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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말로의 해안가에 위치한 샤토브리앙의 무덤을 바라보며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진지한 자문이다. <다가오는 것들>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의 바탕에는 이 질문이 자리한다. 영화 속 딸의 언급처럼 바닷가의 묘지란 밀물이 밀려오면 잠길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장소지만, 누군가는 그곳을 택했다. 동일한 교육을 받은 사람, 일상을 공유하는 가족, 가까운 사람들조차 상대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니 세상 누군가가 완전히 남의 입장을 이해할지는 미지수다. 미아 한센-러브 감독은 이러한 주제에 크게 두 가지의 입장에서 다가간다. 먼저, 일상적 삶을 공유하는 가족 구성원들이 영화 전반부의 관찰 대상이 된다. 언뜻 평화롭게 보이는 나탈리의 식구들은 어느 순간 한 가지 어긋남으로 인해 완전히 분리된다. 남편조차 자신의 애인이 가져올 파장을 모두 예상하진 못한 듯 보인다. 이어서 두 번째의 관찰 대상은 사제 관계이다. 나
[이지현의 영화비평] 순리의 지혜 <다가오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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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을 본 관객이 리메이크 영화를 관람한다면 그 시선은 두 스크린을 동시에 향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시선이 눈앞의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리메이크 영화를 향한다면 또 하나의 시선은 기억 속 원작 영화를 불러낸 가상의 스크린으로 향한다. <벤허>가 원작의 축약과 반복을 지향한다면, <매그니피센트 7>은 원작에 대한 해석을 감행한다. 물론 원작을 대하는 이러한 차이가 리메이크 작품의 성패를 결정짓는 절대 요인은 아니지만, 이 두 작품에 한해서는 그 차이가 작품의 질적 성패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미리 밝히자면 내 입장은 <벤허>는 참담한 실패이고, <매그니피센트 7>은 <황야의 7인>에 못지않은 재미를 주는 작품이라는 쪽이다.
<벤허>, 거두절미의 서사와 사라진 아우라
티무어 베크맘베토프의 리메이크 이전에도 <벤허>는 세번이나 제작되었지만, 우리가 <벤허>라 부르는 작품은 오로지 윌리엄 와일러의
[안시환의 영화비평] <벤허>와 <매그니피센트 7>의 서로 다른 리메이크 방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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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의 신작이자 야심작이었던 <고산자, 대동여지도>(이하 <고산자>)는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 내 기억으로는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이래 이만한 흥행 실패는 그의 경력에 없었다. 민중의 편에 선 지도장이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획 실패이고, 흥행사로서 강우석의 신뢰가 사라졌다는 징조이며, 예능 프로그램의 스타가 아닌 영화배우로서 차승원이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고산자>는 강우석에게나 차승원에게나 필생의 역작이었다는 점에서 엄청난 재앙인 것이다.
<공공의 적> 이래 대다수 그의 작품을 일관되게 지지해왔던 평자로서 나는 <고산자>가 재미있었다. 경직된 플롯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봤을 때도 상당한 감동이 있었다. 왜 그런가를 생각해보니 이 영화가 김정호(차승원)의 삶에 관해 새로운 앎을 주는 걸 아예 포기하고 복종적일 만큼 겸손하게 그의 삶을 최소한으로 재현하
[김영진의 영화비평] <고산자, 대동여지도>와 <밀정> 추석 연휴 한국영화 두편에 대한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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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다큐 PD나 시사프로그램 담당 기자들이 가장 쉽게 여기는 일 중 하나는, 북유럽에 가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이렇다. 북유럽에 가보니 저렇더라. 바야흐로 우리도 저렇게 바꿔야 할 때다.’ 이러면 원고가 완성되니 얼마나 쉬운가. 취재도 쉽다. “당신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세요” 해서 촬영하고 “자랑해주세요” 해서 인터뷰를 따면 된다. 북유럽 취재에서 어려운 일은 살인적인 물가를 견디고 돌아와 처리하는 출장비 정산 뿐이라는 말을 할 정도다. 핀란드든 덴마크든 혹은 방글라데시든 쿠바든 그곳에 가서 시민들의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를 취재해 보여주기는 쉽다. 취재 아이템을 선정하는 기획회의에서 문제 제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So What? 그래서 어쩌자고?” 마이클 무어는 이번 신작에서 “(어느 나라나 문제가 있겠지만) 내 임무는 잡초가 아닌 꽃을 따는 것”이라고 했는데, 꽃이야 얼마든 찾을 수 있지만 관건은 그 꽃을 어떻게 심고 가꾸느냐에 있다. 다른 토양에서 자라던
[송형국의 영화비평] ‘여성성’에서 해결 방법 찾은 <다음 침공은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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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에서 시작해 <터널> <덕혜옹주> <인천상륙작전> 순으로 이어진 나의 올해 여름 한국 블록버스터 관람은 극심한 메슥거림을 느끼는 것으로 끝났다. 극장가에서 자취를 감춰가던 <인천상륙작전>을 마지막회에 관람했는데 화면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과 비례해 속이 계속 울렁거렸다. 생각해보니 <덕혜옹주>를 볼 때도, <터널>을 볼 때도 그랬다. 스크린에선 격정적인 상황이 펼쳐지는데 나 스스로는 납득이 가지 않으면서 불편함을 호소하는 신체적 반응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영민한 창작자는 그 시대에 과잉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표현하지 않는다. 표현한다 해도 소용없기 때문이다. 올여름 한국 블록버스터들은 이미 과잉으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소란스럽게 부연하는 것으로 내겐 보였다. 중요하니까 봐주고 감동해주세요, 라고 호객하는 제스처들이 요란한 가운데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없는 기
[김영진의 영화비평] <터널> <인천상륙작전> <덕혜옹주>에서 감지되는 불길한 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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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책에 담긴 내용을 요약하거나 줄친 정도로 영화 <히치콕 트뤼포>를 바라본다면 곤란할 것 같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 생각해본 적은 없는, 그래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몇 가지 요소들이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부각되고 있다. 앨프리드 히치콕이란 인물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그들이 읽었던 인터뷰집 <히치콕과의 대화>에 대한 이야기가 그 중심에 놓인다. 한마디로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트뤼포가 아니라 ‘히치콕’이다. 트뤼포가 쓴 히치콕에 대한 인터뷰집을 읽은 자를 위해 영화가 제작되었고, 히치콕의 작품 세계 전체를 아우르기 위한 목표로 영화는 자신의 여정을 짜맞추고 있다. <필름 코멘트>의 평론가인 연출자 켄트 존스는 과감하게 나머지 단서들을 삭제해간다. 마틴 스코시즈, 웨스 앤더슨, 리처드 링클레이터, 올리비에 아사야스 등 수많은 감독들의 인터뷰 내용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만, 감독이 목표한 주요한 내용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녹음기
[이지현의 영화비평] 히치콕이 스스로를 영화에 비추어서 표현하는 과정에 주목한 <히치콕 트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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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다큐멘터리 <내셔널 갤러리>가 미술관을 다룬 다른 다큐멘터리와 비교해 확연한 형식적 차이가 있음을 짧게나마 ‘<내셔널 갤러리> 프리뷰’(<씨네21> 1069호)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때 구체적인 작품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혹자는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이름을 비교 대상으로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내셔널 갤러리>가 다른 작품과 어떻게 다른지를 자세히 분석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적절한 비교 대상을 선별하는 것이 곤혹스러울 뿐만 아니라 <내셔널 갤러리>의 방식만이 옳다고 주장하거나 다른 작품과 그저 맥없이 비교하는 데 그치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령 과거를 재현하는 것 역시 현재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소쿠로프의 방식이라면 와이즈먼은 철저히 현재를 기록하되 그것이 과거와 상상적 연결점을 갖도록 만든다. 한쪽을 선호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어떤 것이 낫다거나
[김소희의 영화비평] <내셔널 갤러리>와 프레더릭 와이즈먼이 포착한 신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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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에는 두 부류의 동물이 살고 있다. 하나는 두발로 걷는 동물, 다른 하나는 네발로 걷는 동물이다. 전자는 인간을 닮고자 하고 후자는 실제 동물에 다가가 있다. 이러한 구분을 난감하게 하는 작품도 있다. 미키마우스와 플루토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초기의 미키마우스와는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미키는 점차 ‘사람-소년’으로 진화해왔다. 바지에 윗옷을 걸치고, 장갑을 끼고, 밤에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자고, 마침내 반려견으로 플루토를 거느리기에 이른다. 주인인 미키는 사람의 말로 명령을 내리고, 반려견 플루토는 멍멍거리며 따른다.
디즈니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에 이어, 두 번째로 준비한 장편애니메이션은 <밤비>(1942)였다. 라이브 액션의 배우처럼 인간 백설공주를 다루었듯이, 이제 <밤비>에서 동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애석하게도 <밤비>는 중간에 치고 들어온 <피노키오>와 <판타지아
[나호원의 영화비평] 애니메이션에서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마이펫의 이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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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엠 러브>(2009)를 보면서 루카 구아다니노가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를 탐하는가 싶었다. <비거 스플래쉬>(2015)를 보다 비스콘티의 이름을 슬며시 지우기로 했다. 구아다니노의 영화에 귀족형 노스탤지어나 엄격한 스타일은 없다. 차라리 그는 귀족을 닮으려 환장한 인간들을 다루는 쪽에 가깝다. <아이 엠 러브>에서 러시아 복원가의 딸 엠마는 밀라노의 사업가와 결혼하면서 고향을 잊는다. 그녀는 성공한 부르주아의 삶을 몸에 새기며 살았다. 아들의 죽음으로 그녀는 가면의 삶을 깨닫는다. <아이 엠 러브>가 귀족을 열망하는 부르주아에 대한 비판이라면, <비거 스플래쉬>는 신흥 귀족으로 행세하는 문화 권력의 삶으로 시선을 돌린 영화다. 마리안은 스타디움의 관중 앞에 서기 전 침을 퉤 뱉는 가수였다. 과로로 목수술을 감행한 그녀는 판텔레리아 섬에서 안락한 휴가를 즐긴다. 어딜 가나 최고급 복장에 우아한 행동을 잃지 않는 그녀, 과연
[이용철의 영화비평] 타자에 대한 몰이해의 관점으로 본 <비거 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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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의 <부산행>이 비평할 가치가 있는 영화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것이다. 칸국제영화제 상영 직후와 국내 개봉을 위한 언론 시사회 직후에 호평이 대다수였던 것과 달리 내 주변의 영화 종사자들 사이에선 이 영화가 이야기 굴곡이 없고 평평하며 필요 이상으로 신파적이고 전개가 익숙해서 기대만 못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건 영화와 관객이 만나는 사이에 비평이 개입할 편차가 거의 없다는 얘기기도 하다. 재난영화가 흔히 그렇듯이 이 영화 속 재난에도 은유가 들어 있지만 이건 너무 직접적이고 투명한 은유라서 누가 굳이 논평하는 게 촌스러울 것이다. 다만 이 영화가 현재의 한국 사회가 일상적으로 당면한 재난을 정치적 올바름을 지닌 태도로 묘사했다고 보는 평들에 대해선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굳이 평가하자면 이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은유를 반박할 수 없는 층위에서 입에 침 바르고 얘기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영화에 가깝다.
<부산행>에 떼로 등장하는 좀비
[김영진의 영화비평] 한국 사회의 일상적 재난을 묘사하는 <부산행>의 방식에 과연 문제의식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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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코너리의 제임스 본드를 좋아한 적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영화보다 책을 먼저 읽었기 때문인 것 같다. 책에 나오는 본드도 그렇게까지 맘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그만의 역사가 있었고 각각의 책에서 겪은 모험은 그의 몸과 정신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여전히 개망나니 같은 놈이었지만 그래도 죽은 여자친구와 아내에 대한 슬픈 기억을 지우지는 않는 그런 개망나니였다.
그런데 숀 코너리의 본드는 영화가 나올 때마다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당연히 그는 소설 속 본드보다 얄팍했고 나에겐 전혀 매력이 없었다. 남는 건 정부 돈으로 여자를 후리고 다니는 영국인 중년 남자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었는데, 그건 내 관심 밖이었다. 뒤늦게 대니얼 크레이그의 본드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숀 코너리,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넌의 본드와 달리 크레이그의 본드에겐 출생연도와 지울 수 없는 역사가 있었고 그 역사
[듀나의 영화비평] 제임스 본드의 비정상적인 장수와 제이슨 본의 이유 모를 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