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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과 <싱글라이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혼자들의 시대다. 1인 가구가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4분의 1을 넘은 지 오래고(2015년 1인 가구 비중 27.2%), 2045년에는 36%로 늘어난다는 게 최근 정부 추계다. 한발 앞서 나 홀로 시대가 전개되고 있는 일본은 1인 가구 비중이 이미 3분의 1을 넘겼다. 고독사는 날로 증가하고 있는데(2011년 대비 2015년 증가율 179%), 눈에 띄는 건 고독사하는 연령과 소득층 분포가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시복지재단 조사에 따르면 무연고 사망자 중 69%가 60살 미만이고 무연고 의심 사망자가 가장 많은 지역은 강남구였다. 더이상 고독사가 저소득 독거노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김정연의 만화 <혼자를 기르는 법>에 나오는 한 독거 여성은 자신이 키우는 거북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제가 죽으면 얘가 상주예요.”
연결이 개인을 가두는 현대의 고독
혼자들의 이야기가 잇따른
[송형국의 영화비평] 고독과 소외의 시대에 <어느날>이 보여주는 구원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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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국가에서, 폭군의 도주가 저지된다. 만일 그가 혼자였다면 그의 나쁜 탈주는 성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 손자가 곁을 지키면서 상황은 난처해진다. <어느 독재자>(2014)는 독재자와 손자의 여정을 담은 영화이다. 여행의 사이에서 그들은 타락한 정권의 피해자들과 만난다. 과연 이 나쁜 대통령은 자신의 과거 행동을 후회하게 될까? 영화는 결말에 대해 관객의 기대와 다른 조언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왜 하필 독재자가 어린아이와 함께 도주하게 되었는지, 감독에게 아이의 ‘순진한 눈’이 필요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언뜻 영화 속의 우화는 평화적이라 아이의 시선과 맞물리지만, 실제로 아랍 사회에서 독재정권은 민주주의로 전환되지 못했다. 이 나쁜 결말 때문에 영화는 이런 장치를 심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새로운, 또 다른 시작을 해야 한다고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말하고 있다.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2014)을
[이지현의 영화비평] <어느 독재자>의 숨겨진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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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관람하기 전 참고한 <투 러버스 앤 베어> 후기들은 유독 곰에 관해서만은 할 말이 많지만 애써 줄인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관람 후에야 이런 반응의 이유를 즉각 이해했다. <투 러버스 앤 베어>의 난감함은 곰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데서 비롯된다. 영화 정보에 곰 목소리 담당 배우 정보가 버젓이 나와 있으니 딱히 스포일러는 아닐 것이다. 물론 실사영화에 말하는 곰이 등장했대도 놀랄 일은 아니다. <패딩턴>(2014)에서 인간처럼 옷 입고 말하는 곰을 만난 바 있으며,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라이프 오브 파이>(2012)처럼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해 인간과 가림막 없이 자리한 맹수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화된 동물이 등장할 때 영화 자체의 성격이나 장르가 그에 맞춰 판타지나 애니메이션, 아동물 등으로 조종되거나 분류된다면 <투 러버스 앤 베어>는 이와 달리 장르 특정이 불가능한 리얼리즘 영화로 굳건히 남는다
[김소희의 영화비평] <투 러버스 앤 베어>와 함께한 특별한 북극 탐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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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는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 조금 다른 지점에 놓여야 할 영화다. 이 영화에는 기존의 홍상수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몇 가지 숏이 등장한다. 영희(김민희)가 지영(서영화)과 함께 독일에서 시간을 보내는 1부의 초반,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초록빛 언덕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영희와 지영을 찍은 익스트림 롱숏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성(박홍열)이 화면을 가로질러 언덕을 올라 그녀들에게 시간을 묻는다. 이 장면에서 그림 같은 구도와 강렬한 초록색은 인물들을 압도하며, 건조한 홍상수 영화의 화면에서 볼 수 없었던 미학적 감흥을 자아낸다. 또 다른 장면. 영희가 공원 호수에 놓인 다리에서 절하는 숏 다음 바로 등장하는 호수의 수면에 비친 나무 그림자를 보여주는 숏은 슈베르트의 낭만적인 음악과 어우러져 마치 한폭의 그림 같은 정경으로 펼쳐진다. 카메라는 느리게 팬하여 벤치에 앉아 있는 영희와 지영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비슷한 회화적인 구도의
[최은영의 영화비평]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보여준 홍상수 영화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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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중심으로 한 한국영화 산책
홍상수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별것도 아닌 일을 담고 있거나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을 보여줄 때다. 솔직히 이제 홍상수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는 장면은 너무 많이 봐와서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남녀가 유혹의 실마리를 교환하는 상황을 보거나 홍상수식 어법으로 인물들이 상처를 드러내고 감싸안는 상황을 볼 때 으레 그러려니 받아들이게 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연애의 전개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연애중에 있는 여배우 영희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혼자 시련을 견디는 모습을 담고 있는 영화이다. 영희(김민희)는 유부남 영화감독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눈치를 받는다. 영희를 아껴주고 위로하는 사람들조차 빨리 일을 다시 해야 한다는 투로 영희에게 눈치를 준다.
이런 상황에서 영희는
[김영진의 영화비평] <밤의 해변에서 혼자> 그리고 <싱글라이더>와 <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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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퍼트 샌더스의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은 스칼렛 요한슨이 주인공인 ‘소좌’로 캐스팅된 뒤부터 화이트워싱 이슈로 논란이 되었다. 이 소동은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처럼 보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동아시아 원작이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었지만 이런 반응은 없었다. 할리우드판 <링>이 미국 배경에 나오미 와츠 주연으로 나왔다고 해서, 원작의 사다코를 사마라란 이름의 백인 여자아이로 바꾸었다고 해서 여기에 대해 트집을 잡는 사람들은 없다. 그렇게 예민하다면 처음부터 리메이크를 하지 말아야 한다. 할리우드 리메이크의 의미는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진 영화의 아이디어를 익숙한 할리우드 시공간에 이식하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게으른 관객을 얻는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공각기동대>는 그게 좀 어렵다. 이는 근미래 배경 사이버펑크 만화의 성격과 관련된다. 큰 아이디어, 그러니까 사이보그 여성인 주인공만 취해 SF 액션물을 만드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듀나의 영화비평]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이 실패한 리메이크작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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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홍상수 영화 초심자다. 18편에 달하는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을 다 외우지도 못하고 순서대로 보지도 않았기에 그의 영화세계가 어떤 경로로 변해왔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뇌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건 몇몇 인상적인 대사와 장면들 정도인데, 그마저도 남들에게 설명할라치면 영화들끼리 적당히 서로 뒤섞여 엉망진창이 된다. 덕분에 꽤 오랫동안 나는 ‘홍상수 영화는 거의 비슷해’라는 자기변명 속에 있었던 것 같다. 두려움도 있었다.
홍상수 영화에 대한 평자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 정도가 아닐까 싶다. 덮어놓고 칭찬하거나 외면하거나. 그의 영화만큼 언어로 옮기기 난감한 텍스트도 드물다. 홍상수에 대한 격찬은 넘치되 길게 설명하는 글이 드문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 짐작한다. 어느새 홍상수는 영화적 식견을 판단하는 지표가 되어 있다. 이 앞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보고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그간 내가 홍상수
[송경원의 영화비평] <밤의 해변에서 혼자>, 홍상수 초심자가 홍상수 초심자를 위해 쓴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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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정치계에 있는 젊은이로 할 것, 어린이는 일체 고려하지 않는다.” <신 고질라>(2016)의 총감독 안노 히데아키는 처음부터 컨셉을 분명히 했다. 영화 대부분은 재난에 대처하는 관가의 움직임을 보여줄 뿐 생생한 시민의 일상에는 도통 무심하다. 정치가 전면에 등장한 대신 거대괴수SF 특유의 과학주의는 힘을 잃었다. 가족도, 로맨스도 구원자도 없다. <신 고질라>는 실제 현실의 일본에 괴수가 나타난다는 설정을 리얼하게 시뮬레이션해 동시대 도쿄를 배경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주인공은 대를 이어 정치를 하는 젊은 야심가이자 내각 관방부(副)장관인 야구치 란도(하세가와 히로키)다.
12년 만에 제작된 29번째 시리즈물 <신 고질라>는 오리지널 작품인 혼다 이시로의 <고질라>(1954)의 고유성을 상기시키며 시리즈의 전면적 쇄신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된다. 총감독·각본·편집은 안노 히데아키가, 공동감독·시각효과는 히구치 신지가 맡았다.
[송효정의 영화비평] 현실 반영의 일본 괴수영화로서 <신 고질라>가 놓친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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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 감독은 <해빙>이 “앞에서 질문을 던지고 뒤에서 답을 제시하는” 구조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스릴러는 사건이 일어나고 조사 과정을 거쳐 사건이 해결되는 서사 구조를 갖고 있다. 이수연 감독은 ‘사건’이라는 말 대신 ‘질문’이라고 표현했다. <해빙>은 스타일과 스토리 모두 스릴러보다는 호러에 가깝다. 그러므로 ‘사건이 발생한다’보다는 ‘질문을 던진다’라는 문장이 어울린다.
호러는 인간과 사회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질문하는 장르다. 스릴러가 사건의 인과관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한다면, 호러는 설명되지 않는 서사의 잉여와 이성의 균열을 끌어안고 있는 장르다. <해빙>을 호러로 받아들일 때 서사의 모호함은 매력으로 작용하지만 스릴러라는 틀로 해석할 경우 사건의 설명이 미진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해빙>을 되짚어보면 감독의 말과 달리 답은 이미 처음부터 주어졌다. 연쇄살인, 시신 훼손과 유기의 범죄를 저지른 정육식당 부자는 자신들의 범행을 영화
[이현경의 영화비평] <해빙>이 주는 원초적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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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든 사람이든 언젠가는 죽는다. 죽음은 죽는 자의 운명이 결정할 몫이지만 그들에게 어떤 묘지와 장례식을 선물할지는 산 자들의 몫이다. <로건>은 울버린/로건의 장례식을 위한 레퀴엠이다. <로건>에 깔려 있는 수정주의 웨스턴의 그림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수정주의 웨스턴은 서부의 신화를 비판하고 해체하는 작업이 전부가 아니었다. 존 포드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에서 톰 도니폰(존 웨인)의 장례식을 위한 여정을 극의 구조로 삼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용서받지 못한 자>(1992)에서 묘지와 함께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 우리는 이 묘지와 장례의 절차 속에 ‘웨스턴’ 장르에 대한 수정주의 웨스턴의 진짜 태도가 숨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로건>이 수정주의 웨스턴을 경유할 때, 그것은 로건/울버린이라는 신화적 인물이나 그로 대표되는 시리즈의 신화를 해체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그에게 어
[안시환의 영화비평] 수정주의 웨스턴과 <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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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을 읽지 않았지만 이 소설의 어떤 점이 마틴 스코시즈를 매혹하였는가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인 스코시즈가 엄격한 가톨릭 환경 아래 성장했고, 영화학교에 들어가기 전 신부가 될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을 만큼 신앙심이 두터웠으며, 죄의식과 구제라는 종교적 세계관을 바탕에 깐 영화들을 만들어왔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일런스>(2016)에서 스코시즈는 흥미로운 서사의 구축과 가공할 만한 영화적 테크닉을 동원하여 믿음의 본질에 접근한다.
흡사 미조구치 겐지의 재래(再來)를 보는 것 같은 오프닝을 통해, 그리고 존 포드의 <수색자>(1956)처럼 이단적 세계로부터 자아를 지키려는 순혈주의의 여정을 통해 <사일런스>는 가혹한 힘에 대항하는 종교적 항거의 양식을 묘사한다. 이 영화에서 스코시즈는 종교적 믿음과 철학적 탐색 사이에서 씨름한다. 17세기 가톨릭 교회의 노선 안에는 신앙의
[장병원의 영화비평] 서사 구조와 서술 주체로 살펴본 <사일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