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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계급이란 없다. 신분만이 있을 뿐이다. 계급은 상승할 수 있다. 신분은 세습된다. 시험이라는 계급 사다리에서조차 가로막대가 사라지고 있다. 조건 좋은 월세방이 나오면 가난한 자들끼리 앞을 다퉈야 한다. 열심히 일해온 직장에서 쫓겨나도 해고 사유는 매끄러운 한 문장만 통보받는다. 뭘 잘못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알 수 있는 건 해고자 명단에 들 경우 어떤 신세가 되는지다. 연대해 저항하면 도매금으로 묶여 해고될 뿐이다. 힘을 합쳐 싸울 파놉티콘이 눈에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디지털과 금융자본이 대표하는 현대 권력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글로벌 가치사슬 중 어느 고리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연대할 수 있는 건 가족뿐이다. 개인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시스템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한다…. 이상은 <기생충> 이야기를 쓴 게 아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작 <레트로토피아>(Retrotopia)를 한국적으로 해제해본 것이다. 그에 따
<기생충>의 세계에 담긴 회귀 혹은 후퇴한 현재와 유동하는 약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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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봉준호만큼 자신의 영화를 명쾌하게 설명해내는 이도 드물다. 실은 적지 않은 감독 인터뷰가 영화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어떤 이는 자세한 설명을 거부하고 누군가는 일부러 모호한 미로를 만들기도 한다. 최악은 결과물보다 많은 의미를 말로 덧붙이는 경우다. 이런 경우 종종 장면이 아니라 말에 설득되는 때도 있다. <기생충>은 다르다. 솔직히 영화의 의미를 알고 싶다면 봉준호의 인터뷰를 읽는 것 이상의 정확한 가이드가 없을 것이다. 정교한 건축물처럼 영화를 설계하는 봉준호는 또 다른 의미에서 비평의 쓸모를 무력화하는 감독 중 한 사람이다. 어쩌면 그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 이토록 많은 말과 해석은 필요치 않을지도 모르겠다.
<기생충>과 관련하여 봉준호 감독이 남긴 무수한 말 중에 특히 눈에 들어온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칸국제영화제 수상 전 “이 영화에 대해선 여한이 없다. 할 만큼 다 했다”는 인터뷰였는데, 겸양의 표현이었겠지만 결과적으
<기생충>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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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 <보희와 녹양>은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중학교 1학년 보희(안지호)의 성장을 다룬 영화다. 영화는 어느 날 돌아가신 줄 알았던 아빠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보희가 동갑내기 단짝 녹양(김주아)과 함께 아빠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로드무비 형식을 취하고 있다. 외형상으로 얼핏 줄거리만 접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그렇고 그런 이야기라고 단정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주인공이 시련을 겪고 그 시련을 통해 성장하는 단순한 로드무비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이 영화가 돋보이는 점은 ‘영화 속의 영화’를 통해 영화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처음 이 영화를 보면서 의아했던 것은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두명의 남자(‘자살하는 남자’와 ‘모자 쓴 남자’)였다. 이들은 영화의 후반까지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들의 존재를 감독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왜 감독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이 두 남자의 뒷모습을 보여주는가
<보희와 녹양>의 오프닝 시퀀스의 두명의 남자, 두개의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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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면이 뿌옇다. 어떤 사태의 실체를 파악하기란 탁한 창밖을 내다보는 일과 같다고 말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화면이 조금씩 선명해지면 차창 밖으로 취재진이 보인다. 저 기자들은 이번 사안을 선명하게 보여줄까. 영화 속 기자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취재하는 첫 국민참여재판의 부장판사가 누군지도 몰라본다. 실제 기자들이 그 정도로 수준 이하는 아니지만, 기자 생활 19년 중 8년 정도를 사회부에서 근무한 나는 이 장면이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범죄 관련 보도는 제한된 자료와 취재원의 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유명인의 비리 사건이 아닌 형사 범죄를 다루는 경우 더욱 심하다. 검경의 수사 결과 브리핑이, 언론이 보도할 수 있는 전부인 경우가 대다수다. 그 다수 중의 대다수는 법원 최종 판결이 아닌 수사기관의 영장신청 단계까지만 비중 있게 보도한다. 비난하기 쉽기 때문이다. 재판을 치르기도 전 ‘공소사실’은 종종 ‘사실’이 돼버린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한국 언론에 의해 수시로 훼
<배심원들>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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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바르다란 영화를 무척 사랑했다. 어느 순간부터 바르다와 바르다의 영화를 분리해내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의 내밀한 마음은 둘 중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른 채 그들을 향해 내달리곤 했다. 짐작건대 누군가는 나와 꼭 같은 마음으로 바르다의 영화를 껴안았을 것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2008)이 유언장이 아니었음에 안도하고, 비주얼 아티스트로도 활동하며 끝없이 예술적 영토를 확장해나가는 바르다의 재능과 열정에 경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끝내 불안감을 감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이 마지막 인사가 아니기를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아녜스 바르다 특별전이 열리고 있을 때 그녀의 마지막 소식이 들려왔다. 이기적이게도 나는 그날 그 극장에 있지 않았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파고들 기억 하나가 새겨지지 않았으니 정말 다행일 수밖에 없었다. 늦게 소식을 접했다면 <방랑자>(1985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속 세트에서 생토뱅 쉬르메르까지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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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주의에 대한 거부와 반발심.’ 영화의 제작진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엄숙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영화 <김군>의 중요한 제작 목적이었던 것 같다(<씨네21> 1206호 기획 기사).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도 넘은 왜곡’에 대한 반발이 아닌, 엄숙주의에 대한 반발이라니. 이러한 발언은 광주 시민의 편에 선 영화 속 입장과도 언뜻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발언과 영화에 관한 반응을 두루 살피다보면 이같이 강조해야 했던 이유를 수긍하게 된다. ‘지만원의 주장에 맞선 광주 시민들의 대응’은 <김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문제는 이러한 논의가 다시 좌우 프레임 속에 짜맞춰진다는 점이다. 프레임을 벗어나 광주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나의 이미지에서 출발해 장르적인 형식으로 광주를 보여준 <김군>의 시도에 우리는 더 주목해야 한다.
이미지와 실제의 격차
엄숙주의에 대한 강조는 좌우로 대변되는 익숙한 프레임에서
매혹의 대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김군>이 가진 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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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는 아일랜드의 사회복지 문제를 다룬 영화다. 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이자 시나리오작가인 로디 도일(<커미트먼트>(1991))의 시나리오를 같은 아일랜드 출신의 패디 브레스내치(<아이 웬트 다운>(1997), <비바>(2015)) 감독이 연출했다. 더블린에 사는 로지 가족은 집주인이 집을 팔겠다고 통보하면서 7년간 살았던 임대주택에서 쫓겨난다. 주인공 로지(사라 그린)와 그의 남편 존(모 던퍼드) 그리고 네명의 자녀들은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리고 홈리스가 된다. 더블린시가 마련한 대책은 호텔 명단을 주고 그들이 방을 구하면 시에서 숙박비를 지급하는 것이다. 로지의 가족과 같은 처지의 가족들이 많아지면서 호텔 방을 구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영화는 로지가 조그마한 자동차에 의지해 자녀들을 학교에 등하교를 시키면서 하룻밤이라도 잘 곳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로지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로지>가 절망을 보여주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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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은 문득, 시작한다. 바튼(제레미 레너)의 가족이 전원의 집 주변에서 한가한 오후를 보낸다. 잠시 후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 장면의 정체는 뭔가. 이어 크레딧이 나오고 현재로 돌아오는데 전편의 엔딩에서 대충 몇주가 지난 시점이다. 그렇다면 첫 장면은 불과 몇주 전의 것이다. 관객으로 치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이하 <인피니티 워>)를 본 게 꼭 1년 전이니 당시의 장면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첫 장면은 플래시백인가? 정확히 말하면 ‘아니다’. 바튼은 <인피티니 워>에 나오지 않았다. 즉, <엔드게임>의 첫 장면은 ‘새로운 장면’이다. 굳이 표현하면 ‘과거의 미래형’인 셈이다. 헛소리처럼 들리겠으나, 어쨌든 영화예술에서만 가능한, 우리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기술이다. &l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기록된 사실, 역사가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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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리스>의 내용은 단순하다. 사랑하지 않는 부부, 그 사이에 한 아이가 있다. 자신이 부모에게 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이는 그다음 날 종적을 감춘다. 남편과 아내는 아이를 찾기 위해 애쓰지만 아이는 결국 찾지 못한다. 영화의 중요한 지점은 존재가 아니라 부재에 있다. 문제는 이 부재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존재일 뿐이기에 부재는 존재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 즉, 부재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할 자리를 보여주는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영화평론가 김소희는 “부재의 시간은 부모가 수색구조 단체와 함께 숲과 폐건물, 병원을 옮겨 다니며 알로샤(마트베이 노비코프)를 찾는 장면으로 채워진다”고 말한다 (<씨네21> 1204호 <러브리스> 영화비평). 부재가 현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찾아 공간을 떠도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리바이어던>(2014)의 빈 공간은 부재를 찾아 떠도는 주체의 자리에 관객을
<러브리스>가 비극적인 세계와 단절된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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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의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걸어가는 한 남자의 얼굴에 미묘한 결기가 서려 있다. 미동 없는 느린 걸음으로 그는 카자흐스탄의 익숙한 거리를 걷는다. 그런 남자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최선을 다해 카메라가 그를 쫓는다. 영화의 서막을 여는 느릿한 파노라마 화면의 막바지 즈음, 관객은 이 지긋한 노년기 남성이 ‘황해도 몽금포 부근에서 출생한 촬영감독 김종훈’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자이며, 그렇기에 더이상 울지 않는 인물이다. 오직 한장의 사진이 그런 그의 마음을 드러내 보인다. 동료들과 대사관 회의를 가던 도중에 찍은 오래된 기념사진 한장이 그 마음속 징표가 된다.
외상적 디아스포라의 가장 아이러니한 순간들
다큐멘터리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은 김소영 감독의 ‘망명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으로, 한국 사회가 낳을 수 있는 외상적 디아스포라의 가장 아이러니한 순간을 뒤쫓는 영화다. 1956년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이 시간을 봉인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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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유머 하나. 미연방수사국(FBI)과 미 중앙정보부(CIA) 그리고 소련의 국가안보위원회(KGB)가 숲에서 토끼를 잡아오라는 미션을 받았다. FBI는 숲에 들어가 수색을 시작하고 24시간 뒤에 토끼가 도망쳤다는 결론을 내렸다. CIA는 숲을 수색한 지 4시간 만에 토끼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KGB는 숲에 들어간 지 20분 뒤 피투성이가 된 곰 한 마리를 끌고 나왔다. 그리고 곰이 소리쳤다. “제가 토끼입니다! 제 부모님도 모두 토끼였습니다!”
이 유머를 듣고 웃으려면 우리는 피투성이가 된 곰에게 감정이입을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피투성이 곰과 거리를 둬야 한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은 “희극을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하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거리두기는 단지 웃음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영화는 수동적이며 압도적이어서 선동에 쓰이기 좋은 매체였고, 이런 영화적 속성에 영화 스스로 저항하는 하나의 방식이 거리
<스탈린이 죽었다!>의 웃음을 위해 거리를 둔 결과 생겨난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