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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위안부 피해자 강일출 할머니(89)는 자상하면서 당당했다. 영화 <귀향>(2015)의 모델인 강 할머니를 뵌 건 몇해 전 일본 대학생들의 나눔의 집 방문을 취재하면서였다(경기 광주의 나눔의 집에는 현재 열분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머물고 있다). 일본인 학생들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를 직접 듣고 나누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할머니들의 말씀에 귀기울였다. 강 할머니는 일본 젊은이들과 친절하게 마주하고 단호하게 할 말을 했다. 16살에 일본군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부대 밖에서 불에 태워지려던 와중에 조선 독립군의 도움으로 구출됐다. 기억을 꺼낼 때마다 상상조차 허락지 않을 고통이 떠오를 터였다. 일본에서 온 미래 세대와 대화하는 동안 할머니의 얼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 표정이 무너지면서 얼굴에 경련이 일고 말을 잇지 못하게 된 건, 먼저 세상을 등진 동료 할머니들에 대해 말할 때였다. 서로 의지하던 할머니들이 사죄 한
<아이 캔 스피크> 혐오의 시대에 도착한 연대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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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여행자>(1975)는 사막으로 간 한 남자의 이야기다. 취재를 위해 사막으로 간 로크(잭 니콜슨)는 심장마비로 죽은 타인의 신분을 도용해 타인으로 살아가기를 꿈꾼다. 신분 도용이라는 소재는 <리플리>(1999)와 같지만, 리플리(맷 데이먼)와 로크의 목적은 반대된다. 리플리의 신분 도용이 타인의 자본 또는 계급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면, 로크의 신분 도용은 자신을 버리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리플리는 상류사회에 모습을 드러내려 노력하지만, 로크는 자신을 찾는 이들을 피해 끝없이 도망쳐 다닌다. 그리고 <잃어버린 도시 Z>는 말하자면 리플리에서 시작해 로크로 끝을 맺는 이야기다.
퍼시 포셋(찰리 허냄)이 처음 볼리비아 원정을 떠나게 된 이유는 대부분의 여정이 그러하듯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당시에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훈장을 얻어 불명예스러운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겠노라고 다짐하며 집을 떠난다. 그의
<잃어버린 도시 Z>와 실존이 죽음을 욕망한다는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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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드 리버>는 현재진행형의 내러티브 구조를 취하고 있다. 영화 속 장면들은 모두 현재 발생하고 있는 상황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단 한신만은 예외다.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은 윈드 리버 산맥의 설원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나탈리의 사건을 수사하다 그녀가 사귀었던 남자친구 맷(그 또한 설원에서 시체로 발견됐다)이 일했던 공사장의 경비원들이 묵는 숙소를 찾는다. 이곳에서 제인이 지휘하는 경찰들과 공사장 경비원들 사이에 주거침입 논란으로 서로 총을 겨누는 한 차례의 기싸움이 벌어진다. 이 상황을 제압하고 제인은 맷이 묵었던 컨테이너 숙소의 문을 두드린다. 다음 숏은 어두운 실내에서 세면대 앞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희미하게 보여준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남자는 문쪽으로 걸어가서 문을 연다. 당연히 문 앞에 제인이 서 있을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는 어긋난다.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는 나탈리다. 이어지는 신은 3일 전 그녀가 죽기 전에 겪은 상황들을 마치 현재
<윈드 리버> 고립을 벗어나려는 시도, 그리고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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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만 무려 4편의 스티븐 킹 원작 소설이 미국에서 영상화됐다. 6월에 방영한 드라마 <더 미스트>를 시작으로, 8월에는 영화 <다크타워: 희망의 탑>이 개봉했고 또 다른 드라마 <미스터 메르세데스> 역시 비슷한 시기에 방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 <그것>의 개봉 소식이 들려왔다. 원작에 대한 팬덤이 강한 데다, 이미 두 차례나 영상화된 작품이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여러 선입견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나는, 원작자가 안드레스 무시에티 감독의 이번 작품에 만족감을 표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영화를 접했다. 스티븐 킹이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 각색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그 작품을 싫어한 나머지 심지어 동명의 TV시리즈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아니, 어쩌면 잭 니콜슨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배트맨>(1989)에서 보여주었던 미친 광대의 이미지가 ‘그것’의 외양과 겹쳐졌다.
비극이나 파괴가 아닌 성장의 공포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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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을 오래 들여다보면 혼돈이 어느덧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2016)은 니체가 말했던 이 혼돈의 응시에 놓인 주체가 실존의 위기에 맞서는 과정을 따른다. 이 작품은 원작 소설과 다른 층위의 해석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김영하의 원작 <살인자의 기억법>은 1인칭 주인공, 그것도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인 알츠하이머 환자의 글쓰기에 의존하여 진행된다. 독자는 문자를 통해 이미지와 심상을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주인공 캐릭터를 눈앞에 보여주어야 하는 한편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진술을 토대로 서사적 의혹을 만들어가야하는 고충을 떠안는다. 원신연 감독은 영화적 재현을 고려하여 인물과 서사의 설정을 재구성하였고 소설과 다른 의미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각색 과정에 꽤나 공을 들였다.
공동체의 윤리에서 주체의 위기로
근래 식민지 시대부터 1980년대까지 근현대사를 소재로 한, 현실주의에 긴박된 시대물들이 흥행하고 있다. 전
폭력의 역사를 경유하는 <살인자의 기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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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정 감독의 <브이아이피>(2017)는 흥행에 실패했다. 그리고 최근 여성 혐오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영화였다. 나는 개봉된 지 좀 지나서 관객이 별로 없어 한산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드디어 풍문으로만 들었던 장면이 초반에 나왔다. 사이코 살인마이자 북한 고위 간부 자제인 김광일(이종석)과 그 일당이 한 소녀를 납치해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이다. 긴장했지만 예상만큼 길게 반복적으로 강조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관객이 이런 장면을 보고난 후 앞으로 비슷한 묘사에 대해 더 덤덤해진다거나 쇼크에 대한 면역력이 늘어난다고 추정하기도 힘들다. 이 장면은 사이코패스인 김광일의 악행을 적시하기 위해 보여줄 만큼만 보여줬으며 이 장면 이후로 김광일과 그 일당이 저지르는 강간 살인 묘사도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후 장면들에서 잔인한 묘사는 감독이 의식적으로 자제한다는 느낌을 준다.
전략적으로 이런 방식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윌리엄 프리드킨의 <광란자>
결정적인 국면에서는 연출이 클리셰에 의존했던 <브이아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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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론으로 접근한다면, 클로드 샤브롤의 <마담 보바리>(1991)가 빈센트 미넬리의 <마담 보바리>(1949)의 리메이크가 아니듯, 소피아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2017)은 돈 시겔의 <매혹당한 사람들>(1971)의 리메이크가 아니다. 두 <마담 보바리> 영화가 나오기 전에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원작이 있는 것처럼 두편의 <매혹당한 사람들> 이전엔 원작인 토머스 컬리넌의 동명 원작 소설이 있다. 그러니까 같은 소설을 각색한 두편의 독립된 영화인 셈이다.
하지만 일반론은 둔탁한 도구이며 세상이란 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기억되기 위해 굳이 영화들이 필요하지 않은 플로베르의 소설과 달리 토머스 컬리넌의 작품은 지금까지 돈 시겔 영화의 원작으로만 기억되어왔다. 이 소설이 앞으로 지금까지 나온 두 영화로부터 독립된 작품으로 기억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무엇보다 소피아 코폴라가 이 소설을 읽은 것은 돈 시겔의
소피아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 사악한 양념을 뿌린 우아한 코미디 오브 매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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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의 영화라고 하지만, <장산범>이 끝난 뒤에 또렷이 남는 것은 거대한 암흑을 품은 듯 보이는 구멍이다. 구멍은 소리로 주의를 끈 뒤 사람들을 현혹하고 어떤 것은 삼켰다가 도로 내뱉고, 다른 것은 삼킨 뒤 돌려주지 않는다. 구멍은 메워지거나 허물어지길 반복하며, 또 다른 사물로 변주된다. 온갖 소리를 삼키는 공백을 어떤 의미로 채우는 대신, 일단 영화에서 구멍이 재현되는 방식을 통해 <장산범>이라는 하나의 여정을 감당해보려 한다.
공백이 불러온 또 다른 공백
구멍의 탄생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한밤 중에 차를 몰고 외딴곳으로 향하는 한쌍의 남녀가 등장한다. 남자는 음주운전을 하던 중 사고로 개를 죽인다. 남자가 죽은 개를 트렁크에 싣는데, 그 안에는 온몸이 포박된 여성이 있다. 다시 차를 몰아 어느 폐건물에 당도한 이들은 삽으로 벽을 헐어 커다란 구멍을 낸 뒤 방금 숨이 끊어진 여자와 죽은 개를 구멍 속에 넣어 봉한다. 떠나는 두 사
<장산범>이 재현한 공백의 이미지를 따라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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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아이피>의 촬영과 그 결과물에 대해 긴말 더할 생각은 없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 영화는 욕망이 필요를 압도한 전형이다. 인물의 악마성을 소개하는 단계에서 카메라는 신의주와 서울의 강간·고문·살해 피해 여성의 나신을 각각 납득할 수 없는 수직 부감으로 내려다본다. 카메라의 시선은 등장인물의 그것이 아닌, 인물의 정수리 위에서 줄곧 전지적 권능을 유지한다. 부감과 클로즈업이 수차례 반복된다. 희생자를 촬영한 증거 사진의 노출 역시 빈번하고 또렷하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이 살해되는 장면에서도 의도적 고문과 신체 훼손이 이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원칙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제작진의 취향은 악역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한 소용을 넘어 영화적 윤리를 지키지 못한다. 세상에는 하드고어 무비도 있고 포르노도 있으며 모든 건 관객의 선택이라고 눙쳐도 될까. 8월 28일 기준 이 영화의 전국 스크린 수는 886개로 현재 상영작 중 가장 많다.
언어에 담긴 젠더 인식
<브이아이피
<브이아이피>와 한국영화 속 ‘식구’끼리의 수컷어 사용 경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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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를 비평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다큐멘터리는 처음부터 완전한 자기 비평을 내놓고 있다. 존 케이지 이후 음악을 하는 컨템퍼러리 밴드에 걸맞은 과감한 노이즈 사운드를 배경으로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할 때마다 뜨던 경고 문구를 연상시키는 촌스러운 활자체의 붉은 글씨가 화면을 뒤덮는다. ‘본 영화는 전체적으로 볼륨이 균일하지 못함, 당신의 불편함을 통해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은유하려는 영화적 시도.’ 앞으로 펼쳐질 영화와 음악의 조악한 실수를 예고하며 ‘즉흥성과 오리지널리티’로 퉁친다. 혹시 내가 저런 문구를 구사한 적은 없을까 등골이 오싹해지는 저 비평은 밴드 밤섬해적단의 앨범을 인용한 자기 조롱인 동시에 자신의 영화에 관한 후일의 비평을 미리 조롱하고 있지는 않은가. 감독은 단순한 인용이든 의도적인 삽입이든, 자막은 꿈보다 해몽 격의 비평을 자기화하는 동시에 그것을 열렬히 파괴한다. 여기에 덧붙는 모든 해석은 일종의 사족이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
입으로 가열차게 싸우는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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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중력을 극복할 수 있을까? <박쥐>(2009)의 전작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에 나왔던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중력은 생물과 무생물을 막론하고 삼라만상의 존재가 결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불가항력적인 섭리다. 인간은 아니지만, 뱀파이어는 중력을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 있으나 다시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수는 없다. 상승과 하강 사이에 놓인 명백한 차이를 통해 <박쥐> 속 뱀파이어는 ‘하강’만 할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태주(김옥빈)가 “뭐긴, 인간 잡아먹는 짐승이지”라고 말하며 상현(송강호)과 함께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는 장면은, 은유적으로 인간에서 뱀파이어가 된, 그들의 지위 하락을 보여준다.
<박쥐>는 다른 걸작들이 그렇듯 시대보다, 관객보다 한 발짝 앞서 어떤 지점에 당도한 영화다. ‘복수 3부작’ 시리즈 이후 박찬욱은 그간 천착해온 ‘복수’ 대신 ‘사랑’을 소재로
<박쥐> 확장판이 품은 거대한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