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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보며 느낀 첫인상은 영화가 ‘예쁘다’는 것이었다. 미추의 개념에서 비롯된 아름답다는 느낌이라기보단 귀여움이라거나 흐뭇함쪽에 가까운 마음이었던 것 같다. 매력적인 주인공 찬실(강말금),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여러 인물들, 그녀가 오가는 여러 장소들, 시네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품들과 대사들…. 무엇 하나 비뚤어진 것이 없게 느껴질 만큼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엔딩 시퀀스까지 보고 난 후 오프닝을 떠올려보니 새삼 이 영화의 기저에 전혀 다른 정념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실은 왜 눈물을 흘렸을까
높은 볼륨의 쇼팽의 <장송 행진곡>과 함께 시작하는 영화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갑작스러운 죽음을 포착한다. 그 죽음은 다름 아닌 찬실이 수년간 프로듀서로 일했던 지 감독(서상원)의 죽음이다. 물론 죽음으로 시작하는 영화들은 많다. 혹은 이 영화를 하나의 성장 서사로 받아들인다면, 주인공의 기존 세계나 과거를 상
'찬실이는 복도 많지'와 할머니의 집이라는 공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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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워터스>의 스크린에선 카메라가 수평이동하는 경우가 잦다. 유난하다 싶을 정도다. 쓰임새도 다채로워 ‘수평 트래킹의 뷔페’라 일컬어도 됨직하다. 토드 헤인즈의 카메라가 왜 이리 자주 트랙을 타는 걸까. 고다르가 뜻한 것처럼 카메라가 옆으로 움직일 때 소실점은 끊임없이 바뀐다. 삼각대 위에 멈춰 있을 때 한개의 소실점만 갖는 카메라는, 그렇게 트랙 위에서 자신의 숙명을 넘어선다. 1인칭 시점만으로는 온전히 담을 수 없는 시각적 진실. 이동하는 렌즈는 시시각각 초점 대상을 바꾸며 사태의 실체에 다가서려 안간힘이다. 여기까지라면 수평 트래킹에 대한 고전적 정의일 수 있겠다. 토드 헤인즈 감독과 에드워드 래크먼 촬영감독의 횡적 움직임에는 추가되는 것이 있다. 눈앞의 피사체들에 의해 자꾸만 저 먼 곳이 가려지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 얹어진다. 오프닝숏을 비롯해 숱한 장면들에서, 이동하는 카메라 바로 앞 사물들은 화면을 몽땅 가렸다가 겨우 프레임 밖으로 나간다. 카메라가 멈춰 있
'다크 워터스'가 보통 사람들의 전쟁을 말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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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엇을 위해, 무슨 자격으로 영화를 감히, 비평하는 것일까. 이 잉여롭고 비생산적인 작업을 시작한 지 어느덧 10년째지만 여전히 헤매고 있다. 때론 몸살에 걸린 듯 온몸이 아팠고 그 진통을 믿으며 글을 끄적여보기도 했지만 한번도 만족스러웠던 적은 없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나면 참을 수 없기에, 쓴다. 감히 영화비평의 최전선에서 뒹굴어보겠다는 무모한 심정으로 김소희·김병규·안시환 평론가와 함께 프런트 라인에 섰다. 재난(disaster)은 그리스어로 ‘별’(aster)이 ‘사라진’(dis) 상태를 뜻한다. 여전히 헤매고, 숱하게 구르고, 끊임없이 실패하겠지만 별을 향한 우리의 방황을 지켜봐주길 바란다.
재난에 얽힌 세 가지 풍경
마음을 다지고 최전선에 섰더니, 영화가 사라졌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이 외출을 삼가고 있는 요즘 기묘한 사진 몇장이 눈에 들어왔다. 텅 비어버린 뉴욕의 타임스스퀘어 광장, 사람이 사라져 물이 맑
영화가 사라진 자리에서 영화를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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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을 겸업하는 배우들은 대개 스타 출신으로 기억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로버트 레드퍼드, 케빈 코스트너, 멜 깁슨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을 연출해 감독상까지 거머쥔 인물들이다. 21세기 들어 일어난 현상은 다르다. 지금은 감독으로 성공하기 위해 꼭 배우의 이름을 걸 필요가 없는 시대다. 2016년, 17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스포트라이트>와 <문라이트>를 각각 연출한 톰 매카시와 배리 젠킨스는 배우로 경력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흥행작쪽으로 오면 연출로 성공한 배우들이 여럿 보인다. <겟 아웃> <어스>의 조던 필,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존 크래신스키, 그리고 <인시디어스3> <업그레이드>의 리 워넬이 그들이다. 모두 배우로서 이름을 각인시키지는 못한 경우다. 워넬은 <쏘우> 시리즈의 각본과 기획에 참여하면서 제임스 완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다 영화사 ‘블룸하우스’의 주력 연출가로 떠올랐
'인비저블맨'의 공포의 근원을 숙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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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희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존경하는 영화감독과 함께 좋아하는 영화를 만드는 데 모든 것을 바쳤던 찬실(강말금)이 감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마주하게 된 현실을 암담하고 비극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솔직하고 코믹하게 다룬 영화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영화는 숫자가 아니야! 영화는 별 하나, 별 둘도 아니야! 영화는…”이라는 목소리로 시작한다. 이어서 영화감독과 스탭들이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면서 술 마시는 뒤풀이 장면을 보여준다. 갑자기 감독이 쓰러지고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는 찬실의 모습에서 제목 타이틀이 뜨면 화면이 옆으로 늘어나면서 4:3의 화면비가 16:9로 바뀐다. 이 오프닝이 흥미롭게 느껴졌던 것은 마치 비디오테이프의 죽음을 예언하는 것처럼 묵직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시작한 영화가 정작 보여주는 장면은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잠시 후 감독이 가슴을 움켜쥐면서 테이블로 쓰러지는 장면
영화를 향한 사랑과 응원의 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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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 소닉>의 영화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디자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의 첫 번째 예고편은 일본 게임 디자인과 할리우드 영화 디자인의 관점이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는 거의 모범적인 사례였다. 아니, ‘다르다’ 대신 ‘틀렸다’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소닉의 새 디자인은 예고편 공개 이후 끔찍한 역풍을 맞았다. 영화사에서는 개봉일을 뒤로 미루고 소닉을 새로 디자인한 뒤 이 캐릭터가 나오는 모든 장면의 CG 작업을 다시 해야 했다. 이 말도 안되는 일을 한 건 MPC 밴쿠버의 CG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악명 높은 <캣츠>의 CG도 맡았고, <캣츠>의 경우는 개봉 이후에도 수정작업을 해야 했다. 이 두 영화의 작업이 끝난 뒤 회사는 문을 닫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모두 이들이 맞은 잔인한 운명에 마음이 찢어져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고장나지 않은 것은 고치는 게 아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가
<수퍼 소닉>이 보여준 게임 원작 영화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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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미상>의 주인공 쿠르트(톰 실링)는 전후 독일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투영한 인물이다. 리히터는 사진을 캔버스에 그대로 모사한 뒤, 넓은 붓으로 다시 뭉개서 흐릿하게 만드는 기법인 ‘포토페인팅’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다큐멘터리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회화>가 리히터의 2009년 추상 시리즈에 초점을 맞췄다면, 〈작가 미상>은 그가 1960년대에 제작한 포토페인팅에 주목한다. 그리고 나치 시대를 위시한 독일 격동기와 쿠르트의 개인사를 통해, 역사적 사건과 개인적 경험이 어떻게 그의 작품에 녹아들었는지 면밀히 살핀다.
영화는 포토페인팅의 기원을 말하기 위해 쿠르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두려움에 찬 쿠르트가 자기 손으로 눈앞을 가릴 때마다, 엘리자베스 이모(자스키아 로젠달)는 그에게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했다. 그가 손을 내린 자리엔 언제나 흐릿한 대상만이 존재했다. 쿠르트는 이러한 유년기의 경험을 화폭에 옮겨 형태가 흐릿
<작가 미상>이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삶과 예술을 그려내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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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번셔 연대의 무모한 돌진을 중지시킨 스코필드(조지 매케이)가 블레이크(딘 찰스 채프먼)의 형을 찾아 야전병원 막사에 당도하는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몰입을 압박하던 서스 펜스와는 분리된 감정이 영화 바깥에서 침투해 들어왔다 해도 좋겠다. 막사 저 멀리 희미하게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을 때부터 스코필드의 서성이는 걸음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내심 아니길 바라면서도 저 노골적인 수미쌍관의 장소가 스코필드의 여정이 마무리될 지점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코필드가 막사를 둘러보는 순간부터 기이한 움직임이 감지된다. 영화 내내 스코필드에게 밀착해 있던 비현실적인 카메라가 문득, 아니 거의 유일하게 스코필드에게서 잠시 떨어져 홀로 어디론가 향해 날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스코필드가 환자들의 침대를 빙 둘러가는 사이 카메라는 부상자들로 가득 찬 침대 위를 지나 막사 중간을 관통하듯 직진한다.
스코필드의 동선과 분리된 카메라의 목적지는 당연히 저 멀
<1917>의 ‘영화적 체험’을 의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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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프디 형제의 <굿타임>(2017)에 대해서 이용철 평론가는“<굿타임>은 달릴 때보다 멈춰 설 때가 더 많은 영화”라고 비평했고, 나는 리뷰에서 이렇게 썼다. “코니(로버트 패틴슨)는 미친 듯이 질주하지만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르기에 뱅글뱅글 맴돈다.”
그런 영화들이 있는 것 같다.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것 같은데,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다시 출발점에 서 있는 영화. 봉준호의 영화가 그렇다. 봉준호의 영화는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영화이며, 어리석은 자들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자들이다. 이러한 개인의 부조리는 부조리한 세계와 공명한다.
이런 영화들을 카프카적인 영화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카프카의 <소송>에서 기소당한 요제프 K는 자신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변신>도 마찬가지다. 카프카의 소설은 주인공의 시점에서 세계를 보기 때문에 세계의 부조리는
<언컷 젬스>가 인물과 세계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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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에 관한 상찬은 대개 영화의 기술적 시도에 한정된다. <1917>은 촬영본을 이어붙여 관객이 단절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 컨티뉴어스 숏’ 기법을 통해 영화 전체가 하나의 숏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기술적 시도에 관한 언급이나 나열에 그칠 뿐, 그것이 왜 성과인지를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보다 미심쩍은 건 기술에 관한 언급 뒤에 따라붙는 체험의 영화라는 수식이다. 영화는 과연 21세기적 엔터테인먼트 체험으로 관객을 유도하는가. 도리어 시각에 매몰된 고전적 관람 경험으로 관객을 이끄는 쪽에 가깝지 않은가. 영화의 연속성은 어딘가 관객의 투지를 자극하는 데가 있다. 잠시 어떤 관객의 사례를 가정해보자. 그는 숏이 정말로 끊어지지 않는지에만 신경이 곤두서 있다. 그러던 중 카메라가 인물과 위치를 바꾸는 결정적 전환의 순간을 놓치고 만다. 이후 그는 영화를 어떻게 촬영했을까를 상상하며 영화를 본다. 그러나 카메라 뒤 인간의
<1917>에서 숏의 지속을 목격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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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은 감독 중 하나였다. 현란한 색감과 다감한 정서, 정신없이 몰아치는 사건과 한마디 대사로도 급변하는 갈등 구조. 시각적으로나 서사적으로 그의 영화는 과도하게 역동적이었다. 그 과도함이 누군가에게는 강력한 유혹이 되었고, 누군가에게는 거리를 두게 했다. 솔직히 그의 초기작에 대해 나는 후자에 가까웠다. 가까이하기에 너무 소란스러운 당신이었다. 난장판 소극 같던 초기작을 벗어나 <라이브 플래쉬>(1997)를 기점으로 알모도바르의 작품은 정제되어갔다. 소동은 갈등으로, 욕정은 욕망으로 깊이를 확보해갔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는 여전히 완벽히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폭력적인 집착이나 헌신의 탈을 쓴 맹신이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 스며들었으며, 윤리적인 딜레마들이 감상적이고 비약적인 결말과 함께 황망히 남겨지기도 했다. <욕망의 낮과 밤>(1989)이나 <라이
<페인 앤 글로리>에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고백한 고통과 영광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