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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비평도 분석도 아니다. <환상의 마로나>에는 그런 작업이 구태여 필요치 않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다시 읽기’ 정도가 어떨까 싶다. 모두에게 한번쯤은 있었고, 있을지도 모를 ‘마로나’라는 이름의 기억을 다시 읽기. 혹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추억을 상상하기. 1997년 9월 30일 <신해철의 FM음악도시>의 마지막 코멘트. “왜 사느냐는 물음에 답하려 철학과에 갔지만 알 수 없었고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음악도시를 그만두는 이제야 그 답을 알았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이다.”
너라는 우주를 만나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겨, 최근엔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하 <알쓸신잡>)의 짧은 편집 영상들을 자주 보는 편이다. <환상의 마로나>를 두고 어떻게 첫걸음을 떼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즈음 <알쓸신잡>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도 민주주의?’라는 제목의 영상을 보고 찌릿
'환상의 마로나'가 풍기는 행복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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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의 서진에게서 잔뜩 짐을 싣고 힘겹게 걸어가는 노새가 떠올랐다. 측은했다. 그러다, 참 나와 닮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어 말풍선을 지웠다. 아내가 <씨네21>을 읽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폐허 위에 짓는 집
손원평 감독은 다시 한번 놀이공원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침입자>는 어린 오빠가 여동생의 손을, <아몬드>는 엄마가 아들의 손을 놓친다는 차이가 있다 해도, 이 두 작품 모두는 오랜 시간 함께하지 못했던 누군가가 가족에게로 돌아오면서 발생하는 사건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족이 ‘시간을 공유’하는 사이라면, 그 시간을 잃어버린 그들은 온전히 가족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동일하지만, <침입자>는 <아몬드>보다 가족에 대해 훨씬 더 비관적인 느낌을 준다. <아몬드>가 희생과 공감의 힘을 빌려 가족을 복원하려는 시도로 끝맺는다면, <침입자
'침입자'가 가족에 대해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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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무명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장우진은 여러 영화제에서 각광받은 이름이지만, 아쉽게 개봉하지 못한 <겨울밤에>의 야심과 성취는 그에 합당한 담론을 얻지 못했다. 다시 한번 이 영화를 함께 보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예정이다. 이 도전적인 영화에 대해 함께 말할 수 있길 바란다.
두개의 문
엔딩크레딧에 따르면 장우진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겨울밤에>에서 (우지현 배우가 연기한) 20대 군인과 (이상희 배우가 연기한) 그에게 면회 온 친구는 ‘남자’와 ‘여자’로 명시되고 있다. 두 캐릭터는 왜 이름 없는 보통명사의 존재로 스크린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걸까? 단순히 영화 안에서 두 사람의 이름이 불리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설정된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들의 이름이 호명되는 사태를 영화가 절대적으로 회피한다고 고려해볼 수는 없을까? <겨울밤에>에서 이름이 부여되지 않은 이 개체들은 단일한 정체성에 귀속되지 않을 뿐만
'겨울밤에'의 구조적 실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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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이 화면 가득 차 있고, 소녀가 조심스레 프레임 안으로 걸어들어온다. 소녀는 좁다란 무언가의 위를 걷고 있는지 양팔을 들어 균형을 잡는데, 흡사 여린 날개를 펼쳐드는 작은 새의 몸짓처럼도 보인다. 아이는 이내 무언가를 보았는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다시 프레임 밖으로 유유히 걸어나간다. 그런데 아이는 어느 곳을 걷고 무엇을 본 것일까. 영화 오프닝부터, 맑고 강단 있어 보이는 이 작은 존재가 우리의 시선을 견인해가는 <나는보리>는 선한 품성을 지닌 영화다. 이야기는 가족 중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보리(김아송)와 그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영화엔 보리네 가족공동체를 뒤흔들 만큼 해악을 끼치는 인물도, 위협이 될 만한 사건도 등장하지 않는다.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를 구성했다는 김진유 감독은 애초부터 장애를 특별한 서사 장치로 이용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장애를 영화적인 소재로 소비시켜선 안된다는 상식화된 신념을 실천할 수
농인과 청인의 다른 문화를 가로지르는 '나는보리'의 성취와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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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장소에 관한 이야기로 <침입자>와 <프랑스여자>를 나란히 들여다보았다. 두 영화의 결말에 관한 누설이 있음을 밝혀둔다.
궤적이 영화를 지탱할 때
손원평 감독의 장편 데뷔작 <침입자>에 관한 주된 반응은 잘 진행되던 서사가 중·후반부에 이르러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영화가 스릴러에 기반을 둔 장르영화임을 전제한다. 스릴러영화로서의 <침입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이 영화가 스릴러영화와는 다른 시작을 보여준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영화는 서진(김무열)의 시선에 과도하게 기대면서도 그를 의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자신이 유진(송지효)이라 주장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에 맞춰진 스릴러의 초점을 분산시킨다. 서사가 진행되는 중에도 ‘이 모든 것이 서진의 과대망상이 아닌가’라는 의문은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무엇보다 서진의 아내 실종 사건과 동생 유진의 귀환이 맞물리기 이전에, 서진의 기억을 통해 둘의 관
콜라주 영화로서의 '침입자'와 '프랑스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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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한동안 영화가 없어 난감했는데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도처에 영화가 있다. 영화의 물리적 조건은 점차 고립되고 단절되어 끝내 정지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양한 실천이 이어지고 있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나의 실천에 대해 고백해보았다.
잇고, 흐르고, 새로 쓰이다
다시, 코로나19 시대의 이야기다. 질릴 법도 하지만 이건 이야기책의 문을 여는 ‘옛날 옛적…’이란 문구처럼 당분간 주변을 배회할 것 같다. 변화는 우리의 인지 바깥에서 사고처럼 닥쳐왔고, 사람들은 이제야 당도한 미래에 간신히 적응 중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시대의 스크린 문화, 미학으로서의 영화는 시대의 분기점에서 생존을 위한 여러 가능성을 두드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당면한 근본적인 변화는 바로 공간의 제약이다. 촬영, 상영 등 물질적 조건 이외에도 넓게는 상상력의 창조, 미세하게는 카메라의 위치까지 영화는 공간을 점유하며 운동한다. 하지만 이 운동 과정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당
단절의 시대를 잇는 이야기들, <반쪽의 이야기>가 알려준 ‘내가 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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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를 걷는 소년>의 기본 공간 배경은 제주도지만, 주인공인 김수(곽민규)를 중심에 놓고 좀더 세분화해서 살펴보면 크게 세개의 장소, 그러니까 인력사무소, 서핑클럽, 김수의 집으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저 너머에 이상향처럼 엄마가 살고 있는 중국, 하이난이 (엽서처럼) 있다. 거친 단순화를 용서한다면 공간적 배경으로만 놓고 볼 때 <파도를 걷는 소년>은 김수가 이 세 장소를 번갈아 헤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이주노동자 2세인 김수의 세계엔 원래 두개의 장소밖에 없었다. 엄마가 하이난으로 떠난 후, (혹은 그전부터) 김수는 인력사무소에서 일을 받아 외국인들을 불법이주시키고 취업을 알선해주며 수수료를 받아왔다. 그러다 (자세한 이유는 영화 속에서 설명되진 않지만) 어떤 폭력사건에 휘말렸고, 얼마 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또 다른 장소인 그의 집은 미루어보건대 엄마와 함께 살던 곳인데, 엄마가 떠나간 후 간신히 잠만 자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아마도 그는 바로 이
'파도를 걷는 소년'을 보고 남은 의구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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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가야 할 때가 있다, 라는 자명한 사실을 깨닫곤 한다. <사냥의 시간>을 만든 윤성현 감독의 마음도 그렇지 않았을까?
피상성의 시대에 남은 허망한 욕망
<사냥의 시간>의 준석(이제훈)과 그 친구들은 대만으로의 탈주를 꿈꾼다. 공교롭게도, <사냥의 시간>의 관람 이전과 이후에 본 영화 속 인물도 비슷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연희(전도연)는 신분을 감춘 채 일본으로의 밀항을 모색하고, 드라마 <인간수업>의 배규리(박주현)는 한국 반대편에 있는 호주로 탈출할 돈을 구하기 위해 부모를 협박한다. 그들이 여기가 아닌 저기 어딘가를 꿈꾸는 것은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사냥의 시간>의 대사를 빌려 이야기하자면, ‘지금, 여기’가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영화의 인물들은 빈 가방을 돈으로 가득 채운 채 각자의 열차에 올
'사냥의 시간' '인간수업'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속 인물의 선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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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상에서 드라마 <부부의 세계>와 <인간수업>을 말할 때 자주 발견되는 표현은 ‘사이다 전개’ 그리고 ‘마라맛’이다. 마라맛은 강하고 자극적인 막장의 ‘매운맛’에서 진화해 어딘가 고급스럽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감상을 맛에 비유하기 시작한 것은 말초적인 자극에 익숙해진 요즘의 창작-소비의 형태를 표상한다. 하이라이트 구간을 인터넷 클립이나 밈으로 흡수하기 좋은 상황에서 화제성을 노리는 드라마들은 이 맛의 지표에 의거한 채 폭력과 가학에 둔감해지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의 하이퍼리얼리즘을 내건 두편의 드라마 <부부의 세계>와 <인간수업>을 보면서 캐릭터 재현과 폭력 묘사에 관한 오래된 질문을 다시 제기하고 싶어진 이유다. 여기에 한국 막장 드라마의 필수 요소처럼 여겨지는 것들-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적 부의 묘사, 여성을 향한 멸시 등이 버무려지면 사방에서 폭죽처럼 불편함이 터져나온다. 여기저기, 해로운 것을 장르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
'부부의 세계'와 '인간수업'이 재현하지 말았어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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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코스타의 <비탈리나 바렐라>의 한 장면에서, 남편 요아킴의 부고 소식을 듣고 폰타이냐스로 돌아온 비탈리나는 남편과 함께 살던 낡은 집에 홀로 앉아 말한다. “나는 당신이 죽었든 살았든 믿지 않아. 당신의 시체도, 당신의 묘지도, 관도 나는 볼 수 없었어. 정말 땅속에 묻혀 있긴 한 거야?” 이 말을 읊조리는 비탈리나의 육체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거의 사진처럼 느껴지는 정지된 자세를 유지하며, 간신히 음성을 내뱉고 몸 바깥으로 눈물을 흘려보낸다. 그녀의 눈동자는 무엇을 바라보고, 목소리는 누구에게 전달되는가. 쉽게 생각하면 그녀는 실내 반대편에 위치한 벽과 제단을 쳐다보는 것이고,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뒤늦은 말을 발화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확증하지 못한다. 눈동자의 응시는 리버스숏을 담보하지 않고, 음성은 송신될 수 없다. 요아킴의 시체는 물론 묘지도, 관도 보지 못했다는 비탈리나의 말처럼, 영화는 죽은 요아킴에게 접근하거나 그
'비탈리나 바렐라'가 보여주는 대면과 접촉이 불가능해진 자리의 영화 이미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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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인 것과 자연스러운 것은 다르다. 사실적인 것이 자연스럽게 되려면 편집이 필요하다. 박석영의 영화들은 사실적이지만 자연스럽지 않다. 예를 들어 <재꽃>(2016)에서 사기를 당한 명호(박명훈)는 분노에 가득 차서 철기(김태희)를 잡겠다고 쇠지레(빠루)를 들고 다닌다. 그런데 명호는 계단에서 쇠지레의 무게와 길이 때문에 쇠지레를 놓치고 쇠지레는 계단을 굴러가고, 명호는 떨어진 쇠지레를 줍는다. 쇠지레를 놓치고 허둥거리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이며, 관객이 명호가 지금 느끼는 분노의 감정에 몰입할 수 없게 한다. 연출되지 않은 배우의사실적인 연기를 통해 관객이 영화와 거리두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관객은 명호의 사실적인 행동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우며 인위적인가를 느끼게 된다.
<재꽃>에는 자연과 인위의 대립이 있으며, 이는 수직과 수평이미지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초원이나 강물과 같은 수평의이미지들 뒤로 풍경을 압도하는 송전탑이나 아파트와 같은 수직의 이미지가
'바람의 언덕', 박석영 감독의 전작 '스틸 플라워' '재꽃'과의 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