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회를 맞은 무주산골영화제는 지난해 상영작에 대한 비평적 지지를 확대하기 위해 처음으로 영화평론가상을 신설했다. 올해 영화평론가상은 김덕중 감독의 <에듀케이션>이 수상했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김보년, 김소희, 손시내 평론가는 영화제 이후 수상작을 포함해 오민욱 감독의 <해협>과 오정석 감독의 <여름날>에 대한 비평을 작성했다. <씨네21>은 젊은 평론가들이 한국 독립영화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펼치길 바라며 무주산골영화제가 보내온 평문을 공개한다.
김덕중 감독의 <에듀케이션>
<에듀케이션>을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는 마주 서 있는 두 사람을 그들의 옆모습이 나오도록 찍은 투 쇼트이다. 영화제 홈페이지나 포털 사이트에서 이 영화를 검색했을 때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스틸 컷에도 그러한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 해당 스틸 컷에서 영화의 두 주인공인 성희(문혜인)와 현목(김준형)은 어질러진 집 안에서 마주 서 있고 카메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수상작 비평 전문] 손시내 평론가의 <에듀케이션>
-
다른 사람에게서 나를 발견한다는 것, 혹은 타인의 사연에서 나의 내러티브를 읽어낸다는 것. 간단해 보이지만 그리 간단하지 않은 그 행위에 관해 생각했다.
팔 없는 포옹
박지완 감독의 <내가 죽던 날>의 중심 서사는 단 한줄로 요약된다. 형사인 현수(김혜수)가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실종자 세진(노정의)에게 감응한다. 세진에 대한 현수의 감정이 서사의 핵심이며, 이것이 설득력 있게 제시될 거라 기대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현수의 호소력 짙은 말이 감정을 설득하는 주된 요소다. 현수는 세진에게 감응하는 이유를 분명한 어조로 설명한다. 현수는 세진에게서 자신을 본다. 반면 영화에는 현수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다른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다. 관객 쪽에서도 납득할 수 있도록 현수의 시점을 시각적으로 적절히 보충하기 마련이나, 이같은 이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현수는 CCTV 속 세진의 얼굴에서 자신과 너무도 닮아 있는 표정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진과 현수가 실제로 비슷
'내가 죽던 날'이 누아르를 쓰는 방식
-
비교적 저예산인 독립영화에 (구)SM 아이돌이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면 감독이 덕후였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영화 중반, 배우가 싫어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오이를 김밥에서 빼주는 장면이 무심하게 나오면 더욱 그렇다. 여기에 시간을 빼앗기는 건 의미없는 일이다. 그럴싸하다고 다 그렇다는 법도 없고 맞다고 해서 별 의미는 없다. 어차피 우리에겐 당시 상황과 관련된 정보가 다 있지도 않다.
그래도 생각해보게 된다. 아이돌 활동 중에 생성된 팬덤에 속한 사람들이 영화감독을 시작해 이들을 캐스팅한다면 그 아이돌의 배우 경력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그 아이돌이 얼마 전까지 배우들에게 아주 최선의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회사 소속이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익숙한 갈등과 소동을 벗어나
어디로건 빠질 수 있는 일반론은 멀리 치우고 최하나 감독의 <애비규환>과 주연배우 정수정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정
'애비규환'은 어떻게 악역과 갈등 없이 이야기를 봉합했나
-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근래 개봉한 한국 상업영화 중에서 여성 캐릭터를 비교적 다채롭게 구축하고 있는 편에 속한다. 수학 천재와 오지랖, 까칠한 현실주의자의 조합은 익숙하지만 여성의 몸으로 구현된 캐릭터를 스크린에서 만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아가, 세간의 평처럼 이 영화를 ‘여성 승리의 서사’를 다룬 작품이라고 평하기에는 어딘가 미심쩍은 지점이 있다. 굳이 여성영화에 관한 해묵은 정의를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나는 이 작품이 여성들을 통해 쾌감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묘하게 기만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이 영화를 두고 여성의 승리를 언급해도 좋은가. 그 점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지탱하는 서사의 축은 상업 고등학교 출신의 말단 직원들이 삼진그룹 경영진의 흑막을 밝혀 회사를 지키는 과정이다. 그러나 중심 서사와는 별개로 이 영화의 지배적인 쾌감은 얼핏 약하게 보이는 여직원들이 ‘센 상대’인 남성 경영진을 상대로 승리를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보여준 놀이의 쾌감에서 부족한 것은
-
-
오랫동안 태인(유아인)을 바라보던 영화가 블랙아웃된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이 잠깐 떠올랐다가 태인과 등장인물들의 한때 행복했던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에필로그로 이어진다. ‘블랙아웃-에필로그’ 방식은 여러 영화들이 영화를 마무리하며 활용하는 익숙한 방식이다. 그러나 <소리도 없이>에서만큼은 이 방식이 다른 감상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영화의 중반쯤 등장하는 즉석카메라로부터 비롯된다. 초희(문승아)의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 창복(유재명)은 즉석카메라를 준비해온다. 그런데 창복과 태인이 카메라 작동법을 알지 못하자 초희가 직접 나서서 즉석카메라의 작동 원리를 알려준다. “원래 처음엔 까매요. 좀 있으면 사진 보이거든요.”
<소리도 없이>의 엔딩 방식은 즉석카메라의 원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홍의정 감독이 태인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숨을 헐떡거리며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을 찍었더니, 잠깐 까매졌다, 한때의 행복했던 추억이 현상(現像)된다. 그러나 이 추억이 행복한 것
'소리도 없이'가 유괴 사건을 다루는 방식은 적절한가
-
내게 중국영화는 지아장커에 멈춰 있었다. 넷플릭스를 통해 한동안 보지않던 중국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먼 훗날 우리>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등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영화가 너무도 많은 것을 잊고, 잃고 있음을 깨달았다. 멜로드라마적 각성.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기
2018년 중국에서 개봉한 <먼 훗날 우리>를 넷플릭스를 통해 뒤늦게 관람하면서 20여년 전 <8월의 크리스마스> <박하사탕> <파이란> 등 한국 멜로드라마를 보며 눈물 흘리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먼 훗날 우리>는 지금 한국영화에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정서와 문제의식이 지금의 중국에는 현재의 것으로 되돌아와 있음을 보여준다. 잃어버린 것, 되돌릴 수 없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지만, 불가항력적인 시간의 힘 앞에서 무력하게 눈물짓는 멜로드라마의 인물들은 어느덧 한국영화에서 사라져버렸다.
중국영화 '먼 훗날 우리'가 불러일으킨 반성적 향수
-
누군가는 클래식한 이탈리아 모던시네마의 한 사례로 받아들일 것이다. 누군가는 영화 이미지와 필름의 물질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기묘한 사례로 받아들일 것이다. 후자의 관점에서 생각을 떠올려봤다.
누구의 것도 아닌
장 뤽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에는 “국가의 환상은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개인의 꿈은 둘로 서 있는 것이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고다르의 견해는 하나의 원리로 작동되기를 바라는 세계 자본주의와 국가, 그리고 그 안에서 둘 이상의 이미지를 결합하며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영화를 향하고 있다. ‘세계화’란 결국 그런 것이다. 단일한 원리로 통합되는 국가란 개인들의 차이가 각인되지 않는 세계, 낯선 결합을 일으키지 못하는 세계, 그러므로 영화-이미지가 없는 세계를 구축한다. 노년의 고다르가 쇠약한 육체와 목소리로 “지구는 병들어 있다”(<이미지 북>)라는 말을 내뱉게 되는 것은 예견된 사태일지도 모른다. 질병을 앓는 상태 자체가 문제시되는 것
'마틴 에덴'이 영화 이미지와 필름의 물질성에 대해 던지는 질문
-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홍의정 감독이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를 의도적으로 인용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다리를 저는 창복(유재명)과 어수룩하고 무기력한 태인(유아인)을 보자마자 이청준이 내가 태어날 무렵에 쓴 소설을 떠올렸다. 이청준이 은유적으로 쓴 제목을 그들은 육체에 그대로 뒤집어쓴 채로 스크린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청준의 인물이 지식인으로서 과거의 정신적 상처를 고도의 지적인 행위를 빌려 드러내고 치유하려고 애쓰는 것과 비교해, 과거의 역사를 육체 위로 새겨둔 창복과 태인은 현실의 굴레 아래 사는 노동자다. 홍의정이 각본을 쓰고 메가폰을 잡은 데뷔작에서 눈길을 준 대상은 수십 년 전, 혹은 현재의 지식인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 매일 매일 살려고 버티는 하층민이다.
창복과 태인은 범죄자이면서 노동자다. <소리도 없이>에서 범죄는 분업화돼 실행된다. 머리를 짜 기획하는 자가 있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가 있으며, 성과의
'소리도 없이'의 선택 없는 결과에 대하여
-
이 글은 <여성, 영화사>에 관한 본격적인 비평이기보다는 다양한 영화 클립으로 채워진 아카이브 영화 관람기 혹은 비평을 위한 사전 작업의 흔적에 가깝다.
클로즈업과 목소리의 영화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중 단연 눈길을 끈 건 마크 커즌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여성, 영화사>(2019)이다. 장장 840분에 달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여성감독의 영화를 재료 삼아 40여개의 주제를 탐구한 로드무비다. ‘영화사’라는 제목과 840분이라는 방대한 분량은 장 뤽 고다르의 <영화사(들)>(1997)를 연상시킨다. 영화사를 쓰는 동시에 해체하는 고다르의 작품은 마치 영화를 관람하는 인간의 두뇌에서 일어날 법한 기억과 망각의 투쟁을 상연하는 것처럼 보였다. 불규칙하게 명멸하는 고다르식 영화사와 달리 커즌스는 명확한 규칙성을 지닌 채 개별 영화를 공들여 소개하는 쪽에 가깝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영화들이 관객에게 일단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여성, 영화사' 조각난 영화를 체험하는 일에 관해
-
<헤븐 노우즈 왓>은 할리(아리엘 홈스)와 일리야(케일럽 랜드리 존스)가 서로를 보듬고 입을 맞추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곧바로 그 위에 할리의 울음소리를 얹으며 상황을 전복시킨다. 이어지는 신에서 일리야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할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할리는 그런 일리야 곁을 맴돌며 용서를 구한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벌써 죽었겠다!” 자신이 죽으면 용서하겠냐는 할리의 말을 무기 삼아 일리야는 결국 할리가 손목을 긋게 만든다. 여기서 작은 균열이 생긴다. 영화가 처음 보여준 둘의 애틋함은 환상이었나? 할리는 왜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사랑을 증명하려 하나? 손목을 치료하고 나온 할리는 옷을 꿰매야 한다는 일리야의 말에 아둔한 손짓으로 바늘에 실을 꿰려 애쓴다. 저렇게까지 헌신하는 이유가 뭘까.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그 답을 이야기하고,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관객은 의문을 품은 채 할리를 따라가게 된다.
질주보다 방랑에 가까운
사프디 형제의 2014년작 <
사프디 형제의 '헤븐 노우즈 왓'이 결핍과 욕망을 다루는 방식
-
소희(이정현)는 지나치게 완벽해 거의 인간 같아 보이지 않았던 남편 만길(김성오)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해 흥신소 소장 닥터 장(양동근)에게 뒷조사를 의뢰한다. 조사 결과를 보니 만길은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희의 목숨을 노리고 있고, 더 알고 봤더니 지구를 정복하러 온 외계인 언브레이커블 집단의 일원이다. 소희는 어쩌다 만난 고등학교 동창 세라(서영희), 양선(이미도)과 반격에 나선다. 하지만 이름값 하는 남편은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다.
신정원 스타일이란 무엇인가?
신정원 감독의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은 쌈마이 영화다. 처음부터 대놓고 유치하려고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유치하다고 지적하는 건 비난이나 욕이 되지 못한다. <점쟁이들>이 나왔던 2012년 이후 신정원의 신작을 기다렸던 관객도 ‘웰메이드’ 어쩌고를 기대했던 건 아니다. 그런데 신정원의 영화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뭔가? 유치함은 아니다. 유치해도 되지만 꼭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이 재미있는 코미디영화 그 이상이 되지 못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