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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기억의 진실에 관한 영화였다면,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그저 평범한 영화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매력은, 실제와 허구가 뒤엉키며 존재하는 기억의 논리가 영화의 존재 방식이자 우리가 사는 세상의 리얼리티와 맞물린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연기자가 ‘가짜 눈물’의 힘을 빌려 슬픔을 연기한다면 그 슬픔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그리고 그 가짜 눈물에 속아 눈물을 흘리는 관객의 감정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진실과 허구 사이를 끊임없이 진자운동해야 하는 영화의 운명.
파비안느가 리허설 장면에서 얼어붙은 이유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배우인 ‘카트린 드뇌브’가 자신과 유사한 입장의 파비안느를 연기할 때, 우리는 어디까지가 카트린 드뇌브이고 어디까지가 파비안느인지 확신할 수 없다. 실제의 배우와 가상의 인물이 혼재되며 구현된 형상을 만나는 것, 그럼으로써 영화 그 자체를 경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카트린 드뇌브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이 영화의 진실을 보여주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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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30분에 달하는 <아이리시맨>의 기나긴 상영시간에서, 주요 인물인 지미 호파(알 파치노)는 영화 시작 45분 뒤에야 등장한다. 그는 영화가 언급하는 것처럼 실제 미국의 역사에서 “1950년대의 엘비스보다 1960년대의 비틀스보다 유명하고 심지어 대통령만큼이나 유명한” 인물이었다. 호파는 일찍부터 노동운동에 뛰어들기는 했지만 1932년 디트로이트의 트럭기사노조 299지부에 노동조직가로 초대받으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03년에 창설된 국제트럭기사노조(International Brotherhood of Teamster, 이하 IBT)는 1933년에 7만5천명의 노조원을 보유한 데 지나지 않았지만 호파가 이 노조에 들어와 맹활약하면서 1951년에는 100만명의 노조원을 거느리는 미국 최대 노조 중 하나가 되었다. ‘팀스터’란 일반적으로 트럭기사를 뜻하지만, IBT에는 일반 차량 기사뿐 아니라 창고업자와 그 밖의 운송 관련 노동자들까지 가입할 수 있었다.
“망할
영화 <아이리시맨>과 역사 속 국제트럭기사노조, 마피아, 그리고 미국 대통령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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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로 현실을 수선하기.” <아이리시맨>을 보다가 문득 로베르 브레송의 저 유명한 문구가 뇌리를 스쳤다. 3시간이 넘는 상영시간 동안 영화에 매몰됐다가 잠시나마 영화 바깥으로 의식이 빠져나간 건 늙은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니로)이 딸에게 냉혹한 현실을 전해 듣는 장면 때문이었다. 평생을 마피아의 히트맨으로 일했던 프랭크는 말년에 요양원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낸다. 영화 내내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바라봤던 둘째딸 페기(안나 파킨)가 이제 자신을 만나주지도 않자 프랭크는 답답한 마음에 다른 자식에게 하소연을 하러 간다. 그때 또 다른 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자신들은 아버지한테 혼날까 평생을 두려움에 떨면서 살았다고. 그걸 여태껏 몰랐냐고.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 순간 나는 내가 이 영화에, 그리고 프랭크라는 인물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프랭크의 시점에서 전개되던 영화는 페기의 순진무구한, 혹은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시선을 잠깐씩 보여주는 게 전부다
<아이리시맨>에서 <겨울왕국2>까지, 2019년 시네마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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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팀의 크리스마스 파티, 디에고가 구석 테이블에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다. 항상 축제의 중심에서 좌중을 장악하던 이전과 상반된 모습이다. 사운드가 페이드아웃되고 디에고가 공허한 눈빛으로 바닥을 응시한다. 혼자만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듯이. 1990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가 아르헨티나에 패배한 이후 급변한 디에고의 상황이 단적으로 드러난 숏이다. 미디어가 축구의 신 ‘마라도나’의 흥망성쇠에 집중할 때,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은 그 속에서 인간 ‘디에고’의 모습을 건져올린다. 그의 세심함은 전작 <세나: F1의 신화>(이하 <세나>)와 <에이미>에서도 돋보인다. 레이싱 도중 사망한 동료를 보며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아이르통 세나, 망연자실한채 무대 뒤에 앉아 있던 에이미 와인하우스. 이러한 필드 밖의 순간들이 모여 인물에게 입체감을 부여한다. 부와 명성, 빛나는 천재 타이틀 뒤편의 그림자를 짚어내는 예리한 시선.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아시프 카파
<디에고> <세나: F1의 신화> <에이미>를 통해 본 아시프 카파디아의 작품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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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은 주인공 카티아 세케르지(다이앤 크루거)가 어떤 중요한 선택을 하면서 끝이 난다.
백인 카티아는 터키 이주민 출신 누리(누만 아차르)와 결혼해 6살 난 아들 로코(라파엘 산타나)를 두고 독일에 살고 있다. 카티아의 삶은 의문의 폭탄테러로 남편과 아들이 희생된 후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린다. 폭탄테러를 수사하는 경찰들은, 마약 거래로 수감 생활을 했던 누리가 마약 밀매조직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원한 관계인 터키계 마피아가 폭탄테러를 저질렸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가족을 잃은 처참한 고통 속에서 카티아는 이주민에 대한 편견과도 마주하게 된다.
신나치주의를 신봉하는 폭탄테러 용의자 부부가 드러난 후, 카티아는 폭탄테러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전 남편의 사무실 앞에서 마주친 여자가 용의자 중 한명임을 확신한다. 삶을 포기하려 했던 카티아는 법정에서 이들을 단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하나로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그러나 용의자들의 알리바이가 한 그리스 신나치주의자에 의
<심판>의 이중구조를 숙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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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감독의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이하 <코끼리>)와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2003) 사이에는 몇 가지 접점들이 있다. 제목에 ‘코끼리’가 포함되어 있지만 두 영화에는 코끼리가 나오지 않는다. 후보의 영화 마지막에 울부짖는 코끼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두 영화는 다중 캐릭터 서사의 전범이 될 만한 모델로, 복수(複數)의 인물들이 그들 각자의 삶을 전환시키는 사건을 중심으로 교차하면서 부딪히고 순환하는 관계를 그린다는 점에서도 같은 맥락을 가진다. 형식에 관해 말하자면 저들은 하염없이 길게 늘어지는 롱테이크와 각자의 스토리를 갖는 인물들의 뒤를 좇는 유려한 스테디캠 촬영으로 각별한 시각적 인상을 창조한다는 점에서도 가까이 있다.
<코끼리>와 <엘리펀트>는 공통점이 더 있는데, 공히 ‘죽음’을 중심 모티브로 하여 서사가 짜였고, 모든 죽음이 해명할 길 없는 부조리의 냄새를 풍긴다는 점에서도 같다. 더하여 후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가 고독과 소외, 분쟁, 광기에 싸인 현실 세계를 모자이크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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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를 보면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에 대한 표준적인 평가와는 무관한 생각이다. 특별히 제목에 ‘아이’라는 단어가 명시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신카이가 전작에 이어 버려진 아이들을 스크린에 들여온다는 점에 이끌렸다. <너의 이름은.>에서 어머니가 없는 가족의 형태로 예고되었던 미묘한 고아의식은 이 영화에서 부모로부터 방치된 아이, 버려지거나 갈 곳을 잃은 아이들의 모습으로 전면에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아이들은 도피와 순응이라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선택해야 한다. 이야기상의 불가피한 결과였다면 이는 흥미롭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영화는 어른의 규칙에 진입하기 전 단계의 아이들이 교환하는 감정과 행동에 주목한다. 서둘러 말하자면, <날씨의 아이>는 버려진 아이와 괴물이 된 아이가 만나고 헤어지고, 재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계의 빈틈을 응시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의 연장선에서 생각하는 <날씨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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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경계선>에 대해 말하면서 ‘아름답다’는 표현을 써도 될까? 극장을 나오면서 이 질문이 자꾸 마음을 눌렀다. 사실 잘 모르겠다. 이 질문을 뒤집어본다. <경계선>을 아름답지 않은 영화라고 말해도 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답해야 한단 점이다. 몇몇 화면들이 꾸준히 혐오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토록 불쾌한 모습에서도 관객은 조금씩 감동적인 정서를 느끼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꼽자면 물속에서 상대를 끌어안고 포효하는 두 남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 장면은 사랑하는 연인을 그렸다기보다는 흡사 포효하는 동물의 에너지를 표현한다. 사실 <경계선>은 시작하자마자 이러한 패러독스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티나(에바 멜란데르)의 얼굴이, 그리고 보레(에로 밀로노프)의 표정이 기존 영화에서 보지 못한 ‘추(醜)의 미학’을 직접 드러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경계선>의 원작은 욘 아이비데 린드크 비
<경계선>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해답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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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은 ‘영화’비평이 불가능하도록 찢긴 영화다. 영화의 운명은 영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영화는 영화를 수용하는 사람에 의해 재창조되기 마련이다. 영화의 텍스트성이라 할 이것이 대개는 새로운 담론을 탄생시키는 긍정적인 행위라고 나는 여겨왔다. 그러나 영화를 둘러싼 이해할 수 없는 반응들은 때로는 수용자가 영화를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행위가 내포한 부정적인 측면을 씁쓸하게 깨닫게 한다. 영화에 관한 생각은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를 보는 다른 시각을 던져주는 차원이 아니라 반대의 목소리마저 자신의 논리로 환원시키거나 영화를 왜곡한다면 그것은 묵과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영화를 둘러싼 오해와 논란들은 대부분 원작 소설 <82년생 김지영>으로부터 연속되었으므로, 논란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원작 소설을 언급해야 한다. 그중 서사를 둘러싼 대조적인 비판의 동시성에 관해 말해보려고 한다. 하나는
<82년생 김지영> 현실이 삼킨 존재를 비추는 허구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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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은 벌레를 먹지 않던 티나(에바 멜란데르)가 아기에게 벌레를 먹이며 끝나는 영화다. 티나가 트롤이라는 것은 티나의 독특한 외형이나 감정을 읽어내는 후각 능력으로도 표현되지만, 벌레에 주목하고 싶은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고독하게 서 있던 티나가 집어올렸다 내려놓은 벌레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다시 등장해 티나가 그것을 트롤 아기에게 먹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티나가 자신이 인간이 아닌 트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최초의 순간이 보레(에로 밀로노프)가 건네준 구더기를 먹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티나에게 벌레는 그의 취향이면서 본능이면서 곧 정체성인 셈이다.
그런데 벌레와 관련해서 한 가지 의아한 장면이 있다. 앞뒤 장면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아동 포르노 제작자의 살인 현장을 목격한 티나는 그 공간에서 보레의 냄새를 맡는다. (2) 보레는 티나에게 자신이 주기적으로 낳는 아기 모양의 난자 히시트를
<경계선>에서 티나는 왜 냄새를 맡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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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영화의 클리세가 지워진 영화, 그것이 바로 <하이 라이프>다. 클레르 드니는 일반적인 SF영화의 관습을 따라갈 마음이 없다. 에덴동산을 연상시키는 우주선의 정원을 비추며 시작한 영화는 자신만의 창세기를 써내려간다. ‘종의 종말’의 위기, 새로운 ‘종의 기원’을 모색하는 창세기, 그것이 바로 <하이 라이프>다.
자폐적 욕망의 창조주
7호 우주선에 탑승한 승무원들은 모두 사형수다. 죽음이 예정된 이들은 ‘재활용’이라는 미명하에 우주 실험에 동원된다. 그들의 첫 번째 임무는 블랙홀에서 에너지를 추출하는 것이고, 두 번째 임무는 인공수정을 통해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들은 ‘도구로서의 삶’을 택함으로써 죽음을 잠시 미룬다. 영화는 왜 그들에게 이러한 임무가 부여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어쩌면 이 임무 자체가 인류가 처한 위기의 징표일 것이다. 실제로 플래시백을 통해 보이는 지구의 풍경은 사멸의 계절을 맞은 듯 삭막하고 을씨년스럽다. 우주선 안에
<하이 라이프>, 새로운 창세기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