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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영화’라는 왕가위의 말이 의미하는 것

[안시환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왕가위 특별전에 젊은 관객이 꽤 많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라떼는 말이야’라고 빈정거리면서 우리 세대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원천봉쇄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 시절 우리를 매혹시켰던 왕가위 영화를 보겠다고 달려든다. 라떼는 말이야, 라며 코아아트홀에서 왕가위 영화 보던 시절을 이야기하면 좋아하려나?

다시 오지 않을 날들을 위한 연가

<중경삼림>

왕가위의 영화는 표면적 장르가 무엇이든 간에 궁극적으로는 멜로드라마로 수렴된다. 그렇다고 그의 영화를 단순히 멜로드라마라고 부른다면 그것만큼 그의 영화적 세계를 시시하게 만드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서사로만 본다면 왕가위는 멜로드라마에서 그 뼈대만 빌려온다. 좋게 말하면 과감한 생략으로 그 빈틈에 대한 해석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앙상하고 상투적이다 못해 구식의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왕가위는 그 앙상함이 풍요롭게 보이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감독이다. 느릿하게 돌아가는 선풍기가 무기력하고 나른한 오후의 분위기를 만들고, 땀으로 젖은 셔츠가 퇴폐성으로 인물을 물들인다. 광각렌즈로 전경과 후경이 분리된 공간은 인물간의 단절을 보여주고,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절대성을 담은 시계의 째깍거림을 들려준다. 감각을 열어 그 하나하나를 보고 들어야 하는 것이 왕가위 영화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앙상하지만 풍요롭다. <중경삼림>(1994)에 반해 <열혈남아>(1987)를 다시 보고 <아비정전>(1990)을 애써 찾아보던 그 무렵, 우리는 왕가위를 통해 문학적 서사가 아닌 영화적 스타일을 통해서 인물과 서사가 완성되는 ‘영화적인 것’을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이 남긴 마음의 상태

정확하게 출처가 기억나지 않지만,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왕가위가 자신의 영화는 일반적인 러브 스토리가 아닌 ‘사랑에 대한 영화’라고 말한 것을 읽은 기억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사랑의 진실에 관해 질문을 던질 자격을 얻는 시점은 사랑이 현재 진행형일 때가 아니라 그것이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을 때, 그래서 영원한 기억이 되어버린 과거의 순간 하나하나를 되짚고 반추할 수 있을 때이다. 그렇다면 ‘사랑에 대한 영화’라는 왕가위의 말은 자신의 영화가 이미 사라진 그 순간들을 되돌아볼 때의 회한의 정서를 담은 영화라는 것, 달리 말해 떠나간 누군가가 미처 거둬가지 않은 ‘감정의 잔재’에 대한 영화라는 의미일 것이다.

왕가위는 여러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여러 인물의 내레이션을 사용한다. 내레이션은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볼 때 가능하다. 사랑이 남긴 감정의 잔재는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그럴수록 인물은 내레이션으로 흐트러진 마음을 정돈하려 한다. 왕가위는 사랑을 하나의 사건보다는 인물이 처해 있는 ‘마음의 상태’로 다룬다. 우리가 그의 영화에서 마주하는 것은 사랑 이후 남겨진 감정의 잔재들, 또는 그 기억 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다.

<아비정전>에서 아비(장국영)와 헤어진 이후 그의 주변을 서성거리는 수리첸(장만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왕가위가 보여주는 시간의 흐름은 선험적인 것이 아닌 인물이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에 가깝다. 그의 영화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왕가위는 이 마음의 상태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가령, <화양연화>(2000)에서 차우(양조위)의 담배 연기를 통해 온몸에서 퍼져 나오는 상념을 보여주는 장면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이러한 마음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는 <동사서독>(1994)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았다고 믿는 모룡언(임청하)은 물 위에서 싸운다. 아니 물에 비친 자기 자신과 싸우고 또 싸운다. 또한 영화 속 칼싸움 장면 대부분은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하게 보인다. 그들의 대결이 지독한 자학의 몸짓처럼 보이는 이유다. 불면의 밤을 잊기 위한 안간힘.

왕가위 영화를 궁극적으로 멜로드라마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절대성에 대한 각성이 영화적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영화는 곧잘 현재와 과거가 찢겨져 있고, 그 틈 사이에 끼어 있는 인물은 그 어느 곳에도 머물지 못한 채 방황하기 일쑤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힘에서 오는 상실감과 쓸쓸한 회한의 정서야말로 왕가위 월드를 지탱하는 힘이고, <아비정전>이 그 세계의 원형처럼 언급되는 이유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부터 딱 1분. 수리첸에게는 그 짧은 1분이 영원의 시간이다. 수리첸과 루루(유가령)는 떠나버린 현재의 아비가 아니라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아비에 대한 기억만을 붙들고 그의 주변을 맴돈다. 생모가 자신을 버린 과거에 붙들려 있는 아비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아비정전>은 잃어버린 것, 부재하는 것을 되살리는 데 실패하는 자들에 대한 영화다.

과거에 집착할수록 현재의 시간은 텅 비어 공허해지고, 아비는 그 공허한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떠돈다. ‘발 없는 새’가 부유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들은 동일한 현재의 시간을 통과하면서도 각기 다른 과거의 시간대에서 서성이며 살아간다. 그런 그들이 서로 엇갈리고 단절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궁극적으로 왕가위의 인물은 결국 하나다. <해피 투게더>(1997)의 보영(장국영)이나 <2046>(2004)의 차우(양조위) 역시 아비와 다르지 않다. <해피 투게더>의 아휘(양조위)가 내레이션을 통해 이야기하듯 사람은 고독해지면 똑같아지기 마련이다. 사랑 이후, 그들은 지구 끝의 등대 앞에 모여 슬픈 기억을 벗어던지거나, 어느 객잔에서 취생몽사의 술잔을 기울여 모든 기억을 망각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숲속 구멍이 난 나무 앞으로 향할지도 모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면, 차라리 그것을 꽁꽁 감싼 뒤 영원한 비밀로 봉인시키는 것, 그것이 <화양연화>의 차우가 캄보디아의 사원으로 향한 이유다.

불가능한 시도의 무상함

<중경삼림>에서 페이(왕정문)는 경찰 633(양조위)의 집에 몰래 숨어들어가 옛 연인의 흔적을 지우고 자신의 징표를 남긴다. <중경삼림>은 홍콩 반환(1997년)을 앞둔 홍콩인의 심리적 불안과 혼란에 대한 알레고리로 곧잘 언급되었고, 그래서 경찰 633이 당시의 홍콩인을 대변하고, 옛 연인은 영국, 그리고 페이는 반환 이후의 새로운 홍콩을 상징한다고 이야기되곤 했다. 남의 상점이나 집에 몰래 들어가는 것은 <타락천사>(1995)에서도 반복되는데, 킬러 황지민(여명)을 사랑하는 파트너(이가흔)가 그의 집에 몰래 들어가 널브러진 쓰레기를 치우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되곤 했다.

이러한 해석에 이견은 없다 해도, 왕가위의 영화적 공간이 그보다 더 큰 맥락에 자리한다는 점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좁은 골목을 배경으로 “우리는 항상 어깨를 스치며 살아가지만 서로를 알지도 못하고 지나친다”라는 <중경삼림>의 내레이션은 왕가위의 공간이 주는 정서를 잘 말해준다. <해피 투게더>에서 아휘는 두손을 다친 보영을 재워준다. 그리고 잠든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카메라는 그 반대편으로 건너가 마치 같은 자리에서 잠든 아휘를 바라보는 듯한 보영을 비춘다. 서로 마주 보지 않는 이 장면이 서로에 대한 사랑이 가장 진하게 묻어나는 장면이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왕가위 영화에서 시간이 흐트러진 마음의 원인이라면 공간은 그 결과에 가깝다. <동사서독>의 사막과 그 위의 집을 보라. (영화의 영문 제목이기도 한) ‘시간의 재’가 겹겹이 쌓인 사멸의 공간. 사막 뒤편에 또 다른 사막이 기다리고 있듯이, 사랑 이후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다. 있는 힘껏 기억의 잔재들을 손에 움켜쥐지만 이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운명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허무의 드라마가 바로 <동사서독>이다. 그러니 취생몽사에 취할 수밖에.

물론 이러한 영화적 공간이 가장 매혹적으로 보이는 작품은 <화양연화>다. 영화는 그 시작에서부터 수엔 부인(반적화)의 젊은 시절부터 이어진 사진을 쭉 보여주다 그녀의 현재 뒷모습에서 움직임을 멈춘다. 그렇게 공간(과 그 속을 채운 소품)속에 시간을 담는다. <화양연화>는 치파오, 벽지, 시계, 타자기, 성냥갑, 흐릿하게 비추는 거울, 인물을 반쯤 마스킹하는 다양한 소품과 사물들로 1960년대 홍콩의 일상적 풍경을 되살려내려 한다. 하지만 그것이 1960년대의 실제 풍경이라는 뜻은 아니다. 왕가위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그 시절이 아니라 그 시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담아내는 것이다.

수많은 미장센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원형의 이미지이다. 둥근 전구에서부터 둥글게 깎인 벽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원형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특히 원형이나 아치의 벽으로 마스킹하여 인물을 카메라에 담을 때, 우리는 그것이 누군가의 사생활을 은밀히 훔쳐보는 관객의 관음증적인 시선을 위해 구성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미장센의 이유는 앙코르와트에 도착한 차우가 원형의 구멍 속에 자신의 비밀 기억을 봉인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기억을 봉인하는 것은 차우만이 아니다. 왕가위 역시 <화양연화>를 통해 그 시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봉인한다. 그렇게 시간은 공간 속에 봉인된다.

<화양연화>의 원형 이미지는 <2046>의 오프닝 장면으로 이어진다. <화양연화>의 엔딩 무렵 차우가 기억을 봉인한 구멍을 향해 전진하던 카메라는 <2046>의 오프닝에서 거대한 구멍에서 뒤로 물러난다. 그렇게 <2046>은 봉인된 기억을 해제한다. 고백하자면, 내게 <2046>은 당혹스러운 영화다. <2046>의 초반부, 1966년을 배경으로 <아비정전>의 루루가 <아비정전>의 음악과 함께 그 모습을 드러낼 때 나는 결코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을 마주치고 만 듯한 불쾌함을 느꼈다. 그것은 <아비정전>을 다시 보며 아비와 루루, 수리첸을 만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다. 영원히 봉인되어야 할 비밀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외설스러운 광경을 목격하는 느낌 속에서 두 시간 가까이를 억지로 버텼다.

어쩌면 <2046>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것을 현재에 되살리려는 시도의 무상함, 달리 말해 <해피 투게더>에서 아휘를 다시 찾아온 보영이 건네는 “우리, 다시 시작하자”라는 말에 내재한 불가능성을 확인하는 것. <2046>은 기억 속 이미지를 현재의 시간에 되살리거나 다른 무언가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도박사 검은 장갑(공리)이 차우를 거절하는 이유다. 검은 장갑은 자신이 차우의 기억 속 수리첸의 대체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차우에게 끌린 자신도 그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자신을 매혹한 과거의 이미지에 붙들려 그것을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은 왕가위 자신이라는 점이다. ‘사랑에 대한 영화’가 결국 과거를 바라보는 현재의 시선 속에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왕가위 역시 사라진 것들, 부재하는 것들, 그래서 오로지 기억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 것들에 자신이 매혹되어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화양연화>는 먼지 낀 거울에 비친 차우와 수리첸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는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지만 가상으로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거울 이미지처럼, 왕가위는 현재의 시간에 부재하는 사물들의 이미지로 영화의 공간을 빼곡하게 채운다. 결국 왕가위 영화의 거울 이미지는 그 시절을 되살리려는 왕가위의 영화적 시도와 다르지 않다. 가상의 이미지를 통해 부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주는 것, 그럼으로써 이미 사라져버린 것을 붙들어 매려는 시도. 자신을 강박적으로 매혹시킨, 하지만 지금은 부재한 것들에 대한 사랑 고백은 아름다우면서도 무상하다.

땅을 밟고 수직으로 선다는 것

<중경삼림>

어쩌면 <일대종사>(2012)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예외적인 작품일지 모른다. <일대종사>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부유하는 발 없는 새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있는 힘껏 발에 힘을 주어 땅을 딛고 수직으로 서는 자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왕가위의 영화에서 자막이 사용되는 것은 흔한 일일지만, 그것이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지칭하고 인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직접적으로’ 그려낸 작품은 <일대종사>가 유일하다. 하지만 그것이 그 이전의 왕가위가 홍콩의 현실에 눈을 감고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경삼림> <타락천사> 등은 홍콩 반환을 앞둔 홍콩인의 불안정한 정체성과 심리적 혼란에 대한 알레고리였고, <화양연화>는 마오쩌둥이 실각한 1962년부터 문화대혁명으로 복귀한 1966년까지를 다루면서 이 시절을 홍콩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 이야기한다. 2046년은 (명목상으로는) 일국양제를 지향하는 홍콩이 중국에 완전히 통합되는 해이다. 실제로 왕가위만큼 홍콩에 대한 사랑을 지속적으로 고백한 감독은 없다.

하지만 <일대종사>에 등장하는 역사적 격변은 보다 직접적으로 엽문의 삶을 소용돌이로 끌어들인다. 쿵후의 이치를 수평으로 누운 자와 수직으로 선 자로 구분하는 <일대종사>는 그 역사적 격변 속에서 수직으로 서서 버텨낸 자의 삶을 담는다. 발 없는 새는 그렇게 땅에 발을 디딘다. 실제로 <일대종사>의 격투 장면에서 왕가위는 땅을 꾹꾹 누르고 서 있는 발의 움직임을 긴밀하게 포착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대종사>는 여전히 왕가위의 영화다. 엽문(양조위)과 궁이(장쯔이)가 벌이는 대결 장면에서 엽문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치는 장면은 <아비정전>의 영원이 되어버린 1분과 동일하다. 순간을 영원으로 기억하는, 하지만 그 순간으로 끝내 돌아가지 못하는 궁이는 수리첸과 다르지 않다.

<일대종사>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은 생계를 걱정하던 엽문이 궁이에게 주려던 코트를 전당포에 맡기고 돌아오는 장면이다. 엽문은 코트의 단추 하나를 뜯어내 손에 꼭 쥔 채 가게를 나선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아비정전>에서 필리핀에 있는 생모를 찾아갔던 아비가 뒤돌아 걷는 장면이 떠올랐다. 두 인물 모두에게서 꽉 쥔 손을 얼핏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비와 달리 엽문은 손에 단추 하나를 쥐었다. 엽문은 단추 하나만큼은 끝내 포기하지 않던 그 손의 힘으로 생활이라는 높은 산을 넘었다. 어쩌면 그것이 아비와 엽문의 차이일 것이다.

이를 두고 왕가위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왕가위는 그저 왕가위일 뿐이다. 영화 말미에 엽문을 마음에 담은 적이 있던 궁이는 그 단추를 엽문에게 돌려준다. 왕가위 특유의 세계(허구적 인물로서의 궁이)가 역사적 세계(실존 인물로서의 엽문)를 마주하면서도 끝끝내 자신의 세계를 지켜내는 것, 그것이 궁이가 엽문에게 단추를 되돌려주는 이유다. 그렇게 궁이는 왕가위 월드의 인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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