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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에 남을 걸작은 아니다. 아니, 올해의 영화에 뽑히기도 힘들 것이다. 심지어 제프 니콜스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긴 어렵다고 본다. <러빙>은 얼핏 욕심을 내려놓은 영화 같다. 애초에 제프 니콜스 감독이 실화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연출했다는 게 의외다. 실체 없는 불안의 정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던 감독이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기엔 여의치 않은 조건이다. 아마도 무난하다는 반응은 여기서부터 비롯되는 거라고 생각된다.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제프 니콜스 감독은 <테이크 쉘터>(2011)에서 평범한 미국 중산층 가정을 묵시록의 무대로 변주시키며 불안한 상상력을 펼쳐낸 전력이 있다. 개인의 예민한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영화적 공기로 치환시킬 수 있는 재주꾼에게 ‘러빙 부부’의 단조로운 실화는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제프 니콜스의 영화가 <러빙>을 통해 한 단계 도약했다고 생각한다. ‘실화의 재현’이라
[송경원의 영화비평] <러빙>이 실화를 극화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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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배리 젠킨스의 <문라이트>는 주인공 샤이론이 소년에서 어른이 되는 모습을 세 단락으로 나눠 담고 있지만 별다른 사건이 없다. 1, 2부에서 샤이론은 동성애자라고 주변의 핍박을 받는다. 왕따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집단 린치를 당한다. 3부에서 샤이론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몸이 두배로 늘어난 건장한 체격을 지닌 성인 남자이자 거리에서 마약을 파는 소두목이 되어 있다. 샤이론의 주변 삶의 관계도 단출하다. 세 단락에 계속 나오는 인물은 마약 중독자인 샤이론의 엄마와 어릴 적부터 샤이론의 친구인 케빈뿐이다. 첫 번째 단락에서 샤이론을 보살펴주는 쿠바 출신 남자 후안이 나오지만 마약상인 그는 2부에서 죽고 없다. 후안의 여자친구인 테레사는 1부에 이어 2부에도 나오지만 거의 엄마처럼 샤이론을 보살펴주는 천사 같은 캐릭터인데도 그것 말고 별다른 역할이 없다.
잉여적 시선이 만든 자체적 리듬
이것은 요약한 스토리가 아니라 이 영화
[김영진의 영화비평] <문라이트>가 잡아낸 분위기, 그 영화적 접근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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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동성결혼 법제화 이후의 퀴어 무비는 어떠해야 하는가? 혹은 오바마의 8년 임기 이후의 블랙 무비는 어떠해야 하는가? 물론 몇 가지 상징적인 사건만으로 우리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Black_Lives_Matter’ 운동이 상기시키듯 인종간 갈등과 격차는 변함없이 실재하며, 수많은 LGBT 청소년들(그리고 성인들 역시)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상징적 사건 이후의 예술이 그 이전의 것과 동일한 메시지를 계속 송신할 수는 없다. 미국 연방 헌법재판소가 동성결혼 금지에 위헌 판결을 내린 것이 2015년이고 오바마가 2016년에 임기를 마쳤으니, 2016년에 등장한 블랙 퀴어 무비를 이러한 맥락과 완전히 무관하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이 이야기부터 해야만 한다. <문라이트>는 빈민가 흑인 게이 소년의 성장을 다루는 영화이며 흑인, 게이, 소년 세 키워드에는 모두 동등하게 방점이 찍혀야만 한다. <문라이
[황인찬의 영화비평] 2010년대의 블랙 퀴어 무비와 <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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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를 감싸안는 뜨거운 가슴을 거부할 이 누구인가. <재심>은 올바르고 따끈한 영화다. 당신은 아마도 이 영화의 포근한 품에 몸을 내맡기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잠깐, 해주고픈 말이 있다. 그 포근한 품이 당신을 인도하는 곳은 어디인가? 바로 가부장제다. 다른 영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정확히 <재심>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착한 변호사가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풀어주는 그 <재심>?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재심>은 집 나간 탕아가 의붓아버지를 만나 무사히 가부장제의 품으로 돌아오는 내용의 영화다.
모순이 너무 많다
영화는 법적 세계를 가부장적 세계로 파악한다. 현우(강하늘)는 ‘아비 없는 자식’(이 단어는 가부장제하에서 가부장 없는 아들에 대한 편견 섞인 용례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됨을 미리 밝힌다)이며 다방 꼬마로 불린다. “저 아이는 학교 안 다니냐”는 형사들의 질문에 다방 주인은 “애비는 죽었고 저 양아치를 써주는
[홍수정의 영화비평] <재심>이 변호사를 그리는 방식에 대한 의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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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윅: 리로드>(이하 <존 윅>)의 도입부. 건물의 한쪽 벽 위로 버스터 키튼의 <셜록 주니어>(1924)가 영사되는 중이다. 키튼의 꿈속에서 분리된 자아가 탐정 셜록으로 분해 영화 속으로 뛰어든다. 도난당한 진주를 되찾은 그가 악당들로부터 도망치는 거대한 시퀀스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조수의 도움으로 모터바이크 앞에 걸터앉은 그는 조수가 떨어져 나간 걸 모르고 있다. 엄청난 속도로 모터바이크가 달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별로 놀라는 표정을 짓지 않는다. 그의 별명이 ‘그레이트 스톤 페이스’ 아니던가.
그런 그가 극중 드물게 극도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그의 모터바이크가 달려오는 철도 및 자동차와 부딪힐 뻔한다. <존 윅>은 키튼이 머리를 감싸쥐며 공포를 체감하는 바로 그 장면을 보여준다. <셜록 주니어>는 1924년에 만들어진 영화이며, 키튼은 몸을 놀려 연기하는 배우들의 위대한 선배다. 이미
[이용철의 영화비평] <존 윅: 리로드>와 고독한 킬러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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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며 아내가 말했다. “뒷정리를 부탁해.” 아내의 부재를 틈타 애인과의 밀애를 즐기려던 남자는 머쓱해져 대답한다. “그러려고 했어.” <아주 긴 변명>(2016)의 오프닝 시퀀스 이야기다. 결혼 생활 10년을 훌쩍 넘긴 중년의 스타 작가 츠무라 케이(사치오)와 헤어디자이너 나츠코는 얼핏 다정해 보이지만 내면은 서늘하다. 아내 나츠코는 일년에 한번 절친한 친구와 여행을 간다. 바로 그날, 출발 전 남편의 머리를 손질하고 부랴부랴 나서던 아내가 남편에게 남긴 말이, 뒷정리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영화는 이때 그녀의 미묘한 눈빛과 표정을 여운으로 남긴다. 그리고 그녀가 탄 관광버스가 눈 덮인 산을 굽이굽이 돌아 올라갈 때, 모든 승객이 잠든 사이 홀로 깨어 있는 그녀가 창밖 풍경을 아련한 시선으로 응시할 때, 관객은 그녀가 이미 다른 세계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흡사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처럼, 그녀는 예시적인 마지막 말과 그리고 미처 남편에게 전송하지 못한
[정지연의 영화비평] <아주 긴 변명>, 한 남자의 뒤늦은 성찰 혹은 성장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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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사랑의 시대>(2016)는 그의 전작들과의 연속성 밖에서 논할 수 없는 영화다. 그는 첫 장편영화 <셀레브레이션>(1998)과 <더 헌트>(2012)에 이어 다시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 앞에 가져다놓았다. 에릭(울리히 톰센)이 상속받은 대저택에 함께 살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공동체가 형성된다. 곧이어 이 공동체는 에릭의 연인 엠마(헬렌 레인가드 뉴먼)의 합류로 변화를 맞는다. 에릭의 외도와 엠마의 등장이 유쾌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영화에서 변화의 시작은 항상 불쾌한 해프닝이다. 일대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집단 안에서 지속되는 긴장과, 꿈틀거리며 변화를 수용하는 공동체를 보여주는 것은 빈터베르그 영화의 특징이다. <사랑의 시대>에서도 공동체의 일원들은 갑작스레 등장한 엠마를 결국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수용의 과정은 어딘가 의심스럽다. 그들은 왜 엠마를 받아들였을까. 엠마가 불편한 존재라는 것은 그들 스스로
[홍수정의 영화비평] <사랑의 시대>와 공동체의 불영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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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 낯뜨거운 일이 되겠지만 요즘 내가 심각하게 하는 고민은- 나를 포함해- 이토록 다정한 사람들의 오갈 데 없는 다정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다. 그런 고민은 친구들의 연애 실패담과 결혼 생활의 고충을 들으며 시작되었는데 그러고보니 내 경험으로 돌아봐도 사랑이란, 연애란 그리고 결혼이란, 무언가 수탈의 느낌을 지울 수 없지 않은가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우리를 그 수탈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는가 생각해보니 다정(多情)이 병이었다.
누가 우리의 다정함을 노릴까
<매기스 플랜>(감독 레베카 밀러, 2015)에도 그렇게 해서 곤란에 빠지는 여자 매기(그레타 거윅)가 등장한다. 대학에서 예술비즈니스 강사로 일하는 매기는 이름이 비슷해 잘못 입금된 강사료 때문에 행정과에 갔다가 인류학 강사인 존(에단 호크)을 만난다. 그 뒤 공원에서 조우한 둘은 대화를 나누고 존이 매기에게 자신의 소설 원고를 읽어달라고 부탁하면서 둘은 친구에서 연인으로,
[김금희의 영화비평]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의 한계를 명랑하게 풀어가는 <매기스 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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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루이스(에이미 애덤스)와 이안(제레미 레너)이 처음 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탐사팀이 들고 들어간 새장 속의 새에게 유독 시선이 간다. 뭔가 대단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은 알겠는데 영화는 딱히 왜 새를 들고 들어갔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진 않는다. 돌고래를 연상 시키는 소리와 함께 외계인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만이 공간을 채울 뿐이다. 가능한 한 화면 안의 요소들을 단순화하려 애쓰는 드니 빌뇌브 감독이 이토록 눈에 띄는 장치를 그냥 배치했을 리 없다. 내 호기심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저 새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헵타포트라 불리는 외계인들이 인간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 안전한지 확인하는 장치라고 짐작 가능하다. 호흡하기 적당한 공기인지 치명적인 물질은 없는지를 확인하는 생체 지표라 할 수 있다. 둘째로 미장센 측면에서 보자면 사운드로 장면을 장악하는 이 영화에서 이색적인 음색을 제공한다. 방호복 속 인간의 숨소리, 트럼
[송경원의 영화비평] 드니 빌뇌브가 제시하는 어떤 가능성 <컨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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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적이면서도 시적인 공포감을 일으키는 질식할 듯한 누아르” (<롤링스톤스> 피터 트래버스)라는 상찬에서부터, “우아한 외견에도 불구하고 정서적 수준에선 상처받은 10대답다”(<빌리지 보이스> 빌지 에비리, <뉴욕타임스> 매놀라 다아기스)는 분열적 의견까지 작품에 대한 평이 갈린다. 2016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을 시작으로 각종 영화제에서 감독상, 각본상을 수상하고 있는 톰 포드의 두 번째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에 대한 언급이다. 심리적 누아르로 출발하지만 현대적 웨스턴으로 질감을 달리하는 영화의 장르적 외견은 일견 매혹적이다.
감독의 전작 <싱글맨>에 비하자면 영화의 미적 스케일과 작가로서의 장악력이 한층 넓어지고 깊어졌다. 오프닝을 제외하고는 영화의 정서와 톤이 금욕적일 만큼 엄밀히 절제되고 있다. 영화는 공간적으로는 화려한 LA와 흙먼지 자욱한 텍사스를, 시간적으로는 현재와
[송효정의 영화비평] <녹터널 애니멀스>에 나타난 여성 혐오의 징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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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하나의 의문을 갖고 물고 늘어지며 쓰려 한다. 최근의 주류 한국영화에서 클로즈업된 배우의 얼굴들이 근사하다는 느낌으로 수렴되는 것 외에 왜 지속적인 잔상을 남기지 않을까란 의문이 그것이다. 나와 가끔 문자로 교신하는 어느 영화인은 요즘 한국영화에서의 얼굴 클로즈업은 대사와 표정 외에 어떤 기능도 하지 않는다고 한탄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스토리는 다양해졌지만 얼굴이 영화적 이미지로 작동하지 못하고 사용가치로 전락해버린 작금의 한국영화 현실은 오염돼 있다는 것이다. 얼굴의 ‘사용가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인데, 이 풍토에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얼굴의 페티시즘에 갇힌 온갖 메시지 영화들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입장들도 머지않아 상투형의 막다른 골목에 막힐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윤리적 감각의 균형이 부재한 <마스터>
이를테면 <마스터>란 영화에 등장하는 숱한 배우들의 얼굴 클로즈업은 그저 배우들이 근사하게 생겼다는 인상 외에 어떤
[김영진의 영화비평] 최근 한국영화의 낭비되는 이미지 문법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