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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 길레스피의 <크루엘라>는 몇년 전 나온 <조커>와 습관적으로 비교되는데, 유명한 악역 캐릭터의 전사를 다룬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이 둘은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 <조커>를 보면, DC 캐릭터를 80년대 마틴 스코세이지 영화, 보다 정확히 말해 <코미디의 왕>스러운 유사 리얼리즘의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다는 착안이 독창적으로 여겨지지만, 이 캐릭터를 구성하는 재료는 이미 수많은 코믹북과 각색물을 통해 꾸준히 만들어졌다.
미래의 조커가 아서 플렉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을 때부터 우린 이 남자의 내면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택한 길은 조커를 통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니지만(<다크 나이트>에서 크리스토퍼 놀런은 조커에게 어떤 사연도 주지 않는 보다 영리한 길을 택했다) 그래도 익숙한 캐릭터가 나오는 익숙한 길이다.
성장할 수 없는 주인공
<크루엘라>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다. 영국 작가 도
'크루엘라'를 <101마리 강아지>의 프리퀄이라 말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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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 옮겨둔 <옥희의 영화>(2010)의 대사를 우연히 발견했다. 나는 그 대사는 물론, 저장해둔 사실조차 망각했다. 왜 옮겨 적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짧은 글귀를 읽은 뒤 <인트로덕션>에 관해 무엇이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옮겨둔 대사는 이것이다. ‘이 우유팩이 여기에 놓여진 이유를 알면 온 세상을 알 수 있다.’
프레임 사이 깊은 바다
잘린 팔이 내밀어진다. 화면 바깥에서 안으로. <인트로덕션>의 세 번째 장에서 해변에 앉아 있던 주원(박미소)의 머리 위로 팔이 하나 내려온다. 분명 화면 밖에서 주원을 부르는 사람이 영호(신석호)이므로 그 손은 영호의 것이 분명한데, 그 형상이 기이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감동적이어서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거나 마치 카메라가 내민 손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프레임 속으로 불쑥 침투한 신체의 형상은 왜 그토록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1.
프레임에 의해 신체가 잘리는 형상 자체는 새롭지 않다
'인트로덕션'에서 잘린 팔이 불쑥 내밀어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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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장커 감독은 전작 <산하고인>(2015)에서 멜로드라마 형식을 빌려 중국 인민들이 급격한 산업화를 겪으며 자본주의에 잠식되어가는 과정을 한 여성의 일생(1999년부터 2025년까지)을 통해 비판적으로 다뤘다. 이번 영화 <강호아녀>(2018)에서도 전작과 마찬가지로 감독의 아내이자 뮤즈인 자오타오를 내세워 현대 중국 사회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멜로드라마 형식에 더해 갱스터 또는 필름누아르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감독은 왜 다시 과거(2001년)에서 영화를 시작하는 것일까? 이는 <강호아녀>가 감독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로 만들어진 것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의 전작들이 겹치기 때문이다. 특히 <임소요>(2001)와 <스틸 라이프>(2006)의 그림자를 지워버릴 수 없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비슷한 머리 모양과 의상을 입고 재등장한다.
장르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지아장커의 '강호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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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동안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왜 하필 그녀는 ‘국수’를 택했을까. 다른 식당에 갈 수도, 혹은 새로운 음식에 도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영화에는 단 한 차례, 그녀의 국수 먹기가 주저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후반부에서 진아(공승연)는 툭 끊긴 국수 가락을 삼키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결말을 향한 도약을 진행한다. 가족의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았던 그녀가 작은 식당에서 무너지는 것이다. 관객은 이 지점에서 일상적 삶의 균형이 깨어진 것을 깨닫는다. 조금이라도 귀찮아질 여지가 있는 것은 모두 차단한 그녀였지만, 반복되던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기면서 그간 이룩한 ‘혼자 살기의 법칙’은 뿌리까지 흔들린다.
내부의 평온함, 외부의 두려움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는 특이점이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매일 걷는 복도의 끝에 위치한 그녀의 공간, 그녀가 머무는 방 안의 디자인이 특별하다. 의도적으로 거실을
<혼자 사는 사람들>이 ‘사랑’을 노출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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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산골영화제는 해마다 전세계 영화감독 중 동시대 영화미학의 최전선에 서 있는 감독을 선정해 소개하는 ‘무주 셀렉트: 동시대 시네아스트’를 진행한다. 올해의 감독은 브라질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자 정치와 혁명의 시네아스트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다. 그의 전작을 모두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부디 놓치지 마시길.
장르 너머, 폭력을 먹고 자란 꿈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설명하기 곤란한 영화를 만나는 건 흥겨운 일이다. 이게 대체 뭐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바쿠라우>(2019)를 보는 내내 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말들은 영화에 대한 기분 좋은 혼란에 대한 찬사에 가깝다.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감독의 세 번째 장편 <바쿠라우>는 전작들과는 확연히 다른 결을 선보인다. 데뷔작 <네이버링 사운즈>(2012)나 <아쿠아리우스>(2016)를 기억하는 이라면 예상 밖의 급격한 변화에 당혹할 수밖에 없다.
‘디스토피아적
'바쿠라우'가 조우한 (영화의) 혁명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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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시 영화들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다시 누군가의 무덤 앞에 도착한다. 그는 바로 오즈 야스지로. 그의 묘비에 적힌 무(無)라는 원류에서 갈라지는 두개의 지류, 빔 벤더스와 짐 자무시는 각각 <돈 컴 노킹>과 <브로큰 플라워>를 들고 2005년 칸국제영화제서 만난다. 정한석 평론가는 두 영화가 서로 반대의 결론을 내린다고 평가했다.
<돈 컴 노킹>은 자아를 찾고 의미의 길로 나아가고, <브로큰 플라워>는 “의미가 끼어들 수도 없고, 그런다고 해봤자 뭔가 바뀔 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미정의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한석 평론가는 무의미성과 미결을 알아보기 위해 짐 자무시의 초기작으로 돌아가 글을 다시 이어나간다. 이 글은 <다운 바이 로>의 마지막 장면 속 재크처럼 반대 방향으로 가보고자 한다. 이미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영화 속의 무의미한 것들을 엮어 의미망을 짜서 짐 자무시가 가고자
'짐 자무시 모든 것의 절정' 기획전을 통해 만난 그의 데뷔작 <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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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의 밤>과 <서복>의 엔딩이 보여준 살육의 스펙터클로부터 <버닝>의 엔딩이 떠올랐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모두 불태우거나 절멸시키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대안도 없는 것일까? 그것이 우리가 바란 세상인가? 문득 퀸의 노래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가? ‘Is This The World We Created…?’
길을 잃다
하나의 유령이 지금 한국 사회를 떠돌고 있다. 무력감이라는 유령이. 이 말이 다소 과장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낙원의 밤>과 <서복>만 놓고 본다면 지금의 한국 사회는 미래가 봉쇄된 사회다. 이 두 영화는 모두 엔딩 무렵 살육의 스펙터클을 전시한다. 이 장면을 두고 ‘자살의 몸짓’이라 불러도 좋다. 죽음을 각오하고 벌이는 누군가와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을 것임을, 자신에게는 그 어떤 미래도 없음을 알기에 벌일 수 있는 살육의 스펙터클.
공교롭게도 이 두 영화는 죽음의 기운이 만연하다
'낙원의 밤'과 '서복'이 보여준 절멸의 스펙터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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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몰라요>를 보다가 신기한 체험을 했다. 화창한 교실 안, 소녀들은 마치 소꿉놀이를 하듯 귀여운 동작으로 입술 위에 틴트를 바르고 있다. 뒤이어 그 입술에서는 상상할 수 없이 잔인한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화창한 교실 가득 폭언이 채워진다. 그 말들은 너무 자연스레 흘러나와서 충격적이다. 중요한 건 다음 장면이다. 아이들이 공터에서 보드를 타고 있다. 자유롭고 유려하게. 카메라도 그들과 함께 보드를 타듯 공터 위를 미끄러지며 이곳의 풍경을 담는다. 유명 휴대폰 광고를 연상시키는 이 아름다운 장면은 아름다울 수 없는 맥락에서 등장하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에 이르러 즉각적인 메스꺼움과 멀미를 느꼈다. 흔히 멀미는 서로 다른 감각 사이의 괴리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배를 탔을 때 시야는 평온한데 몸은 마구 흔들리는 상황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영화적인 멀미도 가능할까? 괴롭힘이 난무하는 잔인한 교실과 평화롭고 한적한 공터. 우리는 아무런 통증 없
'어른들은 몰라요' 억지로 채운 결핍이 남긴 파국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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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여 악녀가 되라>를 찍으며 올림픽대교를 계속 보여주려고 많이 노력했다”라는 후문을 들었다. 이건 어느 정도까지 진지한 말이었을까. 농담처럼 김기영의 계단이 올림픽대교로, 고유한 영화적 장소가 범용한 도시의 이미지로 대치되는 상상을 떠올렸다.
김기영의 기계 도시
윤여정 배우가 이뤄낸 오스카 여우조연상 수상이라는 이례적인 사건과 김기영 감독을 언급한 인상적인 수상 소감(“이 상을 제 첫 영화의 감독인 김기영 감독님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아주 천재적인 분이셨고 제 데뷔작을 함께했습니다. 살아 계셨다면 아주 기뻐하셨을 거예요”)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마지막으로 협업한 결과물인 <천사여 악녀가 되라>(<죽어도 좋은 경험>)가 재조명되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개봉되지 않은 채로 남겨져 있다가 김기영 감독의 사후에 비디오테이프로만 공개된 미개봉 유작이라는 전후 사정을 들먹이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천사여 악녀가 되라>가 김기영의 필모그래
'천사여 악녀가 되라'의 올림픽대교가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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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인권운동가 프레드 햄프턴의 말년을 담은 전기영화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를 보고, 다소 거친 비교지만 그의 삶이 유관순 열사의 삶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족에 닥친 전쟁 같은 상황에서 한 운동의 리더 역할을 한 위인은 여럿 있겠지만 이렇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을 나란히 놓고 생각해보면 미국에서 벌어진 전쟁이 조금 더 비극적으로 느껴지는데, 그건 이 모든 일이 벌어진 후에도 그들(흑인-백인)이 계속해서 같은 땅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 또한 많은 복잡한 요소들을 배제한 채 내린 결론이지만 단순히 말해서 우린 다른 땅에서 그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척 살 수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이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에 프레드(대니얼 컬루야)가 마오쩌둥의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고,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다”는 말을 당원들에게 주지시키는 모습이 나오는 것은 적절하게 보인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가 역사를 구현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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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인물들이 전투를 벌이는데 그 속에 나를 위한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어쩐지 표면적인 투쟁 아래 다른 이야기가 흐르는 것만 같다. 이 두 번째 투쟁에 관해 말하기로 한다. 너무 잘 보여서 보지 못한 그것에 관해서.
시선으로부터의 도피
프랑스의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국기를 어깨에 두르거나 손에 들고 페이스 페인팅한 사람들이 곳곳에 모여든다. 이윽고 커다란 함성과 함께 사람들이 뛰쳐나오고 거리는 온통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인파들로 북적인다. 레주 리 감독은 <레 미제라블> 오프닝 시퀀스에서 월드컵의 응원 열기를 담는다. 그런데 이 풍경 속에서 이들이 흥분하는 원인을 확증할 수 있는 근거로서의 이미지는 단 한컷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 흔한 축구 경기 장면 인서트조차 없다.
오프닝 시퀀스 속 상황으로부터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는 월드컵이 한시적인 이벤트여서가 아니라 이들의 행위가 그것의 목적으로부터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응원의 행위는 모니터
'레 미제라블'의 표면적 투쟁과 또 다른 투쟁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