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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상은 단조롭고 지루하고 무의미한 것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일상은 곧잘 ‘죽은 시간’(dead time)으로 취급되면서 스크린에서 지워지기 일쑤다. 한마디로, 일상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만 영화에서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짐 자무시는 <커피와 담배>(2003) 등에서 죽은 시간만으로 영화를 구성하는 데 관심을 보이곤 했지만 <패터슨>(2016)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죽은 시간을 ‘생동하는 시간’으로 되살리는 마술을 부린다. 짐 자무시는 영화의 대부분을 동일한 시간에 일어나고, 출근하고, 일을 하고,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 마빈과 함께 산책하고, 바에서 맥주를 마시는 패터슨(애덤 드라이버)의 일상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 동일한 행동. 그러니까 ‘죽은 시간’의 연쇄. 그럼에도 죽은 시간이 생동하는 시간으로 변모하는 <패터슨>의 마술은 멈출 줄 모른다. 아름답고도 신기한 마술.
죽은 시간 되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패터슨>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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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에겐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이하 <라스트 제다이>)를 싫어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라스트 제다이>를 싫어하는 관객이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떻게 봐도 완벽한 영화는 아니고, 일부러 <스타워즈> 영화의 친숙한 결을 깨려는 의도가 노골적이다. 이 시도는 대담하고 창의적이지만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들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관객은 <스타워즈 에피소드5: 제국의 역습>(이하 <제국의 역습>)을 싫어할 권리가 있다. 특히 1편에서 레아/루크를 파던 팬들은 레아가 한 솔로와 엮일 때 하늘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왜 루크가 아니라 한 솔로인 거야? 레아와 루크는 전편에서 뽀뽀도 했잖아! 게다가 신나는 전쟁 이야기를 보러 왔는데 주인공들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국에 쫓기기만 하고. 그리고 루크가 다스 베이더의 아들이라니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그리고 그 중간에 끊긴 결말은 도대체 뭐야? 역
다양성을 확대하고 젊은 세대로 넘어가려는 의지 분명한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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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에서 문학적인 것은 영화쪽이요, 이미지가 들끓고 있는 것은 오히려 소설이다.”
앙드레 바쟁은 베르나노스의 일기체 소설을 기반으로 한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를 극찬하며 이렇게 썼다. 각색자가 소설, 특히 1인칭 화자의 내면 고백을 주로 다룬 작품의 문체를 시나리오화할 때 흔히 택하는 방식은 내면의 외화이다. 이것은 주로 사유의 사건화와 문장의 대사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브레송은 원작의 문장들을 대사로 전환하지도, 넘치는 이미지들을 영상화하지 않았다. 바쟁은 브레송이 표면적인 스토리를 흉내내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무미건조한 어조와 절제된 이미지들을 이용해 “이야기나 드라마의 진수에, 가장 엄밀한 미학적 추상화에 도달”하는 것을 의도했다고 평가했다.
짐 자무시의 <패터슨>(2016)은 여러모로 바쟁의 브레송 분석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은 원작을 가진 영화는 아니다. 짐 자무시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패터슨>, 도시를 부유하는 시상(詩想) 수집가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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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젠베르크는 전자를 관찰하는 현미경을 생각했다. 아주 작은 전자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파동이 짧은 빛이 필요한데, 파동이 짧은 빛은 에너지가 커서 이 빛(광자)이 전자와 충돌하면 전자는 임의의 방향으로 튕겨나간다. 즉 전자를 정확히 관찰하려 하면 전자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만약 전자를 변화시키지 않기 위해 파장이 긴 빛을 쏘게 되면 우리는 정확한 전자의 위치를 관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변화된 전자 혹은 희미한 전자를 관찰할 수밖에 없다. 정확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다.
이 불확정성 원리는 코언 형제의 주요 테마 중 하나다. 코언 형제는 그의 영화 중 <시리어스맨>(2009)과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2002)에서 불확정성 원리를 명시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특히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서 불확정성 원리는 변호사가 주인공 에드(빌리 밥 손튼)의 무죄를 설파하기 위한 장광설의 주요 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변증법 <세 번째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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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행길은 멀다. 인간의 뇌가 처리하는 정보의 양과 질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느라 바쁜 초등학교 시절은, 대부분 익숙한 정보만 처리하는 노년의 같은 기간보다 느리다. 마찬가지로 초행길에 들어선 여행자의 시간은 낯선 정보를 인지하고 판단하느라 분주하게 느리다. 시간의 빠르기는 한편으로 우리 뇌가 받는 보상 혹은 스트레스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놀이공원에 간 아이의 하루는 즉각적이고 연속적인 보상을 누리느라 한 시간처럼 지나가지만 시댁을 찾은 며느리의 한 시간은 하루처럼 느리다. 처가에 간 사위의 시간은 그보다는 빨리 흐를 공산이 크다. 그러니 한 지붕 아래 있어도 각자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기 마련이다. 목적지에 이르러야만 보상이 주어지는 초행길의 경우 의지와 무관한 새 정보들이 밀려드는 가운데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빠른 결정을 내려야 하는 탓에 멀고 느리다. 요컨대 초행이란, 결과가 불분명한 선택의 연속이 시간을 늘리고 물리적 거리를 변화
<초행>의 선택이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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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엔딩이 언급돼 있습니다.
(노르웨이에 살고 있는) 한 남자가 사랑하는 아내의 바람대로 (콜롬비아에서) 아이를 입양한다. 하지만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조차 되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아이의 카시트를 사러 가던 아내가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텅 빈 집에 (아직)아버지가 되지 못한/않은 남자와 (양)엄마를 잊지 못하는 아이가 남았다.
설정은 깎은 듯 정확하다. 그리고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간다. ‘아버지’ 역할에 서툰 남자 키에틸(크리스토퍼 요너)은 엄마를 잃고 상처받은 소년 다니엘(크리스토페르 베치)을 도닥여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 한편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하기에 6살 다니엘은 너무 어리다. 다니엘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키에틸은 다니엘의 생모를 찾아 아이의 고향 콜롬비아로 향한다. 낯설지만 동시에 낯설 수 없는 콜롬비아에서 다니엘과 키에틸은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으며 새로운 부자 관계를 맺은 다음 노르웨이로 돌아온다. 완벽하게 짜인 이 여정에
<나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부성애를 찾아가는 여정이 전부라 할 수 없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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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편에 달하는 시를 썼지만 생전에는 단 일곱편만 발표한 미국의 19세기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다룬 <조용한 열정>을 보러 가는 길에 나는 지하철에서 내려 오랫동안 걸어야 했다. 피아노 한대가 놓여 행인 중 누구라도 연주할 수 있는, 버스 이외의 차량을 통제해 수많은 버스킹이 ‘안전하게’ 상시적으로 열리는, 어느 슬프게 운명한 시인의 단골 다방이 남아 있는 거리였다. 그런가 하면 종합병원의 장례식장을 지나야 하는 길이기도 했는데, 그때 나는 그 건물에 당당하게 자리한 스타벅스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창가 자리에서 누군가들이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들여다보면서 일종의 생활을 변함없이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
<조용한 열정>은 에밀리 디킨슨(신시아 닉슨)의 삶을 여성, 종교, 가족, 지적 몰두, 도덕과 윤리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 들어가는 영화다. 평생 미국 매사추세츠의 작은 마을 애머스트를 벗어나지 않았던 그가 한
<조용한 열정>, 시인이자 여성이었던 에밀리 디킨슨의 예술적 성장과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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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도시 만토바(Mantova)가 유명해진 데는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가 한몫했다. 화려한 궁전을 배경으로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며 여성 편력을 자랑하는 ‘만토바 공작’을 통해서다. 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들 가운데서도 만토바를 오페라의 주요 배경으로 삼은 데는 도시의 퇴폐적일 정도로 화려한 과거가 돋보이기 때문일 테다. <리골레토>는 16세기 배경의 오페라인데, 당시 만토바의 곤차가(Gonzaga) 가문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더불어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영주였다. 곤차가 집안이 거주하던 ‘공작 궁전’(Palazzo Ducale), ‘테 궁전’(Palazzo Te) 등은 지금도 만토바의 영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말하자면 화려한 오페라의 배경으로 등장한 만토바는 실제로 부와 권력을 가진 패권도시였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 펼쳐진 광대한 평야 덕분이었다. 포(Po)강 유역에 펼쳐진 끝없는 평야, 곧 파다나(Padana)의 대표
만토바와 베르가모, 포강 유역의 곡창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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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식 감독이 여러 번 강조한 것처럼 <로마서 8:37>은 번뇌하는 젊은 전도사 기섭(이현호)의 기도로 시작하고 끝맺는다. 오프닝 시퀀스의 건조한 기도와는 달리, 처절하게 이어지는 클로징의 기도는 직접적이든 혹은 간접적이든 연루된 자의 책임에 집중하는 영화의 주제를 함축한다. 그러나 보다 주목되는 건 기섭의 입에서 발화된 기도가 아니라 기도 뒤에 단정하게 떠오른 활자다. 처음과 끝의 텍스트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 동일하다. 이 문장은 기섭의 기도 이후 암전된 검은 화면 위에 조용히 떠오른다. 문장의 출처이자 영화의 제목이 뒤이어 등장하기에 그저 평범한 타이틀 시퀀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활자로 표현된 성경은 마치 암호처럼 떠오르고 사라지는 동안 잔상을 남겼다. 이제 성경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에서 해석을 필요로 하는 문장이 된다. 처음과 같은 텍스트가 영화의 내러티브를 통과한 뒤 다시 떠오를 때, 그것은
<로마서 8:37>이 품은 영화적 함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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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봉준호에게 디테일이란 카메라의 객관성을 증언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봉준호가 인물들을 자세히 관찰할수록 관객은 인물과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봉준호의 카메라는 인물들의 낯설고 이상한 모습까지도 그대로 포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괴물>(2006)에서 강두(송강호)가 손님이 시킨 오징어 다리를 떼먹는 신은 강두가 한치 앞도 못 보는 캐릭터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강두는 보지 못한다. 관객은 본질적으로 보는 자이기에 보지 못하는 자는 관객에게 타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관객은 보지 못하는 자들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외부에서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보게 된다.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여주는 것은 봉준호뿐만이 아니다. 만국노동자들의 에스페란토를 만들고 싶어 했던 채플린의 영화 속 ‘떠돌이’들은 모두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물정에 밝지 못한 ‘떠돌이’들은 자신의 불행을 야기하는 사회적 모순을 보지 못한다. 관객은 이들을 멀리서 보게 되고
<7호실>은 삶의 실재를 무엇으로 환유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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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마루에 누워 막대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 빨간 줄무늬 티셔츠와 초록색 고무줄 치마를 입은 채 맨발로 해변을 걷고 싶다. 음악 시간에 배운 합창곡을 소리내어 불러보고 싶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를 보며 우리는 어딘가 다른 곳으로 떠나는 꿈을 꾼다. <요시노 이발관>(2003), <카모메 식당>(2006), <안경>(2007),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2012)로 이어져온 영화들이 슬로 라이프 무비, 힐링 내지 치유계 영화라 불려왔던 이유다.
달콤한 환상계에서 비정한 현실계로
5년 만의 신작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2017)는 치유계 판타지에서 제법 진지한 리얼리즘쪽으로 감독의 세계가 살짝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사이 <NHK> 드라마 <낭독가게>를 만들기는 했지만 고립된 공간에서 나카하라 주야의 시 낭독을 통해 상실감을 치유해나가는 방식은 전작들과 연장선상에 있었다. 싫어하는 세계를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가 보여주는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