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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매드랜드>의 펀(프랜시스 맥도맨드)이 자동차에서 살기 전 머물렀던 곳은 엠파이어라는 이름의 마을이다. 이 마을의 주 수입원은 유에스집섬(USG)이라는 석고를 생산하는 회사다. 이 회사가 건축 재료인 석고보드를 생산한다라는 사실과, 주택건설 경기에 영향을 받아서 이 회사가 파산한 후 펀이 자동차에 살고 있다는 영화의 설정은 <노매드랜드>가 ‘집’과 관련된 영화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펀이 살던 마을은 이제 폐허로 변해버렸다. 유에스집섬이 서브 프라임 금융 위기 속에서 파산하고, 이 회사가 수입의 전부였던 마을은 회사와 함께 지도에서 사라져버렸다. 심지어 우편번호마저 삭제되었다. 하지만 죽은 남편과 함께했던 장소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펀은, 밴에서 살면서 자신이 살던 지역을 맴돌고 있다. 자신들이 살던 아파트가 철거된다는 소식에 환영 플래카드를 거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펀에게 장소는 기억과 동일하고, 장
'노매드랜드'에서 펀의 자동차가 집이 되어가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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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를 말할 때 형식이나 스타일에 집착하다보면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다. 지난해에 본 <바쿠라우>부터 올해 아카데미의 화제작 <미나리>와 <노매드랜드>까지 내겐 모두 변형된 서부극으로 다가왔다. 이민자와 이방인들이 이제 와서 서부극의 정서에 매료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늘 외로움에서 탈출하고 싶은 나에게, 고독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싶은 또 다른 내가 말을 건다.
순수로의 회귀, 초기 서부극에 대한 매혹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달리는 차가 있다. 아무도 없는, 얼어붙은 풀밭에서 한 여성이 초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소변을 보던 여성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자신의 차로 돌아가기까지, 대략 25초가 넘는 시간 동안 카메라는 멀리서 이를 지켜본다. 이윽고 짧고 건조하게 지나가는 타이틀.
<노매드랜드>의 오프닝 시퀀스를 보는 순간 몇 가지 생각들이 다른 방향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길은 물리적으로 갈라지지 않고 곧게
'노매드랜드', 뉴 웨스턴의 파도는 어디까지 당도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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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필름 위에 빛으로 새겨낸 역사의 한 페이지. <동주>의 성공 공식을 <자산어보>에서 다시 꺼내든 이유는 무엇일까? <동주>를 시작으로 <박열> <변산>까지 이준익 감독의 연이은 작품들은 ‘청춘 3부작’이란 카테고리로 묶인다. <자산어보>도 그 명맥을 잇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준익 감독은 왜 청춘을 재현하는 데 집중하는가? 특히 역사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말이다. 이준익 감독이 역사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바라본 청춘들이 스크린에 맺힐 때, 그것이 동시대 청춘들과 조우할 가능성이 열릴까?
이러한 질문은 <동주>부터 차곡차곡 쌓여 의문의 형태로 <자산어보>에 이른다. <동주>와 <박열>은 색상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방식을 추구한다. 정확히는 <박열>이 <동주>의 성공 공식을 답습한다. <동주>는 나머지 작품들에 비해 가장 탁월하다. 암흑 같은
<자산어보>와 이준익의 ‘청춘 3부작’이 청춘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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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가 너무 갑갑한 마음에 몇번이나 한숨을 쉬다가 고개를 돌려 그 상황을 외면했다. 부끄러웠다.
고통을 마주하는 고통
<아이카>에 대한 리뷰에서 오진우 평론가는 “아이카를 짓누르는 여러 가지 조건들은 관객에게 피로감을 선사한다. 이때의 피로감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이는 영화가 끝에서 던지는 질문과 결부된 감각이다”라고 썼다. 오진우의 이 문장은 과장이 아니다.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보려 발버둥치는 주인공 아이카(사말 예슬랴모바)를 짓누르는 육중한 삶의 무게 앞에서 탈진할 것만 같은 감각에 사로잡히는 것은 <아이카>에 대한 윤리적 반응이다.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 감독은 그 감각이야말로 고통받는 한 여인의 삶을 바라보는 관객이 응당 감당해야 할 의무라고 믿는다. 바라보는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그 무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니, 벗어나려 해서는 안된다.
강제된 선택을 거부하는 선택
이제 막 병원에서 아이를 출산한 여인이 화장실 창문으로 도망친다.
'아이카' 보는 자의 윤리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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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초반부에 사토코(아오이 유우)는 남편 유사쿠(다카하시 잇세이)에게 말한다. “당신은 언제나 나보다 멀리 보고 있어요.” 예사로운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꽤나 인상적인 부름이다. 이야기 내부의 단서들로 이 말의 표면적인 의미를 유추해보는 건 어렵지 않다. 유사쿠는 사토코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눈앞에 보이는 세계 바깥을 향해 시선을 둔다. ‘코즈모폴리턴’을 자처하는 사업가인 그는 만주에서 일본군의 생체실험 일지와 기록 필름을 목격했으며, 그 거대한 전쟁범죄의 증거가 담긴 필름을 밀반입한 뒤 미국으로 떠나 폭로할 계획을 세운다.
영화 절반이 지나갈 동안, 정확히 말하면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 도달할 때까지 사토코는 유사쿠의 심리적 궤적에 대해, ‘자신보다 멀리’ 보는 그의 시선이 정확히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이런 미묘한 시선의 불일치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필름에 새겨진 영상을 본 사토코가 급격한 심리적 변화와 결단을 감행해 유사쿠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스파이의 아내'는 어떻게 밀도 있는 실내극을 완성해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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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브랜던 크로넨버그의 <안티바이럴>(2012)은 조작된 혈액과 세포로 다른 인간과 연결되려는 시도에 관한 이야기다. 흥미로운 소재였으나 이야기가 겉도는 끝에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 느낌을 줬는데,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 <포제서>는 주제와 연출 면에서 훨씬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 아버지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1983)이나 <엑지스턴스>(1999)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서, 기계와 인간의 결합은 단계를 더 나아갔고, ‘왜 인간은 기계와 결합되기를 원하는가’, ‘인간과 기계의 결합은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또는 ‘인간과 기계는 어디까지 결합하는 게 가능한가’ 등의 질문을 던지게 한다. 질문 속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현실이라는 단어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와 아들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연결함과 동시에 갈라놓는다.
<비디오드롬>과 <엑지스턴스>에서 인간과 기계가 결합해 진입하는
브랜던 크로넨버그의 '포제서'를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와 나란히 놓고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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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는 무수한 거리들이 있다. 의도된 것과 인식되는 것 사이의 거리.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사이의 거리. 보는 것과 인식하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의 거리. 느껴야 하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의 거리. 그 모든 거리의 거리의 거리에 관해.
아이, 게이 그리고 양
한국 멜로영화가 실종되었다는 표현은 분명 과장이다. 그렇다 해도 멜로영화가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멜로의 위기는 장르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승리호>에 대해 ‘그래도 멜로로 빠지지는 않았다’며 긍정하는 반응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서사의 흐름 속 멜로는 피해야 할 클리셰로 인식된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애 멜로에 한정된 이야기다.
논의의 초점을 퀴어 멜로에 맞추면 사정은 달라진다. 2016년은 한국 멜로영화를 이야기할 때 기억해야 할 해다. <아가씨> <연애담> 등 레즈비언 멜로와 함께 <아수라> 등 동성 군집 영화가 퀴어의 맥락에서 해석되
'정말 먼 곳'의 거리두기가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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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는 매우 좋은 영화지만 할 말이 많은 영화는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맑고 투명하며 정직해 보였고, 영화의 국적부터 의미까지 이미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온 탓도 있다. 하지만 막상 걸음을 떼고 보니, 내가 가진 언어의 역량으로 포획하기 힘든 장면들이 너무 많다. <스파이의 아내>를 비롯해 최근 부쩍 그런 영화들이 극장에 걸려 괴롭고, 행복하다.
경외하길 멈추고 기억하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어둠 속에서 덜거덕거리며 달리던 마차 소리가 들리다가 다음 순간 그 소리는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신기한 망각의 세계로 빠지고 만다. 그날 밤에 느꼈던 감정들은 너무도 생생해서 손만 뻗으면 어루만질 수 있을 정도였다. (중략) 이제 나는 바로 이 길이 우리를 다시 연결시켜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든, 우리는 말로는 전달이 불가능한 그 소중한 과거를 함께 소유하고 있었다.” (윌라 캐더 저, <
'미나리'의 세 가지 결정적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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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복수극이라는 장르에 대해서는 제니퍼 켄트의 <나이팅게일>에 관한 글에서 한번 이야기했으니 이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두 가지만 추가하기로 하자. 하나, 일단 장르가 형성되면 작품이 이 틀에서 벗어나기가 극도로 힘들다는 것. 둘, 관객은 이 소재를 다룬 모든 영화를 장르의 틀 안에 넣어보게 된다는 것.
에메랄드 페넬의 <프라미싱 영 우먼>의 이야기를 맺는 후반부도 이 영화가 강간복수극이고 관객이 이 장르의 규칙 안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장르가 고정된 상태에서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겨우 셋이다. 하나, 주인공은 앞에 선언한 복수에 성공한다. 둘, 주인공은 복수에 실패한다. 셋, 주인공은 복수에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성공했다.
영화 후반의 서스펜스는 영화가 이들 중 어느 것을 선택했을지 관객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관객은 1번의 가능성이 사라진 뒤로는 3번이길 바라지만 2번일 가능성은 의외로 높다. 수많
'프라미싱 영 우먼'이 강간복수극 장르의 규칙 안에서 택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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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하고 유려하다. 영화 <미나리>는 삶의 다른 가능성을 찾아 나선 이민자 가족의 역경을 다룬다. 대부분 한국어로 진행되지만 감성적으로는 만국어로 통역 가능할 보편적인 정서를 펼쳐낸다. 미국 제작 영화임에도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된 것은 비영어권 언어가 준 이질감 탓이 크다. 이 영화가 폭넓은 감응을 일으키는 지점은 고립된 인간들의 관계성에 주목한 점에 있는 듯하다. 교회와 병원과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아칸소 시골의 이동식 주택에 한인 가족이 이주해 온다. 주위엔 마을이라 할 만한 공동체가 없다. 가족은 온전히 그들끼리 삶을 감당해야 한다. 물과 불은 자연이 주는 운명적 고난이며, 병약함과 노쇠는 인간적 가냘픔을 드러낸다.
병아리 감별이라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노동을 하고 물길을 내어 농장을 일구는 일상 속 곤란은 대부분 좁은 이동식 주택 내부 가족 사이의 미묘한 갈등으로 드러난다. 과장하지 않고 덤덤히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으나 냉소적이지 않으며 그윽하고 깊다. 어
'미나리'의 탈국경적 영화 경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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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특별전에 젊은 관객이 꽤 많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라떼는 말이야’라고 빈정거리면서 우리 세대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원천봉쇄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 시절 우리를 매혹시켰던 왕가위 영화를 보겠다고 달려든다. 라떼는 말이야, 라며 코아아트홀에서 왕가위 영화 보던 시절을 이야기하면 좋아하려나?
다시 오지 않을 날들을 위한 연가
왕가위의 영화는 표면적 장르가 무엇이든 간에 궁극적으로는 멜로드라마로 수렴된다. 그렇다고 그의 영화를 단순히 멜로드라마라고 부른다면 그것만큼 그의 영화적 세계를 시시하게 만드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서사로만 본다면 왕가위는 멜로드라마에서 그 뼈대만 빌려온다. 좋게 말하면 과감한 생략으로 그 빈틈에 대한 해석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앙상하고 상투적이다 못해 구식의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왕가위는 그 앙상함이 풍요롭게 보이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감독이다. 느릿하게 돌아가는 선풍기가 무기력하고 나른한 오후의
‘사랑에 대한 영화’라는 왕가위의 말이 의미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