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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하나의 장면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에피소드4 ‘황금빛 협곡’에서 한 사내가 노인을 총으로 쏜다. 쓰러진 노인을 보던 사내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새 한 마리가 창공을 비행하고 있다. 왜일까. 사내는 잠시동안 홀린 듯 새를 응시한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나도 홀린듯이 그들을 바라본다. 총구를 겨누던 긴장은 어느새 사라지고 새를 향한 아득한 시선만이 이 장면을 가득 채운다. 곧이어 사내가 시선을 거두고 노인에게 다가가자 그는 갑자기 죽음을 맞는다. 지극히 코언다운 죽음이다. 다만 그 직전에 등장한 새의 형상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매혹적이다. <카우보이의 노래>에는 이런 순간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누군가의 죽음의 직전에 찾아오는 미혹적인 순간들. 그것은 위기의 상황에 홀연히 등장하여 주인공의 넋을 낚아채고서 어디론가 멀리 달아나버린다. 그 장면들을 회상하며 <카우보이의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시
코언 형제가 <카우보이의 노래>에 담고 싶었던 삶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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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결국 복수의 이야기였구나’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상문(유재명)과 향숙(김호정)에게 고백한 밤, “마음 주지 말걸…. 처음부터 우릴 찾아오지 말지”라는 향숙의 한탄을 우연히 엿듣게 된 영주(김향기)가 바로 다음 장면, 커튼 뒤에서 나타나 승일의 침대 곁으로 다가갈 때 나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영주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 있는 승일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딸깍’ 하는 소리조차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잠시 후 서서히 포커스가 승일에게서 생명유지 장치로 옮겨가면 향숙에게 선물받은 영주의 머리 끈이 장치에 묶여 있다. 이상하게도 이 신은 영화 전체의 분위기와 맞지 않게 마치 스릴러영화의 한 장면처럼 촬영돼 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영주가 승일의 생명유지장치를 뽑고 (딸깍 소리를 내며), 자신의 ‘소행’임을 알리기 위해 머리 끈을 남긴 게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지
<영주>, 영주가 왜 그렇게 고통받아야 했는지에 대해 영화가 더 생각했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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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후 숱한 수군거림이 있었지만 더없이 끔찍한 말 중 하나는 “내년 대학입시 경쟁률이 낮아져서 좋겠네”라는 것이었다. 그해 여름 인터넷 포털엔 “지금 단원고로 전학 가면 대입 혜택을 받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도 올라왔다. 대학에 갈 수만 있다면 인간이길 포기해도 된다는 걸까. 괴물의 말임에 틀림없지만, 뒤집어보면 ‘좋은 대학 못 가면 인간대접 못 받는다’라는 인식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남을 밟아야 밟히지 않을 거라는 현실감. 현재 비정규직이 받는 대접이나 ‘을’의 처지를 떠올려보면, 이 현실감을 비난만 하고 넘어가는 건 사태 파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인이 아닌 사회적 괴물이기 때문이다.
IMF 금융위기와 세월호 참사
<국가부도의 날>을 놓고 세월호 이야기부터 꺼낸 건 한국 현대사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두번의 재앙이 IMF 금융위기 사태와 세월호 참사라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잠자고 있던 괴물은 비참한 일이 벌어졌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곤 한다
<국가부도의 날> 다채로운 캐릭터들의 에필로그가 의미하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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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이 끝나고 나서 생각하니 마음에 걸리는 장면 하나가 있다. 영화의 앞부분, 주인공 크리스티안(프란츠 로고스키)은 지게차 운전을 배우던 도중 선배인 브루노(피터 쿠스)를 밀치게 된다. 물건이 진열된 선반쪽으로 차를 돌린 것이다. 작은 실수인 듯 보이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교육의 과정을 생각하면 머리가 오싹해진다. 마트의 지게차는 편리한 물건이지만 자칫 큰 사고를 불러올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지게차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데, 어쩌면 이때부터 이들의 운명은 정해진 것 같다. <인 디 아일>은 캐릭터의 이름을 딴 3개 챕터로 진행되는 영화다. ‘크리스티안, 마리온, 브루노’가 각각 나열되는 에피소드의 명칭이 되고, 이들은 이후 3단계 고통의 주인공이 된다. 프로듀서는 영화를 본 뒤 관객이 ‘지게차를 통해 바다를 떠올리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전하는 멜랑콜리의 핵심에 물 속 울림이 자리하고 있다. 깊고 푸른 바닷속, 새벽녘 마트에서 흘러나오는 <아
<인 디 아일>, 정치적 시를 쓰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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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좋은 장면들은 종종 생략을 통해 완성된다. 코끼리를 말하지 말라고 하는 순간부터 코끼리가 계속 생각나는 것처럼 어떤 장면들은 때론 보이지 않는 행간을 전달하기 위한 마중물 역할을 한다. 수면 위에 뜬 몇몇 강렬한 장면이 시선을 빼앗을 때 수면 아래 잠긴 방대한 일상의 시간들, 잉여의 순간들, 프레임 바깥의 이미지들이 슬그머니 차올라 인식의 한구석을 점령하는 것이다. <툴리>는 독박 육아와 우울증의 상관관계에 대한 관찰 보고서 같은 영화다. 출산을 소재로 한 호러영화라는 농담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이 영화가 낚아올리는 첫 번째 감정은 공포다. 육아의 의무를 홀로 떠맡는 무게. 육체적으로 얼마나 고되고, 영혼이 어떤 방식으로 고갈되며, ‘내’가 어떻게 지워져가는지, 엄마의 시점에서 반복되는 우울하고 지난한 노동의 시간.
급작스런 엔딩. 생략된 것들은 어디를 가리키는가
엄마란 이름 위에 얹힌 유무형의 압력들이 있다. 어렴풋이 짐작은
<툴리>가 생략을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독박 육아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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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뷰티풀 데이즈>는 다큐멘터리 <마담B>(2015), <레터스>(2017), 극영화 <히치하이커>(2016) 등을 찍은 윤재호 감독의 극영화다. <마담B>에는 돈을 벌기 위해 탈북한 여성이 중국 농촌 총각에게 매매혼을 당한 뒤 다시 한국으로 건너와 탈북한 가족들을 만나는 사연이 나오는데, <뷰티풀 데이즈>는 전작의 굉장한 사연과 문제의식을 극영화의 방식 속에 절충하여 담고 있다. 영화는 탈북여성이 겪는 착취를 다양하게 그리지만 이를 신파나 <인간극장>의 방식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을 알아가는 아들의 시선을 통해, 가부장적 통념이 놓치는 지점을 폭로해낸다. 영화에서 가장 신선한 점은 여주인공 캐릭터다. 그는 모성애적 강박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다만 인간으로 책임과 의리를 다하고, 자기 삶을 갱신해나가려는 의지를 지닌다.
매매혼이나 성매매나 여성 착취라는 점에서
<뷰티풀 데이즈>, 착취 속에서도 책임의 주체를 다한 여성 캐릭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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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야 감독의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은 재개발을 앞둔 둔촌주공아파트의 모습을 담은 영화다. ‘재개발’을 소재로 삼은 다큐멘터리가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재개발 다큐멘터리’로 분류되며 그러한 맥락 속에서 이야기된다. 문제는 ‘재개발 다큐멘터리’라는 분류가 아니라 그 분류가 영화에 관한 모종의 규정으로 작용하는 상황이다. ‘재개발 다큐멘터리’라는 범주로 포괄되는 이상, 장소만 달라졌을 뿐 모든 영화가 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환각이 작동한다. 이 영화가 재개발 다큐멘터리에 관한 보통의 인식과 얼마나 먼가를 짚으며 이야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관객은 <집의 시간들>을 보는 동안 재개발을 인식할 수밖에 없지만, 엄밀히 말해 영화 속에서 재개발은 재현되지 않는다. 굴착기 소리도, 건물 잔해의 흉측함과 가련함도, 사람들의 저항 혹은 들뜸과 회한도 여기에는 없다. 재개발은 하나의 전제이자 결과일 뿐이다. 이것은 내레이션과 자막을 통해 발화되거나 기록
<집의 시간들> 투쟁과 파괴가 아닌, 어떤 헤어짐에 관한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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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의 그해 여름>(2017)은 카를라 시몬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엄마를 잃은 6살 소녀가 친척집에 맡겨진 뒤 낯선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는다. 천재적인 아역 라이아 아르티가스의 연기와 감독의 사려 깊은 연출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바르셀로나에서 살던 프리다(라이아 아르티가스)는 외삼촌 부부를 따라 시골로 내려간다. 어른의 눈으로 보았을 때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외삼촌 부부가 프리다를 냉대하는 것도 아니고, 사촌동생 아나(파울라 로블레스)는 프리다를 좋아한다. 하지만 영화는 프리다가 느끼는 불안, 질투, 회피, 영악함, 투정, 눈치보기, 거짓말, 죄의식, 반항, 그리움, 애정결핍, 서운함, 우울, 두려움, 안도감 등을 담아낸다.
흔히 엄마를 잃은 아이가 친척집에 맡겨지는 서사를 다룰 때 가장 쉬운 접근이 차별이나 학대를 당하는 이야기다. 아이는 ‘이노센트’한 존재로, 죽은 엄마와의 관계는 이상적으로 그려진다. 즉 행복하게 살던 순진한 아이가
섬세하게 가족이 되는 과정을 살피는 <프리다의 그해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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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을 같이 본 동행은 “싱가포르 사람들도 과연 영화 속 사람들처럼 ‘교포화장’을 할까?”라고 물었다. 나 역시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은 실제 싱가포르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가까울까? 영화가 그리는 1% 중 1% 사람들의 패션과 메이크업은 일반적인 싱가포르 사람들과 얼마나 다를까? 분명 이 영화의 싱가포르는 할리우드화된 버전 같긴 한데, 인터넷 검색 몇분 만으로 답을 알았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아마 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렇듯 한국인의 틀에서 싱가포르를, 아시아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한국은 어떻게 봐도 무언가의 보편적인 표준이 될 수 있는 나라는 아니다. 다들 자주 까먹지만.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국내 흥행 성적과 관심도는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다. 이는 예상되었던 일이다. 백인들이 주인공인 할리우드영화는 어딜 가도 대부분 비슷하게 감상된다. 주인공이 흑인이라도 크게 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아시아인만이 감지할 수 있는 어떤 재미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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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맨>의 제작자 스티븐 스필버그의 세계는 이성으로 가득 차 있다. 스필버그가 미지를 만날 때조차, 그 미지는 이성적이며, (수학적 방식으로) 대화가 가능한 존재들이다(<미지와의 조우>(1977)). 이성과 합리는 상식으로 이어지고, 상식은 도덕으로, 휴머니즘으로 이어진다. 스필버그의 영화에는 합리적인 판단의 주체가 등장하고, 이 인물은 비극과 조금은 거리를 두고 있다. 즉 스필버그는 말할 수 없는 희생자의 눈이 아니라, 희생자를 보듬는 휴머니스트의 눈으로 본 비극을 말한다(<쉰들러 리스트>(1993)). 그러나 상식은 언제나 다수의 상식이며, 도덕은 언제나 일반적인 도덕이다. 그가 도덕을 말할 때 그의 ‘보편’에서는 항상 무엇인가가 배제되고 있으며, 어떤 ‘도덕’을 보편적인 도덕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는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래서 그의 휴머니즘에 국가주의가 어른거리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이언 일병 구하기>(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퍼스트맨>을 통해 삶을 담아내는 방식, 혹은 그가 해석한 삶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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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백>의 장섭(이희준) 캐릭터에 관한 세간의 평가는 엇갈린다. 여성주인공의 위치를 위협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도움을 주는 남성 캐릭터라고 호평하는가 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문제를 해결하는 장섭이 여성의 연대라는 주제의식을 해친다는 불만도 있다. 나는 캐릭터의 적절성 여부를 판단하는 데는 관심 없다. 다만 극중 장섭의 역할을 두고 논란이 불거졌다는 사실만이 나의 관심이다. 사건의 개입에 용이한 형사 장섭의 역할은 두드러진다. 반면 백상아(한지민)와 김지은(김시아)의 행위는 ‘약자의 연대’라는 주제 차원에서만 사후적으로 풀이된다. 경찰서에서, 터미널에서, 공사 중인 공터에서 장섭은 위기에 처한 백상아를 돕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도 <미쓰백>이 상아와 지은의 이야기로 남는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언하면 <미쓰백>은 드러나는 액션으로서의 서사보다 꾹꾹 눌러진 감정의 서사가 더 중요한 영화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미묘하게 그려지기에
<미쓰백>이 캐릭터를 재현하는 방식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