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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구로사와 아키라는 자신의 어린 시절 꿈을 그린다. 10대 시절 화가 지망생이었던 그가 꾼 꿈은 ‘사랑하는 빈센트’(Loving Vincent) 반 고흐의 그림 속을 걷는 것이다. 옴니버스 영화인 <꿈>(1990)의 한 에피소드를 통해서다. 구로사와의 영화 속 분신인 어떤 일본인 화가는 전시장에 걸려 있는 반 고흐의 그림을 바라보다, 그 그림들 속으로 들어간다. 스크린은 반 고흐의 마지막 정착지인 프랑스 북부 오베르 시절 풍경화로 바뀌고, 화가는 그림 속을 걷는 ‘황홀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시간이 멈춘 공간인 그림 속에서의 산책은 노감독이 고백하는 죽음에의 명상처럼 비쳤다. 죽음을 얼마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일까? 구로사와는 반 고흐의 그림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본다. 풍경화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 속, 저 멀리 있는 지평선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을 다시 꾸다
신예감독 도로타 코비엘라와 휴 웰치먼의 애니메이
<러빙 빈센트> 반 고흐를 향한 ‘애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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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원 감독의 장편영화 <소통과 거짓말> <해피뻐스데이> 두편이 최근 개봉했지만 저예산 독립영화의 처지가 흔히 그렇듯 많은 관객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나 역시 이승원의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영화들은 상업영화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 묘사들로 화면의 표면을 채워 반도덕의 도발 그 자체로 호소한다는 오해를 사기 쉬운 데다, 이런 유형의 충격적인 소재로 작품의 개성을 포장하려는 시도는 이미 국내에서도 여러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피상적인 정보만 갖고는 굳이 이승원의 영화에 접근할 마음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 신청된 이승원의 두번째 장편영화 <해피뻐스데이>를 보고 나는 그의 영화가 섣부른 오해를 사기 쉬운 진정성의 폭탄이며 머지않아 주류 한국영화계에도 상당한 자극을 줄 잠재적 재능의 징표라고 봤다.
개봉 즈음에 다시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나의 건방진 태도를 반성했다. &l
불행에 절실히 접근하는 이승원 감독의 <해피뻐스데이>와 <소통과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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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인 섹스 신으로 화제를 불러모은 이 작품을 앞에 둔 관객이 가장 쉽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아마도 “왜 이것은 포르노그래피가 아닌가?”일 것이다. 감독은 리허설이나 사전 모의되지 않은, 실제에 가까운 애정행위를 화면에 담았다. 러브 신에서는 액션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3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리기도 했다. 전작이 없는 신인배우들이어서 그런지 그들의 정사 신은 더 실감 있게 다가온다. 기성배우들이 주는 극적 허구에 대한 안도감이 없기 때문이다. 가스파 노에는 <돌이킬 수 없는>(2002)을 찍기 전 이 영화를 기획했고, 기획안을 듣고 출연 승낙을 했던 뱅상 카셀과 모니카 벨루치는 시나리오를 본 뒤 고사했다. 덕분에 <돌이킬 수 없는>이 먼저 세상에 나오게 됐다. 실제로 연인이었던 그들은 아마도 허구가 실재를 압도할 것에 대한 두려움, 혹은 그 과정에서 육체에 투영될 수밖에 없는 실제의 흔적들이 두려웠는지 모르겠다.
회한이 짙게 깔린 플래시백
가스파 노에가 <러브>에서 도달한 인식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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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첫 문단에서부터 <침묵>의 스포일러로 가득합니다.
<침묵>(2017)에서 가장 민감한 장면에서부터 이 글을 시작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어쩌면 <침묵>은 진실에 관한 영화라기보다는 인물의 진심을 관객에게 설득하는 영화다. 그것이 죽은 유나(이하늬)가 ‘괜찮아’라고 말하는 임태산(최민식)의 판타지가 정지우 감독에게 필요했던 이유다. 장영엽 기자가 인터뷰에서 지적했듯이(<씨네21> 1128호 정지우 감독 인터뷰), 이 장면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다시 한번 유린한다고 느껴질 수 있는 ‘윤리적 불편함’이 내재해 있는 게 사실이다. 만약 이 장면에 불편함을 느꼈다면, 정지우의, 또는 임태산의 진심을 전달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아슬아슬한 장면에 설득당한 관객임을 고백해야겠다. 이 글은 내가 설득당한 임태산과 정지우의 진심에 대한 것이다.
침묵을 설득하는 최민식의 마술
결론부터 말하자면, <
<침묵>에서 사실의 조작이 진심을 증명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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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지만 <잇 컴스 앳 나잇>(2017)이라는 제목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원제인 ‘It Comes at Night’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기본적인 단어들로만 이루어진 명쾌하고 으스스하고 우아한 제목이다. 무엇보다 이 제목은 아무런 장애 없이 한국어로 말끔하게 번역될 수 있다. 그런데 수입사에서는 이 간단한 작업을 하지 않고 <잇 컴스 앳 나잇>이라는 괴상한 제목을 붙여버린다. 쉬운 단어라고 해서 한글 표기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comes’는 쉬운 단어지만 ‘컴스’라고 쓰면 어색할 뿐이다. 물론 기억하기도 어렵다. 수많은 잠재 관객이 이 영화의 제목을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도대체 못 볼 수 없는 문제인데 어떻게 이 제목으로 극장 개봉까지 온 것일까. 모를 일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잇 컴스 앳 나잇>이라니 이 영화는 십중팔구 호러이거나 스릴러다. 제목만 본다면 호러
호러의 규격을 배반한 <잇 컴스 앳 나잇>이 공포를 야기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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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알메레이다 감독의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조던 해리슨의 원작 <마조리 프라임>(Marjorie Prime)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치매로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마조리(로이스 스미스)는 남편의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복원된 인공지능 월터(존 햄)와 그녀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의 기억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감독은 연극처럼 한정된 공간인 거실에서 주로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로 영화를 구성했다. 이 영화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세우스의 배’를 떠올리게 한다.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아테네 사람을 구한 영웅이다. 그는 배를 타고 아테네로 돌아갔고 아테네 사람들은 테세우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몇 백년간 그 배를 보존했다. 세월이 흘러 배는 조금씩 훼손되고 사람들은 배를 구성하는 나무판자를 하나씩 새것으로 교체하면서 배를 유지했다. 그렇게 몇 백년이 지난 후 원래의 나무판자가 다 새 나무판자로 교체되었다면 이 배는 테세우스의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의 인공지능은 왜 거짓말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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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다루는 영화는 자칫 주제 면에서 진부해지기 쉽지만, 그렇다고 그 스펙트럼이 좁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 퍼펙트 데이>(2016)는 그런 면에서 꽤나 독특한 면모를 지닌 영화다. 보스니아 전쟁이 끝날 시점을 배경으로, 평화협정이 체결되던 어느 24시간 동안에 한 인도주의 단체에서 일어난 사건을 영화는 좇는다. 실제로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감독은 1995년 당시에 발칸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의 사정을 베타캠으로 직접 촬영한 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원작은 ‘국경없는 의사회’ 출신의 작가 파울라 파리아스의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감독은 전쟁 중에 관찰했던 기억을 다수 떠올리며 이를 영화화했다. 처음에 나는 이 작품이 20세기 후반의 가장 커다란 비극 중 하나를 지나치게 가볍게 바라보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부분들을 회피하고 넘어가는 데다, 결말 부분의 실마리가 지나치게 단순했기 때문이다. 비견컨대 로버트 알트먼의 <야전병원 매쉬>(1
<어 퍼펙트 데이>가 구태에서 벗어나 생명을 그리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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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그 시작과 함께 병자호란의 역사적 맥락에 관한 묘사를 최소화한 채 ‘오로지 살고자 하는’ 왕과 신하의 얼굴을 관객에게 들이민다. 한마디로, 거두절미의 서사.
속수무책의 무의미함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남한산성이라는 낯선 세상에 툭 하니 던져진 왕과 신하를 마주해야 한다. 최명길(이병헌)과 김상헌(김윤석), 그리고 이시백(박희순)을 제외한 왕과 신하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심지어 자신들이 어떤 세상에 던져졌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발 딛고 서 있는 세상과 그 세상에 대한 인식간의 괴리. 그러니 그들의 말이 허공을 맴돌 수밖에 없다. 겉도는 말이 넘쳐날 때 세상은 무의미해진다. 한마디로 남한산성은 ‘세상이 무의미해진 공간’이다.
<남한산성>은 이 무의미한 세상의 결과를 민초들의 고통과 이유 없는 죽음으로 표현한다. 병자호란에서 가장 큰 전투였던 ‘북문전투’는 이 무의미함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황동혁 감독이 북문전투를
<남한산성>이 원작에서 취한 것, 혹은 배제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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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 <대장 부리바>(1962)를 보다가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의 전형성을 재인식했다. 크리스틴 카우프만은 하나의 대상으로 토니 커티스의 시선에 먼저 포착되고, 크리스틴 카우프만은 뒤늦게 그의 시선을 알아챈다. 남성이 발견하고 여성이 발견되는 관계의 익숙함은 그 순서를 뒤바꾸어 보기만 해도 분명히 드러난다. 존 버거가 <이미지>에서 남성은 보고, 여성은 보이는 자신을 본다고 통찰력 있게 지적한 대로 재현물에서 여성은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 보이는 존재로 등장하고는 했다. 자신이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도 이를 모르는 척 연기해야 했던 배우 크리스틴 카우프만의 심리는 어떤 것이었을까. 늘 카메라의 시선을 인식해야 하는 배우의 상황과 다를 바 없기에 도리어 쉬웠을까. 로라 멀비의 논의를 참고해 서술하면 연기를 하는 순간 카우프만은 카메라의 시선과 서사상 다른 배우의 시선, 그리고 관객의 시선이라는 상상적 시선까지 어림잡아도 삼중의 시선 아래 놓
배우의 얼굴에 비친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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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처음 악인의 이미지로 각인되는 순간은 진궁과의 일화에서다. 조조는 동탁 암살에 실패한 뒤 진궁과 함께 지인인 여백사의 집으로 도망치는데, 조조는 여백사의 가족들이 자신을 살해하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들을 몰살한다. 조조는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닫지만, 그 후 집으로 돌아오는 여백사까지 살해한다. 진궁이 놀라며 불의를 꾸짖자 조조는 “내가 천하 사람들을 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버리게 하진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조조가 목격자가 될 수 있는 여백사까지 모두 살해했다면, 이 일화를 진술할 수 있는 증인은 진궁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진궁은 죽을 때까지 조조와 대립하는 인물이기에, 진궁의 진술은 신빙성이 낮다. 독자들도 이 일화의 신빙성을 의심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머릿속에 각인된 살인자의 이미지는 강력해서 그 후 조조의 행위에 대한 평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미지가 가진 기만적인 힘이다.
<남한산성&g
허무주의와 신화적 장치로 점철된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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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마요.” 이야기의 끝에서 소년은 매우 간단하지만 감히 꺼낼 수 없었던 사실, 오랫동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진심을 엄마에게 전한다. 솔직히 나는 그때 소년이 엄마에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편안하게 가세요”라고 할 줄 알았다. 아니면 “사랑해요”라고 했다고 해도 별 위화감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떠나지 말라니. 방금 전 소년은 몬스터에게 숨겨왔던 진심을 고백하며 스스로 네 번째 이야기가 되지 않았던가. 소년은 마지막 순간에 가서 다시 마음을 고쳐먹은 걸까.
이야기는 언제나 경계에서 시작된다
<몬스터 콜>은 몬스터가 소년에게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 후 소년에게서 네 번째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구조를 취한다. 소년의 악몽, 땅이 꺼지고 세계가 무너지는 풍경으로 문을 여는 영화는 소년 스스로 악몽의 뒷이야기를 마무리하게끔 안내한 뒤 문을 닫는다. 소년은 아픈 엄마와의 생활에 지쳐 “이제 그만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자백한다. 소년의
이야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몬스터 콜>의 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