유령’이 진부한 비평적 수사로 소화되기 전에 그 부분을 질문해보고 싶다.
토킹 픽처 혹은 영화의 훼손과 치유
전후의 베를린을 무대로 삼은 <피닉스>에서 주인공인 유대인 넬리는 얼굴에 큰 화상 자국을 남기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다. 영화 초반부에 그녀는 성형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지만, 원래 얼굴을 되찾는 대신 다른 얼굴을 가지게 된다(영화는 넬리가 찍힌 흑백사진을 어렴풋이 제시하지만 그녀의 원래 얼굴은 결코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넬리는 상처가 아물지 않은 얼굴로 남편 조니를 만나는데, 그는 넬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를 아내와 닮은 낯선 이로 착각한다.
수용소에서 넬리가 죽었다고 생각한 조니는 그녀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눈앞에 나타난 넬리에게 자신의 아내 역할을 요구하고 ‘에스더’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그로부터 넬리는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멜로드라마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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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영 앤 뷰티풀> 개봉 당시, 어느 인터뷰에서 프랑수아 오종은 “성매매에 종사하고자 하는 많은 여성들의 판타즘을 건드린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의 인터뷰어는 왜 하필 ‘욕망’과 연계되는지를 물었고, 이에 감독은 “섹스의 객체가 되는 것은 추정컨대 매우 분명한 무언가가 있는 경우다”라고 답했다. 한동안 나는 이 인터뷰 내용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두 가지로 그의 대답을 이해했다. 먼저 감독이 설명하듯 인물을 움직이게 만드는 감정의 속성 중에는 분명 ‘수동성의 부류’라 언급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다만 영화가 극단적으로 특정한 상황에 몰두하기에 이해가 난해할 따름이다.
둘째로 섹슈얼리티 자체가 간접적인 목적으로서 이를테면 추상적 ‘자본의 영역’에 귀속될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두 번째가 더 흔한 추론일 것이다. 하지만 <영앤 뷰티풀>의 캐릭터는 두 번째 추정에 대해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마린 백트가 연기하는 17살
프랑수아 오종의 '썸머 85'가 절망에 빠진 세계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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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테이크 숏이 인상적인 영화 두편이 올해와 지난해 초 우리 곁을 찾았다. 한편은 위기에 빠진 극장의 구원투수가 될 임무를 안고 달렸고, 다른 한편은 OTT 플랫폼의 품에 무난히 안겼다. 지켜지고, 지속되길 바라는 외침이 가득한 롱테이크 속에서 우리는 각자 무언가를 버틴다.
눈에 비친 희박한 공기
<그녀의 조각들>의 롱테이크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각들’이라 명시된 제목을 배반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의 조각들>은 롱테이크를 주된 형식으로 가져가기보다는 특정 장면에 두드러지게 사용한다. ‘왜 롱테이크로 보여주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가장 중요한 롱테이크 시퀀스는 마사(바네사 커비)의 출산이다. 출산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담긴다. 가정 출산을 결심한 마사가 느끼는 산통, 예정된 조산사 바바라와의 어그러진 약속, 그를 대신한 다른 조산사 에바(몰리 파커)의 등장, 병원에서의 분만을 권하는 남편 숀(샤이아 러버프), 침실에서 진행된 분만과
영화 '그녀의 조각들' 눈에 비친 희박한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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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켄트 감독의 <나이팅게일>에는 두개의 장르가 공존한다. 하나는 강간복수극이고 다른 하나는 서부극이다. 강간복수극 이야기를 먼저 하자. 이름에 속한 두 단어로 쉽게 정의될 수 있는 장르다.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배우자 또는 연인이 강간당한다. 주인공은 강간범들을 한명씩 최대한 잔인하게 죽인다. 20세기 중후반 여성 주도 액션물에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이 장르를 피할 수가 없다. 주연이 팸 그리어건 라켈 웰치건 가지 메이코건 여자주인공이 남자들을 살육하는 액션을 시작하는 동기로 거의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강간이 등장했다. 이 리스트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가이드를 따라 챙겨보다보면 한 없이 길어질 수 있고, 그 리스트의 총집합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가 바로 <킬 빌> 시리즈다. 현란한 액션과 재미에도 불구하고 <킬 빌> 시리즈가 갑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1960, 70년대 선정영화의 정서에 지나치게 충실해 발전 없이 그 안에 갇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
강간복수극과 서부극이 공존하는 '나이팅게일'이 택한 최소한의 윤리적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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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첫 영화로 무엇을 말할까 고심하다가 뒤늦게 이 영화를 만났다. 극장이 비어가는 가운데 변화하는 플랫폼 환경에서 발견한 작은 희망이다. <스위트홈>을 비롯한 화제의 시리즈도 재미있게 봤고 이에 대한 할 말도 많지만 아무래도 2021년의 첫 시작은 이걸로 하고 싶다. 그러니까 하고픈 말은, (어쩌면 이미) 죽었지만 (아직, 아니 영원히) 죽지 않았습니다.
사망잔데요, 사망은 안 했어요
우리는 마치 죽음이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오늘을 산다. 아니다. 이 글을 읽을 당신의 상황이 어떤지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으니 ‘나는’이라고 수정해야겠다. 죽음은 지위 고하, 삶의 형태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찾아오는 거의 유일한 자연의 섭리이지만 동시에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개인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내게 죽음은 막연한 공포였다. 죽고 난 뒤 모든 게 끝날 수도 있는데 어떻게 맨정신으로 살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 한번 잠이 들면 다시 깨지 못할 것 같아
영화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 사망잔데요, 사망은 안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