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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하나의 매혹적인 장면과 마주한다. 클럽에 있던 흑인들이 차례로 연행되자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클럽 앞으로 모여든다. 체포되는 친구를 걱정하는 웅성거림, 경찰에 항의하는 볼멘소리들. 그들의 음성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천천히 몰려와서는 어두운 골목을 가득 메운다. 시끄럽고 폭력적이지만 풍성한 소리들의 다발, 이 장면에서 여러 목소리가 흘러넘치며 만들어내는 위태롭고도 관능적인 에너지는 다른 여느 장면들을 가볍게 압도한다. 동시에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 같다. <디트로이트>에서 제각기 떠드는 다중의 시끄러운 목소리는 어째서 이다지도 매혹적인가. 장면이 전환되면 한 남자가 위험한 장난을 벌이고 있다. 장난감 총으로 공포탄을 쏘는 칼 쿠퍼(제이슨 미첼)의 목적은 단 하나, 총구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흑인들의 심정을 느껴보라는 것이다. 허공에 울리는 공포탄의 총성은 울분에 찬 칼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소리가
캐스린 비글로의 <디트로이트>가 진실 밝히기보다 더 관심을 기울인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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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 이 사진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른다”(<사진첩>)고 시인 비슬라바 심보르스카는 말했지만, 사랑만큼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은 많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의 상실이 과거를 소환한다. 상실은 언제나 상실하지 않았던 과거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탐구한 작가 알랭 레네의 <사랑해 사랑해>(1968)가 사랑과 상실을 소재로 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영화는 타임머신을 통해 시간여행을 하는 리데르의 이야기다. 리데르는 1년 전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려 하지만, 시간여행은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리데르의 시간여행은 가장 사랑했던 카트린과 관련된 기억들 사이를 오간다. 시간여행은 연대기를 구성하지 않고 뒤죽박죽으로 엉키고, 리데르가 죽음 직전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여기에서 뇌의 모양을 한 리데르의 타임머신은 일종의 상징처럼 보인다.
<라이크 크레이지>에서 시작된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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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버닝>을 보고 실망했다. 영화가 재미없었다거나 흥미롭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기대와 달라서 실망했다’는 뜻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내가 이 의미 없는 세상에서, <버닝>의 대사를 빌리면 ‘베이스’를 느끼게 해줄 영화를 간절하게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래의 글은 첫 번째 실망한 영화와 두 번째 다시 보고 이해한 영화에 대한 글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중에서 <밀양>(2007)과 <버닝>은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밀양>은 이청준의 1985년 단편 <벌레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고,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983년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두 영화의 다른 이야기는 당연히 두 단편의 ‘텍스트’의 차이 때문에 생긴 것이고, 또한 각 소설이 갖고 있는 다른 ‘콘텍스트’에도 영향을 받고 있다. 나는 두 번째 영화를
<버닝>, 모호한 세상에 대한 영화의 형식적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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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기봉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잊어서 안 되는 건, 그가 웬만한 상황에서 웬만한 영화는 이미 다 만들어봤다는 것이다. 그렇게 오랜 기간 다작했으니 질이 들쑥날쑥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우견아랑>(1988), <동방삼협>(1993), <흑사회>(2005), <스패로우>(2008), <화려상반족: 오피스>(2015)를 모두 감독한 감독의 폭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스타일과 개성에 갇히지 않고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주어진 한계가 그리 갑갑하지도 않고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는 그런 감독. 그는 스타일과 이야기를 편안하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다.
<독전>의 원작인 <마약전쟁>(2013)에도 제한은 있다. 중국 공안이 주인공인 영화이니 이들을 다룰 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있다. 이들은 부패해서도 안 되고 흔들려서도 안 된다. 마약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방식도
<독전>이 두기봉의 <마약전쟁>과 비교해 창의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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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것은 뭘까. 혹은 한국화한다는 것은 뭘까. 두기봉 감독의 <마약전쟁>(2013)을 리메이크한 이해영 감독의 <독전>을 보면서 범죄조직에 몸담고 있는 남자들이 모여 룸살롱에 가는 장면이 없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것만으로도 감격한다는 사실이 서글프긴 하지만, 어쨌건 왜 이 영화에는 범죄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유흥을 즐기는 장면이 없는가. 원작은 물론 <독전>이 다루는 이야기, 즉 마약조직을 소탕하려는 경찰이 약점 잡힌(혹은 변심한) 조직원을 앞세워 조직 계보의 꼭대기를 치려는 상황에서 이미 경찰이든 범죄자든 딴짓을 할 수 없을 만큼 급박한 처지에 놓였을 수 있다. 혹은 애초에 유흥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남자들을 다루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난 몇년간 한국에서 소위 한국형 누아르를 표방하며 홍콩 누아르에 기반해 만들어진 영화들에서는 남자들이 유흥을 즐길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를 마음껏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일까. 물론 아
무국적 불협화음을 자기 색깔로 만들어낸 <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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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스포일러로 시작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가 이창동의 영화 <버닝>으로 옮겨왔을 때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상할 것 없는 일이다. 심지어 몇몇 이들은 이 영화가 하루키보다 오히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에 더 닿아 있다고까지 말할 지경이다. 그러니 그 차이를 일일이 나열하는 건 어쩌면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과는 확연히 다른 이 영화의 엔딩만큼은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해미(전종서)의 방에서 (아마도) 소설을 쓰기 시작한 종수(유아인)를 두고 카메라는 갑자기 줌아웃을 하며 창밖으로 빠져 나온다. 전형적인 영화 엔딩의 모양새를 취했지만 사실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종수가 두번 서 있던 세면대 앞에서 이번엔 벤(스티븐 연)이 렌즈를 끼고 있다. 영화 내내 종수의 시선 아래 놓였던 벤이었지만 이번엔 (그를 지켜보는) 종수가 없다. 거실에서 여자에게 화장을 해주는 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장면이 바뀌면 해미
<버닝>의 냉정함에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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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판도라의 상자 앞에서 돌아선 적이 없다. 그 속에 추하고 악한 것이 있지는 않을까 미리 걱정하거나 판단하는 태도는 아무래도 가짜 같다고, 이창동은 여겨왔다. 상자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정말이지 그도 모른다.
이를테면 작가 지망생 종수(유아인)가 쓴 탄원서가 그렇다. 폭행치상 및 공무방해로 법정에 선 아버지의 선처를 위해 “(피고는) 정다운 이웃이었습니다”라고 썼다.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아는 마을 이장은 탄원서에 서명을 얹으며 말한다. “글 잘 쓰네.” 열어보지 않아도 내용물을 알 수 있는 상자처럼 결론이 정해져 있는 문장을 매끈하게 썼다는 얘기다. 아버지를 미화해서라기보다 결론을 정해놓았다는 점에서 이 탄원서는 가짜다(일단 결론이 정해지면 목표를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스타일의 저널리스트- 이건 긍정적인 의미다- 가 종수 아버지로 분했다). 종수가 하고 싶은 건 고유성을 지닌 예술인데 말이다. 메타영화로 볼 때 <버닝>은 <박하사탕>(1999)의 형식 실
<버닝>, 관계와 실존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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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릭스 포터의 삶을 다룬 <미스 포터>(2007)의 첫 장면. “결혼하지 않은 여인이 어떻게 아이를 위한 책을 쓸 수 있느냐”고 출판업자가 묻는다. 당시나 지금이나 꽤나 무례하고도 편견이 가득한 질문임에도, 현실 출판 시장에서는 자기 아이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소박함에서 시작하여 대박난 사례가 많다. <곰돌이 푸>(2011), <토마스와 친구들> 시리즈부터 <해리 포터>에 이르기까지(해리 포터의 성을 베아트릭스 포터에게서 따왔다는 얘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좋은 부모가 훌륭한 작품을 쓴다는 절대 공식은 없을 터(아마 실패 사례가 더 많지 않을까?). 어쨌든 <피터 래빗> 이야기를 준비할 당시, 베아트릭스 포터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훗날 자신의 조력자였던 윌리엄 힐러스와 결혼을 하기는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자식이 없었다(결혼 후에도 아이는 없었다). 그렇지만 어릴 적 자신을 가르쳤던 가정교사의 아이들이나
천연덕스럽게 실사의 세계로 들어가버린 <피터 래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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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티지>(2006)의 원작자 크리스토퍼 프리스트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3부작을 안 좋아했다. 그는 놀란이 슈퍼히어로영화에 심리적 사실주의를 끌어들인 게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빌딩 위를 뛰어다니는 보디빌더에 대한 이야기라고. 심리학이 끼어들 여지가 어디에 있어?” 그렇긴 하다. 하지만 놀란은 그런 걸 모르는 척하면서 심각하게 배트맨 영화들을 만들었고 그중 두 번째 영화는 걸작이다. <다크 나이트>(2008)의 심각한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플레이보이 백만장자가 시장이 되거나 정치가에게 기부를 하는 대신 가면 쓴 자경단이 되어 악당을 처치하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지 잠시 잊게 된다. 부분 부분의 심각함이 워낙 그럴싸하고 전체 그림도 말이 되어 보이고 여기저기 괜찮은 변명이 있다. 그렇다고 영화가 어떻게 배트모빌이 고담시의 러시아워를 뚫고 아무도 모르게 배트케이브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주는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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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풀2>가 <데드풀>보다 나았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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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 드니의 영화는 시작부터 경계, 국경을 다뤘다. 그녀에게 경계는 곧 몸의 다른 말이다. 데뷔작 <초콜렛>(1988)에서 소녀가 보았던 아프리카 원주민 청년의 성기는, 10여년 후에 레니 리펜슈탈이 아프리카로 귀환해 웃으면서 바라보았던 원주민 청년들의 그것과 같으면서 다른 존재다. 드니에게 그건 일종의 이물감 같은 거다. 욕망과 호기심의 대상이면서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것, 하나였다가도 떨어져 나가는 순간 타자로 인식되는 것, 드니의 영화에서 몸은 그런 것이다. 줄곧 몸을 다루어온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받아들일지 고민한 흔적이자 역사다. 그러므로 그녀가 장 뤽 낭시와 마주 앉아 대화하는 여성을 필름에 담은 것은 필연이다. 할 수만 있었다면 드니는 낭시의 저서 <코르푸스>를 한편의 영화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낭시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또는 가까워지기를 시도할 때마다 그녀의 영화적 언어는 얼마나 난해한 영토 위를 방황했던가!
<렛 더 선샤인 인>에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무슨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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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콜럼버스>(2017)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콜럼버스의 건물들에 대해서 다소 긴 설명이 필요하다. 영화잡지에 쓰는 글에 건축가 이름을 나열하며 건축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왔지만, <콜럼버스>는 어쩔 수 없는 영화다. 건축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미국 인디애나주의 콜럼버스는 미국 현대건축에서 의미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다. 중서부 농장지역에 위치한 인구 4만명의 이 작은 도시에는,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건축가가 건물을 설계했다. 그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콜럼버스에 자리 잡은 엔진 제작 공장의 소유주 J. 어윈 밀러가 만들어낸 독특한 건축 지원 시스템에 있었다. 공공건물을 설계할 때 밀러 재단이 선정한 리스트에서 건축가를 선택하면 설계비 전액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를 통해 에로 사리넨, I. M. 페이, 로버트 벤투리, 리처드 마이어, 시저스 펠리, S.O.M 같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건축
<콜럼버스>는 현대건축을 영화에 완벽하게 이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