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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성영화시대를 살아가는 로즈(밀리센트 시먼스)와 유성영화시대에 머무는 벤(오크스 페글리). <원더스트럭>(2017)은 두개의 이질적인 세계가 이리저리 교차하다가 마침내 조우하는 여정을 지켜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를 본 후 나의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과연 토드 헤인즈는 그의 영화가 그리는 조우의 순간을 정말로 믿을까. 나는 영화가 두 세계의 조우만큼이나 그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끊임없이 의식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이르러 제시되는 해피엔딩 또한 내게는 그리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두 세계 사이의 간극과 다소 의심스러운 결합. 이 글은 그 미묘한 불일치를 응시하며 시작한다.
판타지를 경유하고서라도 만나고 싶은 세계
로즈와 벤 사이 50년의 시간 차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영화에는 두 인물간의 간극을 환기하는 순간이 자주 등장한다. 벤이 제이미(제이든 마이클)를 멀찍이서 쫓으며 미국 자연사박물
<원더스트럭>, 토드 헤인즈의 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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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와 이동, 과거와 미래, 주저함과 결단. 영화 <콜럼버스>(2017)는 이 사이에서 동요하고 성찰하며 조응하는 두 인물을 따라가는 영화다. 정적이고 묵상적이다. 영화는 미국 모더니즘 건축의 메카로 알려진 지방의 소도시명을 제목으로 삼았다. 인간, 공간, 자연이 어우러져 있지만 인위적 배치를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평범함은 값비싸다. 영화 오프닝에 등장하는 저택의 소유자였으며 콜럼버스 모더니즘 건축의 후원자였던 어윈 밀러의 말이다. 영화는 건물과 건물이 자리잡은 공간을 포착해내는 시각적 아름다움을 넘어서 진귀한 평범함이라 할 어떠한 정서에 서서히 다가간다.
<콜럼버스>는 우리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코고나다의 장편 데뷔작이다. 그는 이 작품의 시나리오와 편집까지 담당했다. 코고나다 감독은 <사이트 앤드 사운드>나 <크라이테리언 컬렉션> 등에 영화비평과 예술창작의 일환인 필름 에세이를 게재해왔다. 필름 에세이의 대상은 다양하
<콜럼버스>의 영화적 아름다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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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못>은 어두운 물속이 조금씩 밝아지고 기타 소리와 함께 물속에서 뭔가 수면 위로 불쑥 튀어오르는 소리가 나면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후의 장면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평온한 수성못에 떠 있는 오리배들뿐이다. 그러곤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음 장면에서 주인공 희정(이세영)이 오리배를 타러 온 엄마와 아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오리배에 타는 것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감독은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우리에게 소리만 들려줄 뿐 그 소리의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영화의 첫 장면에서 들었던 소리의 실체를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영화에서 들었던 것(기타 소리, 뭔가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소리)의 실체가 우리가 본 것(기타 치는 아저씨)이라고 확신하게 되는가? 지금부터 감독이 어떤 방식으로 소리의 실체를 구체화하는지 따라가보려고 한다. 우선 영화의 마지막 장
<수성못>, 반복적인 소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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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더 선샤인 인>(2017)은 여러모로 클레르 드니의 전작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작품이다. 일단 로맨틱 코미디를 연상케 하는 제목부터 그렇다. 구체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고, 관습적인 도덕률보다는 선악의 모호한 경계를 선호하고, 언어를 통한 이성적 설명보다 육체 위에 드러난 직접적인 감각을 향유하도록 했던 그녀의 작품 세계에 느닷없는 ‘햇살’이라니.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인디와이어>의 데이비드 얼리치는 이 작품을 두고, 마치 클레르 드니가 낸시 마이어스(<인턴> <로맨틱 홀리데이> 연출자)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만든 영화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로맨틱 코미디의 통상적인 장르 규칙을 완전히 무시한 버전으로. 이 영화의 장르를 굳이 구분하자면 낸시 마이어스의 전공이라 할 수 있는 로맨스물이겠지만 클레르 드니의 필터를 거치면 로맨스의 달콤한 캐러멜 코팅은 산산조각이 난다. 날것 그대로의 연애 행각이 눈앞에 펼쳐진다. 엇갈린 욕망과 상대를 향한
<렛 더 선샤인 인>이 끌어안는 사랑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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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는 곧 퀴어영화로 호명되며, 영화의 모든 상황과 감정은 성소수자 특수성의 프레임 속에서 이해되곤 한다. 퀴어 정체성을 분명히 호명하는 것은 꼭 필요하며, 반대로 섣부른 보편화가 더 위험할 때도 있다. 문제는 그들과 우리의 분리를 의심하지 않으며, 이해의 방향은 늘 우리에게서 그들에게로 향한다는 데 있다. 세바스티안 렐리오 감독의 <판타스틱 우먼>(2017)은 트랜스젠더 여성의 삶을 다루고 있으나, 관객에게 타자에 대한 일방적인 이해나 공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화는 나와 타자의 경계를 훌쩍 넘어보도록 관객을 추동하는 에너지가 있는데, 이는 일단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두드러진다.
사라지기 위해 등장하는 남자
마리나(다니엘라 베가)는 자신의 존재성을 호소하지 않고 존재한다. 그녀가 자기 인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건 의상이다. 그녀는 옅은 화장에 단정한 원피스 혹은 운동화에 바지 차림으로 등장한다. 미디어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의 외모를 재
트랜스를 하나의 태도로 밀어붙인 <판타스틱 우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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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매리언(로리 멧커프)과 딸 크리스틴(시얼샤 로넌) 사이의 갈등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딸은 독립하길 원하고 엄마는 가족 모두가 함께하길 바란다. 그러나 <레이디 버드>(2017)에는 ‘모녀’라는 낯익은 단어가 채 담지 못하는 감정의 얼룩들이 존재한다. 엄마는 딸이 어서 성장하길 바라지만 운전도, 계란 프라이도 혼자서 하지 못하게 한다. 딸이 자기 몰래 뉴욕의 대학에 지원한 것에 화가 나서 말을 하지 않는 매리언의 모습은 절친에게 토라졌던 줄리(비니 펠드스타인)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자신의 흉을 볼까봐 편지를 전하지 못하는 모습은 크리스틴이 제나(오데야 러시)를 대하던 모습과도 얼마간 닮았다. 그러나 서운함, 배신감, 동경 중 그 어떤 것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완벽하게 설명하진 못할 것이다. 기하 수업에 들어가지 않는 줄리의 마음을 단순히 ‘질투’로 정의할 수 없듯, 딸을 대하는 매리언의 마음도 하나의 감정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엄마를 대하는 크리스틴의 태도도 이
<레이디 버드>를 두 여자의 관점에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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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식이 다를 뿐 브루노 뒤몽은 스탠리 큐브릭과 같은 부류의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며 인간에게 본질이 있다면 무엇인가를 생각했고, 영화에서 직접적인 해답을 찾으려 애썼다.
브루노 뒤몽이 바뀌고 있다. <까미유 끌로델>(2013) 이후 시작된 그의 변화는,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던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아르테TV>의 방영분만 비교해보면, 2014년 방영된 뒤몽의 <릴 퀸퀸>은 2013년 같은 채널에서 방송된 제인 캠피온의 <톱 오브 더 레이크>를 훨씬 상회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악센트가 제거된 억양, 서스펜스를 제외시킨 구성, 다중 플롯을 자제하고 다중의 인물을 내세우는 전략은 그가 여전히 로베르 브레송의 후예임을 증명해준다. 하지만 겉보기에 뒤몽은 완전하게 달라졌다. <릴 퀸퀸>이 그렇듯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은 허허실실하게 만드는 코미디영화다. 그럼에도 이전보다 더 적나라하게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 상승적 구도가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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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상업영화에서 ‘디지털적 실험’이란 말 자체가 어색한 지금, 디지털 촬영을 가장 혁명적으로 활용한 곳은 방송과 웹의 세상이다. 그곳 세상에서 기획, 방영되는 프로그램의 번성은 디지털 촬영장비의 발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역으로 방송과 웹 프로그램을 영화화하는 경우도 생겼다. 세간에 뜨겁게 거론 중인 <곤지암>이 한 예다. 해외에서 페이크 다큐멘터리 장르의 영화가 간혹 엄청난 수익을 올린 사례와 비교해, 한국에서 대중의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페이크 다큐로는 <곤지암>이 현재까지 거의 유일하다. 그렇다면 <곤지암>이 방송과 웹 프로그램의 디지털적 특성을 충실하게 재현한 작품인가? 혹은 디지털적인 정신과 태도가 제대로 구현된 작품인가? 내 대답은 ‘아니오’다. 지난해에 공개된 이두환의 <혼숨>(2016)이나 좀더 예전에 나온 비셔스 형제의 <그레이브 인카운터>(2011)가 차라리 위 질문에 더 어울
<곤지암>의 영리한 공간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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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무쌍하여 5분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영화를 보는 방법은 무엇일까? 모든 기호와 상징, 대사 하나하나에 꼼꼼히 주석을 달아가는, 그래서 본문 텍스트보다 주해의 텍스트가 훨씬 두꺼워지는 독해법이 그 하나. 미리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보고, 동명의 원작 소설을 읽고, 다섯권의 만화까지 보면서 철저히 대비하는 전투태세 모드도 여기에 속한다. 하나, 그러기엔 우리의 밤은 짧다(만화책은 절판이다). 다른 하나는 정신없이 쏟아지는 기호에 현혹되지 않고 그저 각 파편들의 장면과 사건, 진행 속도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방법. 그러다보면 어느새 익숙해진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관객이라면 둘 중 하나의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후자를 추천한다. 어쨌든 우리의 밤은 짧으니까).
앨리스를 위한 장진 주사
주인공, “검은 머리 아가씨”를 이상한 나라에 빨려들어간 앨리스로 여겨도 무방하리라.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 앞으로 마구 튀어나오는 인물들은 뜬금없다. 각자가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흥미로운 대립 이미지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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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창작자는 자신의 작품이 최종적으로 관객 혹은 독자에게 어떤 체험을 시켜주게 될지 상상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정확하게 과녁의 중앙을 맞히지는 못하더라도 매번 얼추 과녁 안에 집어넣으려면 그런 종류의 상상력이 큰 도움이 된다. 따라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레디 플레이어 원>이 다수의 열광적인 반응과 동시에 적지 않은 실망 역시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열광의 근거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적을 능력이 내게 없다. 반면 실망의 근거는 아마도 뻔한 내용 혹은 너무나 익숙한 구조일 것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 불만을 표하는 이들이 그 이유를 설명할 때에 ‘뻔한 이야기’라는 단어를 피하는 것은 쉽지 않다. 훈련받은 감상자로서 나는 식상함에 관대하지만 동시에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다. 이미 세상에 여러 번 나왔던 무언가를 반복하려면 감독에게는 그만큼의 이유가 필요하다. 즉, 감독이 하려는 이야기가 스타일이나 소재, 구조를 반복
플레이어2로 살아온 사람들의 <레디 플레이어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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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미국을 뒤흔들어놓는 사건이 터진다. 한 괴한이 피겨스케이팅 올림픽 기대주 낸시 케리건의 무릎을 후려친 것이다. 라이벌이었던 토냐 하딩과 그의 파트너 제프 길롤리가 범인으로 지목된다. 토냐는 자신은 전혀 몰랐으며, 제프와 그의 친구 션이 꾸민 일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제프와 션은 징역형을 살고 토냐는 벌금형과 더불어 미국빙상연맹에서 영구제명당한다.
관찰의 시선에서 동일시의 대상으로
<아이, 토냐>는 가십을 소비하려는 미국 대중의 기이한 열정에 불을 붙였던 낸시 케리건 피습 사건을 스크린 위에 되살린다. 영화에 대한 비판은 즉각적이었다. 당시 케리건 피습을 취재했던 한 언론인은 영화는 일관되게 거짓을 말해온 토냐 하딩의 꿈을 실현해주고 그에게 면죄부를 주는 ‘판타지영화’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영화가 그의 말을 ‘진실’로 만들었거나 옹호하고 있다는 해석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아이, 토냐>는 무엇보다 ‘기억의 주관성’에 대한 작품이고,
<아이, 토냐> 속 ‘토냐 하딩’은 누구의 얼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