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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추리영화로 받아들이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만족도가 달라지는 영화다. 이 영화는 퍼즐을 맞춰가듯 단서를 하나하나 엮어서 답을 찾아내는 영화가 아니다. 샘(앤드루 가필드)이 사라(라일리 코프)를 찾아나서는 과정은 우연과 우연의 만남이 만들어낸 신비의 연속으로 메워져 있다. 샘은 우연히 사람들을 만나 우연히 단서를 얻고 우연히 파티에 참여해 우연히 힌트를 찾는다. 음모론과 미스터리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샘의 의식의 흐름대로 영화는 자꾸만 새로운 음모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또 다른 미스터리를 뒤섞는다. 그 흐름을 좇아가다보면 샘이 마주친 인물과 사물과 공간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너무 복잡하고 질서가 없다’는 불평을 듣는다. 그런데 나는 그 불평 자체를 감독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이 의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를
<언더 더 실버레이크>가 보여주는 우리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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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아카쉬(아유쉬만 커라나)는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이지만, 사실 그는 눈이 안 보이는 척 연기하고 있다. 음악에 집중하겠다는 핑계로 시작된 거짓말이지만, 점차 혜택이 많아져서 차마 그는 그만두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거짓말들은 행운과 연관되어 있다. 일과 사랑, 심지어 일상적 공간까지 전부 그 거짓이 지탱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아카쉬가 시력을 잃는다. 운 나쁘게도 시미(타부)가 남편을 살해한 현장을 그가 목격해서 보복당한 것이다. 포스터에서 드러나듯이 둘은 천적 관계이다. 아카쉬는 ‘알지 않아도 될 것’을 안 대가로 시력을 잃고, 시미는 ‘의도를 가지고 행동’했지만 실패한 탓에 눈을 결박당한다. 힘의 강약과는 별개로 그들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만일 아카쉬가 없었다면 시미는 연쇄살인마가 되지 않았을 테고, 반대로 시미가 없었다면 아카쉬는 소피(라디카 압테)와 행복하게 연애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이들의 관계는 그 자체로
‘5명의 시나리오팀’이란 구조가 만들어낸 <블라인드 멜로디>의 참신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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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가 궁극적으로 슬픈 이유는 시간 때문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하고 소멸하게 한다. 사랑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랑도 낡게 되고, 진부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이 영원할 거라 믿고 싶어 한다. 그런 믿음이 없다면 사랑을 시작하기는 힘들 것이다. 언젠가 사랑이 모두 끝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것. 이 모순적인 믿음이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 삶이라는 것도 언젠가는 모두 끝나버릴 허무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유열의 음악앨범>에는 이런 모순과 불화가 있다. 말하자면 리얼리즘과 백일몽의 불화다. 영화는 개연성을 설명해야 하는 자리에 구멍을 내고 그곳을 드라마의 클리셰로 채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것이 다분히 의도적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관객에게 이유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감정을 전달하는 데 더 중점을 두는 것이다. 마치 “왜 나를 사랑해?”라는 질문에 “너
<유열의 음악앨범>이 사랑을 기억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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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적극적으로 영화를 본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이미 결정된 일정한 틀을 사후적으로 따르게 된다. 장면 a가 b를 설명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 명확할 때, 우리는 a를 순수하게 기억하기를 포기하고 b라는 의미만을 좇으며 그것으로 영화를 보았다고 믿는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장면의 의미를 흐릿하게 지워놓으면서, 매 장면을 그 자체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은희(박지후)가 두드리는 문은 끝내 열리지 않는다. 알고 보니 그것은 잘못 찾은 문이었다. 이 시퀀스는 은희가 문을 헷갈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해도 열리지 않는 문과 미칠 것 같은 발광 자체를 받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은희가 귀가하는 장면은, 앞선 상황이 전제된 이상 더는 평범한 것일 수 없다. 문을 잘못 찾은 상황은 특수하고 예외적일지 모르나, 그것은 어떤 것의 본질에 더 가깝다. 영화는 가장 예
<벌새>, 시간의 벌어진 틈 사이 도래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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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염려와 불안에 마음을 졸여도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 밥을 먹는다는 것, 잠을 잔다는 것. 어른도 아이도 순전히 오롯한 그 행위만으로 힘을 얻고 새날을 살아가게 된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이 개봉했다. 다양한 관객층의 호평을 받았던 전작 <우리들>(2015)에 이은 두 번째 장편영화이자 <사루비아의 맛>(2009)이나 <콩나물>(2013)에서처럼 아이들, 특히 소녀들의 세계를 다사롭게 바라본다는 점에서 윤가은 세계의 확장편이다. 벌써부터 ‘우리 유니버스’니 ‘윤가은 유니버스’니 하는 팬들의 애정 어린 호명이 돌고 있다. 천진한 아이들의 세계, 하지만 조금 불친절하고 거친 세상, 다세대주택과 좁은 골목길이 즐비한 동네, 햇볕 쨍쨍한 여름 한낮의 풍경 등 윤가은 감독이 보여준 요소들이 이번 작품에도 고스란히 담겼다. 어쩌면 자신도 예상치 못한 호평과 주목을 받은 첫 작품 이후로 나아가야 했던 윤가은 감
<우리집>이 보여주는 ‘윤가은 유니버스’의 확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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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레지나 홀)는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는다. 앤드루 부잘스키의 <그녀들을 도와줘>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리사의 눈과 귀에 들어오는 화면 안팎의 물질성이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걸음을 옮기며 바깥의 변화를 예민하게 수용하는 리사의 신체적 반응을 빌려 프레임 내부로 침입해 들어온다. 영화의 도입부는 이런 성질을 선제적으로 제시한다. 리사는 혼자 눈물을 닦고 있는데, 그 행위는 제대로 완수되지 못한 채 밖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메이시(헤일리 루 리처드슨)의 등장으로 중단되고 만다. 이는 징후적인 신호였다. 금고를 노린 침입자의 소리가 들려오고, 신입 직원들과 온갖 손님들이 찾아오면서 영화는 ‘더블 웨머’라는 이름의 작은 스포츠바가 얼마나 많은 것을 지탱하고 있는지, 그러면서 얼마나 다종적인 질료들이 관계를 이루고 모순을 만들어내는지를 폭로하며 그것이 부서지는 과정을 해부학적으로 관측한다.
<그녀들을 도와줘>의 모럴은 영화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로 단일한 논리
<그녀들을 도와줘>, 앤드루 부잘스키의 무질서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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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 되어서야 비로소 삶의 감각을 찾는 여자.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생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리는 여자. 말갛다 못해 텅 비어버린 얼굴을 지닌 여자. 누구의 얼굴과도 닮았고 누구와도 다른 이 여자의 이름은 혜정(한해인)이다. <밤의 문이 열린다>는 유령처럼 살아가던 혜정이 의문의 사건으로 코마상태에 빠진 후, 극중 인물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진짜 유령이 되어 도심 외곽을 배회하는 밤의 시간을 담는다. 그리고 혜정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밤으로부터 하루하루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며 혜정의 삶을 생의 활기로 이끈다. 오래된 비유처럼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고 옆에 있어도 존재하는 것 같지 않은 유령처럼 살아가던 혜정이, 텅 빈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는 순간까지 영화는 끈질기게 그녀의 시간을 되돌려놓는다.
환상의 작동
이 밤의 시간들은 잔잔한 흐느낌을 머금고 있다. 간혹 명상에 잠긴 듯 고요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밤의 문이 열린다>를 세상 도처에 있는
<밤의 문이 열린다>, 다층의 결을 지나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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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 반 산트 감독에 대한 최근의 평가들은 좋지 않다. 그는 최근 10년간 인상적인 작품을 만들지 못했으며 <밀크>(2008)에서부터 초기의 실험정신을 잃었다는 평가들이 그것이다.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아이다호>(1991)나 <엘리펀트>(2003)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를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돈 워리>(2018)를 본 관객 또한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알코올 중독을 극복한 카툰 작가 존 캘러핸의 실화라는 시놉시스 자체는 사실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음에도 구스 반 산트 감독이라면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돈 워리>의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21살의 존 캘러핸(호아킨 피닉스)은 파티에서 만난 덱스터(잭 블랙)와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며 여러 곳에서 술을 마신다. 만취한 덱스터는 교통사고를 내고 이로 인해 존 캘러핸은
<돈 워리>, 비범했던 감독이 만든 또 한편의 평범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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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코미디언은 재미있는 것을 연기하지만 훌륭한 코미디언은 평범한 것을 재미있게 만든다.” 버스터 키튼의 말이다. 키튼의 후예임이 분명한 이상근 감독이 우선해서 꾸린 것은 2019년에 즈음한 한국 사회의 풍경이다. 청년 백수 용남(조정석)은 딸 셋 있는 집 아들이다. 1970~80년대에 지어졌을 단독주택에서 부모와 함께 산다. 연회장 부점장 의주(윤아)에겐 감정노동이 만만치 않다. 건물주 아들인 점장이 치근댄다. 3대가 모여 트로트 가요를 부르는 칠순 잔치. 유럽 고성을 모방한 ‘구름정원 컨벤션홀’ 외벽에는 어김없이 사자상이 포효하고 있다. 고대 지중해 연안 제국과 중세 유럽 대륙의 건축양식이 마구 뒤섞여 있다. 내부에 라일락룸과 페퍼민트홀을 갖췄음은 물론이다. 주변 상가 건물들엔 오색찬란한 네온사인 간판이며 현수막이 난립해 있다. 미세먼지 수치가 ‘나쁨’을 가리킨 날, 가스 테러가 발생한다.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건 구급차가 아니라 사설 견인차다. 유독가스는 걷잡을 수 없이
<엑시트>, 뛰어난 유머와 긴장으로 현재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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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기대하든 배반당할 것이다. 허리가 드러나는 짧은 상의에 그보다 짧은 쇼트팬츠를 입고 스포츠 바에서 일하는 여성들, 이들의 평등한 관계를 강조하는 포스터와 제목은 (아마도 남성으로 설정된) 적에 맞서 연대의 힘을 발휘하는 여성영화가 펼쳐질 거라고 기대하게 한다. 이 기대가 배반당할 수 밖에 없는 건 이렇다 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적은 도처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 모르나, 이 둘은 결국 같은 말이다. 리사(레지나 홀)가 눈물을 닦는 첫 장면에서 눈치챘어야 했다. 영화는 관객에게 그녀의 눈물에 공감할 서사를 쥐여주는 것이 아니라 다짜고짜 눈물을 닦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관객은 그녀가 왜 우는지를 영화가 끝나고도 알 수 없다. 물론 이런저런 유추는 가능하다. 그러나 울 일은 도처에 널렸다. ‘슬픔은 내 전문이라는 리사의 대사로 유추해본다면 리사는 다른 사람의 슬픔을 훔쳐 대신 슬퍼하는 사람이다. 그편이 모든 직원의 상황에 참견하는 매니저 리사의 캐릭터와 어울린다.
앤드루 부잘스키의 <그녀들을 도와줘>가 보여준 실험성에 관한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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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근래 보리스나 (짐 자무시가 속한 그룹) 스퀴럴 같은 뮤지션의 아방가르드하고 실험적인 음악을 영화에 사용하던 짐 자무시는 신작에서 스퀴럴의 음악 사이로 스터질 심슨의 주제가를 여러 차례 삽입했다. 난데없을 까닭은 없다. 과거 사용했던 스크리밍 제이 호킨스와 톰 웨이츠 등의 노래와 컨트리음악은 같은 뿌리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만 심슨의 경력이 특이하다. 그는 가족, 종교, 국가관 면에서 보수적인 컨트리음악의 권력과 싸우는 인물이다. 컨트리뮤직 어워드 행사장 바깥에서 “(컨트리뮤직의 본산인) 내슈빌에 파시즘이 판친다”고 시위하는가 하면 ‘게이와 흑인의 인권과 생존 문제’를 거론한다. 현재 대통령을 두고 ‘파시스트 돼지 새끼’라고 서슴없이 욕하는 그는 <All Around You>의 뮤직비디오에서 분열과 무기의 왕인 트럼프에 맞서는 어린 슈퍼히어로를 등장시킨다. 삶의 태도만 그런 게 아니라 뮤지션으로서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노선을 취한다. 블루스 음악에
<데드 돈 다이>, 짐 자무시가 무릅쓰고 만든 정치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