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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최근 어떤 영화나 TV프로그램이 가장 재미있었냐는 내 질문에 한 친구가 “뉴스”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금세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는 이렇게 덧붙였다. “어떠한 영화도 그렇게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그것도 하루 만에 다 보여주지 못할걸?”
이때 특히 난처해지는 건 ‘사회고발’ 성격을 띤 영화일 것이다.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는 대신 현실이 영화를 앞서갈 때(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현실을 널리 알리려는 ‘고발’성 영화는 자연히 그 힘을 잃고 만다.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의 영화 <신문기자>는 그 난처함과 무기력함을 고스란히 담고있다. 일본 정권에 쓴소리를 마다지 않던 기자 모치즈키 이소코의 동명 소설을 모티브로 한 <신문기자>가 다루는 소재, 그러니까 ‘현실’은 일본이라는 이름표를 떼고 지금의 전세계, 어느 국가의 이름을 붙인다고 해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민간
영화 <신문기자>가 실화와 실화 바탕 소설과 어떻게 다른 길을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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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중년 남자들은 늘 쓸쓸해 보였다. <색, 계>(2007)의 마지막 장면,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는 국가, 정치, 신념, 권력이라는 거대 가치 속에 가까스로 고독한 자아를 감춰오다 왕치아즈(탕웨이)를 만난다. 진짜 자기를 알아본 유일한 타자, 그녀를 숙청함으로써 그는 “유일한 동지이자 적”을 잃는다. 이 영화의 길고 처절한 섹스 신은 에로틱한 감각을 자극하기보다 살아남기 위한 욕망 투쟁처럼 보였다.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인정하는 데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려버린 <브로크백 마운틴>의 애니스(히스 레저)도 마찬가지다. 그는 욕망의 대상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품었던 감정의 근원과 깊이를 헤아리게 된다.
자아와 자아 사이
리안의 영화에서 사회적으로 보이는 자아와 내적으로 감춰진 자아 사이의 간극이 빚어내는 존재론적 고독은 기본적으로 깔린 배경 같다. 쉴 새 없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날카로운
리안 감독의 <제미니 맨>이 서사를 단순화하고 액션을 추가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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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기>에서 엑스레이 사진은 기존의 목적과 다르게 사용된다. 인물들은 육안으로 확인 불가한 인간 내면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고 현상을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뼛속까지 드러난 부분적 신체들의 외적 행위에 주목한다. 즉 ‘밖에서 안으로’ 향해야 할 시선이 도리어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인물들의 시선은 섹스라는 자극적 정황에 현혹되어 외부로 향한다. 그들은 해당 사건을 쾌락적으로 소비하는데 이는 곧 행위의 주체를 찾는 ‘탐정 놀이’로 이어진다. 윤영(이주영)은 사진 속 주인공이 자신이라 의심하고 여러 버전의 사직서를 작성하며 퇴사를 고려한다. 반면 허락 없이 타인의 사생활을 기록한 촬영자는 이 과정에서 생략된다.
<메기>는 여러 내러티브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영화는 개개의 내러티브를 심도 있게 조명하기보다 주로 사건의 일면만을 제공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 일면들은 독창적인 위트와 재기발랄한 미장센을 통해 인물과 관객을 매료시킨다.
<메기>가 세상을 구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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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자이언트>를 접하는 순간, 우리는 두개의 과거 시간대 사이에 놓인다. 하나는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시기인 1999년, 즉 세기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1957년, 즉 냉전의 긴장이 한껏 팽팽해지던 때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21세기의 첫 20년에 다다르고 있다. 주인공이 겪는 1957년과 우리가 살고 있는 2019년 현재 사이에는 대략 60년, 그러니까 두 세대의 간극이 있고, 작품이 제작된 해와 아이언 자이언트가 지구에 불시착한 시기 사이에는 약 40년의 차이가 있으며, 첫 개봉 시기에서 2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영화관에서 이 작품을 접할 수 있다.
연착된 시간이 야기한 착시효과
그렇다면 <아이언 자이언트>는 뒤늦게 비로소 우리에게 당도한 것일까? 물론이다. 연착된 시간이 제법 길다. 그사이에 시네마는 바뀌었다. 물론 새로운 시네마는 <아이언 자이언트> 이전에 시작되었다. 바로 <토이 스토리&g
20년이 지나 우리에게 당도한 <아이언 자이언트>가 현재에도 유효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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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조나 힐의 감독 데뷔작 <미드90>은 90년대 중반 미국 LA를 배경으로 한 13살 소년 스티비(서니 설직)의 성장을 다룬 영화다. 이 영화는 같은 시기 뉴욕 빈민가 10대 청소년들의 방황과 갈등을 그린 래리 클라크 감독의 <키즈>(1995)와 맥을 같이한다. 또한 그 이후에 만들어진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2003)와 <파라노이드 파크>(2007)를 떠올리게 한다. <미드90>이 흥미로운 것은 90년대를 사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비디오테이프의 4:3 화면비로 촬영했다는 것이다. 이 프레임은 인물을 집중해서 보여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카메라는 주인공 스티비가 스케이트보드에 입문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변화해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영화는 방에서 뛰쳐나오는 스티비가 그의 형 이안(루카스 헤지스)에게 붙잡혀 일방적으로 맞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감독은 왜 느닷없이 스티비가 맞는 장면에서 시작하는가? 이는 감독이 형
<미드90> 속 특정 상황이 반복되는 이유를 숙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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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기>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단어는 ‘재기발랄한 상상력’, ‘새로움’ 같은 것들이다. 평가의 주된 이유는 영화가 보여주는 유희적인 코드 때문이다. 유희의 감각은 전혀 다른 것들이 유사성의 목록 속에 배치되면서 두드러진다. 교회의 붉은 십자가와 병원의 녹색 십자가. 비슷한 색깔과 두께의 손반지와 발반지. 엑스레이와 우주선. 한국어, 영어, 한자어로 표현된 사직서. 그럴듯한 동시에 황당무계한 유사성과 차이가 웃음을 유발한다. 그런데 이러한 유희성의 형식들은 과연 생각만큼 새로운 걸까. 윤성호와 곡사를 들어 ‘유희적 모더니즘 세대’라고 통칭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문관규, ‘한국 독립영화에 나타난 자기반영적 미학과 희극 전략 연구’, 2012), 이들의 영화는 2000년대 작품들이다. 유희성을 분석할 때 활용된 자기반영성의 코드는 그보다 오래되었다. 우리는 마치 돌림노래 같은 유희성의 환영에 현혹되는 것은 아닌가. 유희성이 정말로 새로운 것이라면 우리는 유희의 변화상도 함께 생각
<메기>, 자유로운 목소리와 속박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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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헬터 스켈터>(1976)는 폴란스키가 살인사건을 다룬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담당 검사였던 빈센트 불리오시가 직접 쓴 사건 일지를 바탕으로 톰 그리스가 TV용으로 만든 영화다. 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건조하리만큼 또박또박 사건과 재판 과정을 기록했다. 찰스 맨슨이 2017년에 죽기까지 여러 인터뷰를 남겼기에 <헬터 스켈터>의 일부 진술 등은 시간이 흐르면서 진실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이하 <인 할리우드>)가 당시의 시간과 사건에 다가서는 방식은 정반대다. 감독으로서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사건이 할리우드에 미친 영향이 왜 본격적으로 이야기되지 않는지 의문을 품는다. <헬터 스켈터>는 맨슨과 추종자들의 재판에 비중을 둔 작품이어서 폴란스키 부부측 인물에 대한 접근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슨 웰스 이후 최고의 천재가 창작의 곤혹을 겪었는데, 그 시간은 바로 미국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와 쿠엔틴 타란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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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블록버스터를 좋아하는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으나, <애드 아스트라>는 분명 제임스 그레이 세계의 자장 안에 있는 작품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주에서조차 제임스 그레이의 인장이 고스란히 찍힌 영화다. 오랜 시간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를 따라온 관객이라면 그가 SF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그리 놀랍지 않았을 것이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레이에게 장르영화를 만드는 세공술이 장기라면 인물들의 심연을 그리는 건 태생적인 재능이다. 그의 영화의 중핵은 언제나 인물들의 심연에 있었다. 그러니 장르의 외피에 상관없이 인물 내면의 심연에 몰두해온 감독이 우주라는 심연을 만난다면 물 만난 고기처럼 자유자재로 유영하고 다니지 않을까, 하고 나는 내심 기대했다. 스스로의 좌표를 잃어버린 인물들이 광활한 우주를 부유하며 우리의 가슴을 내려앉게 만들겠지. 표현하기도 힘든 감정들이 온 곳에 스며들어 눅진해진 몸을 의자에서 일으킬 수도 없게 만들겠지. 적재적소에 들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애드 아스트라>에서 다시 한번 이방인의 서사를 보여주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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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초반부, 배우지망생 파트너와 지루한 섹스를 치르면서 샘(앤드루 가필드)은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분산시킨다. 벽에 붙은 커트 코베인 포스터에 관해 이야기하고, TV에 나오는 도시의 대부호 제퍼슨 세븐스의 실종 뉴스에 눈을 돌리는 식이다. 산만한 보기, 또는 성기와 눈이 따로 움직이는 분열적인 신체의 활동이라 말하고 싶다. 이런 증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눈앞의 섹스가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원인을 유추하는 것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분명치 않다. 이미지의 과포화 속에서 성애의 환상은 비루한 감각(너무 쉽게 ‘지리는’)으로 주어지고 있다. 섹스의 실패, 이것이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언더 더 실버레이크>가 제기하는 단순하지만 치명적인 구속의 상태다.
그들의 섹스가 불만족스럽다면 그건 무언가의 결여 또는 과잉으로 인한 결과인 걸까. 영화는 ‘왜’라는 문제를 질문하는 대신 샘이 처한 조건에서 몇 가지 변수를 작동시킨다. 첫 번째는 죽음과의 결합을
<언더 더 실버레이크>, 미스터리를 통해 이뤄낸 세계와의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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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는 아파트 현관문을 두드리는 여학생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집 안에 있을 엄마를 부르며 문이 열리기를 기대하지만 어떤 응답도 없다. 애타는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던 여학생은 마침내, 자신이 집을 잘못 찾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진짜 집으로 돌아간다. 아파트들은 모두 똑같은 문을 갖고 있다. 사회주의를 경험하지 않는 국가인데도, 우리나라의 아파트들은 성냥갑처럼 똑같은 건물들이 남쪽을 향해 서 있는 형태로 건설되었다. 평수의 크기로 이름 붙여진, 같은 평면의 아파트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서 있다. 우리나라의 아파트가 갖고 있는 여러 특징 중 하나는 공간의 위계가 적은 건물이라는 점이다. 같은 평면의 집들이 ‘평등하게’ 존재하고 있다.
복도에 면한 방들
지금은 더이상 사용되지 않지만, 편복도형 아파트는 우리나라 초기 아파트 형식으로 흔하게 발견된다.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적게 설치하려는 경제적 의도와 도로에 면한 집들에 대한 향수와 프라이버시
<벌새> 속 편복도형 아파트 내 공간의 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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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 아스트라>를 <지옥의 묵시록>(1979)과 대조하는 일은 자연스럽고도 필요하다. 그에 앞서 언급하려는 영화는 생뚱맞게도 한국영화 <1987>(2017)이다. 이 영화가 먼저 떠오른건 다음 장면 때문이다. 박 처장(김윤석)이 한병용(유해진)을 붙잡아 고문하는 남영동 대공분실 장면. 박 처장이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낸다. 한국전쟁 전 북한에서 지주로 살던 그의 부모는 동네에서 굶어 죽어가던 아이 하나를 거둬들여 먹이고 입혔다. 이후 ‘인민민주주의’에 투신한 아이는 박 처장의 부모와 누이를 “인민의 적”이라며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박 처장은 대청마루 밑에 숨어 이를 지켜봐야 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옆 고문실에서 넘어오는 처절한 비명이, 죽창에 쓰러져가는 박 처장 가족들의 외마디와 겹친다(적절한 시스템을 갖춘 극장에서만 제대로 들린다). 내재한 사운드와 외부에서 덧씌운 기억의 소리가 함께 울린다. 이로써 박 처장의 광기가 당대 공기와 공명한다
<애드 아스트라> 숱한 우주영화의 장면들을 따온 다음 우주 정글 속으로 들어가며 써내려간 묵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