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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실사애니메이션 <인어공주>가 공개 전부터 논란에 직면했다. 원작 애니메이션의 설정을 깨고 주인공 에리얼 역에 흑인 배우를 기용하면서 이에 대한 저항이 인 거다. 저항의 원인을 원작 파괴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눙칠 수도 있겠지만, 동시대 반영을 통한 변화는 리메이크의 본성이라는 점에서, <인어공주>에 대한 반감은 단순하지 않다. 여기에는 ‘화이트 워싱’에 대한 비판의 반작용으로 ‘블랙 워싱’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흑인 배우 기용을 둘러싼 거센 저항은 아직 출발도 하지 않은 판타지 세계의 어선을 빠르게 현실 세계의 항구로 복귀시켰다.
현실의 무거움을 안고 실사화된 <인어공주> 서사를 마주했을 때, 바다 아래와 위, 두 세계 사이에 선 에리얼의 갈등은 현실을 정확히 복사한 것처럼 보였다. 인간에게 판타지는 수면 아래에 있지만, 에리얼에게 판타지의 세계는 곧 우리의 현실인 수면 바깥의 세계다. 트라이튼은 바깥 세계의 위험을 강
[비평] '인어공주'와 '토리와 로키타', 영화와 현실의 관계 재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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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이하 <가오갤3>)가 주는 감동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같은 수사적인 표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가오갤3>의 감동을 설명하는 것에는 말 그대로 물리적인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는 뜻이다. 예컨대 퀼(크리스 프랫)이 우주에서 돌처럼 굳어가다 아담(윌 폴터)에 의해 극적으로 살아나는 장면이 더 뜨겁게 느껴지는 까닭을 (전편을 보지 않은)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2>에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던 욘두(마이클 루커)의 모습까지 덧붙여 이야기해야 할 텐데, 문제는 그걸로도 여전히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욘두와 퀼의 길고 긴 사연을 추가로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것이 반드시 설명되어야만, 극 후반 사랑으로 감화되는 아담이라는 캐릭터의 상징성이 제대로 전달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비평]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언어화하기 곤란한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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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솔직해지자. 인류는 안다. 신자유주의의 엔진을 장착한 자본주의호(號)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 지 오래라는 걸. 균열 신호는 20세기에만 여러 차례 있었다. 2008년에 이르러 더이상 경고가 아닌 무거운 증상으로 글로벌 금융 위기가 나타났다.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경제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은 정직한 경제학자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미국은 말할 것 없고 20세기에 설계된 유럽 복지국가 모델 역시 곳곳에서 물이 샜다. 신자유주의에 국경이란 없으니 그 폐해가 북유럽이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았다. 불평등은 구조적인 데 비해 복지는 임시방편적이었다. 국민을 통합하는 순기능보다 수혜자와 시혜자로 가르는 역기능이 상대적으로 커졌다. 그러는 와중에 유튜브를 포함한 소셜미디어 기업과 이를 구현하는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이 세계를 호령하게 됐다. 알고리즘은 사람들의 생각을 갈랐다. 2022년 현재 전세계 10대 부자 중 7명이 소셜미디어와 온라인쇼핑 등 디지털
[비평] ‘슬픔의 삼각형’, 신(新)유한계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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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소년들이 맞닥뜨리는 세계의 균열을 극도로 섬세하게 그려내면서도, 끝내 여린 소년의 죄의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마는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루카스 돈트의 <클로즈>를 반복해 보며 체념하듯 되뇌었다. 영화를 거듭해 보아도 매 장면에 대한 감응은 다르게 반향하지 않았고, 이 가련하고도 가혹한 영화를 끌어안고픈 마음과 마냥 그럴 수만은 없는 양가적인 감정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마음에 걸려 결코 넘어갈 수 없는 장면은 감상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데, <클로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다. 그 생명력의 근원을 날카롭고도 사려 깊은 시선과, 개인의 얼굴에 무섭도록 집중하면서도 사회상을 영민하게 반영하는 지능적인 면모에서, 단순하게는 관객과 인물을 밀착시키는 강력한 동화력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딘가 위태로워 보인다. 소년의 세상이 흔들리기 때문만이 아니다. 영화 후반부부터 서사가 도식적으로 구조화되고, 소년이 연약
[비평] ‘클로즈’, 상실이 자아내는 큰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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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촬영할 때는 언제나 기술적인 문제에 몰두한다.” - 필리프 가렐
<물안에서>의 성모(신석호)는 단편영화를 만들기 위해 촬영감독인 성국(하성국), 배우로 출연하는 후배 남희(김승윤)와 함께 여러 장소를 돌아다닌다. 만들려는 영화의 배우이자 연출자이기도 한 성모는 어느 골목에 남희를 세우고 몇 발짝 걸어보게 한다. 그는 남희가 골목을 걷는 모습을 보면서 “장소와 인물이 어울리는지” 관찰하고 이곳을 촬영장소로 결정한다. 다른 장면에서 세 사람은 이미 비슷한 골목 몇 개를 지나쳐 왔지만, 성모는 그곳이 아니라 이 골목을 선택한다. 아직 무엇을 찍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성모는 구체적인 지역에서 장소를 찾고 그 자리에 인물을 배치하는 것에서부터 장면을 구상한다. 영화의 윤곽을 떠올리기 위해 지역과 장소와 배우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전제는 물론 홍상수의 변함 없는 원칙이다(“난 모델이 필요한 사람이다. 구체적인 지역, 장소, 배우…”).
홍상수의 영화에 영화감독과 배우
[비평] '물안에서'를 중심으로 본 촬영장, 리허설, 워크숍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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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이 받은 혹평 중에는 이병헌 감독의 장기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극한직업>(2018), <바람 바람 바람>(2017) 등 전작에서 선보인 시원한 유머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확실히 웃음 측면에서 <드림>은 전작들과 결이 다른데,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이병헌표 웃음’이 줄었다는 것이다.
집의 부재가 가져온 변화
이병헌표 웃음은 뭘까. 그의 인물들은 뻔뻔한 소리를 또박또박 쉴 새 없이 떠들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주로 불리할 때) 어이없는 애교를 부리기도 하고, 때때로 고함에 상욕까지 시원하게 쏟아낸다. 그들은 속물스럽지만 귀엽다. 그러나 이병헌 코미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조적인 유머’다. 그들은 자신의 한심하고 절망스러운 상황에 대해 물색없이 떠든다. 상황의 엿같음을 폭로하면서도 별일 아니라는 듯 능청을 떤다. <드림>에서 소민(아이유)이 “페이가 열정을 못 따라와서 열정을 페이에 맞췄다”고
[비평] 그럼에도 '드림'을 긍정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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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복수극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유구한 역사를 건너 복수극은 끊임없이 만들어져 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여전히 유효한 환상임을 시사하듯 복수극 안에는 인간의 적나라한 욕망이 담긴다. 복수극의 세계에서 피해와 가해는 선명히 구분되며, 가해자는 피해자에 의해 잘못에 합당한 벌을 뒤늦게 받는 것으로 끝맺는다. 권선징악의 단순한 클리셰가 반복되는 이유는 복수가 지닌 마력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복수가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일단락되더라도 복수가 끝나는 법은 없다. 복수의 칼날이 대상을 정확히 관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복수는 늘 불충분하거나 차고 넘친다. 이는 복수의 특징이기 전에 복수극의 특징이다. 복수가 손쉽게 완료될 수 있다면 서사는 진전될 수 없다. 복수극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복수를 지연시키고 상처를 대물림하면서 복수가 끝나지 않도록 만든다. 복수극의 생존 본능은 개인이 품은 복수의 욕망을 초과한다.
복수극은 복수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늘 어느 정도
[비평] '피기', 우리에게 복수극은 무엇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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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윅4>는 게임 같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급기야 1인칭 시점 운운하는 반응까지 나온다. 몇몇 신에서 내가 놓친 시점숏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하드코어 헨리>처럼 1인칭 시점이 강조된 영화가 아니다. 3시간 가까이 총을 쏘는 주인공의 몸을 내가 보고 있는데 무슨 시점숏이란 말인가. 그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도 마찬가지다. 게임에 들어왔다고 착각할 수는 있다. 여기서도 인물이 게임적 상황을 돌파하는 걸 바라볼 따름이지 내가 캐릭터의 시점이 되어 장애물을 통과하지는 않는다. <존 윅4>에서 게임을 표방한 부분은 제8구역의 한 건물에서 벌어지는 액션 시퀀스인데, 여기서 카메라는 지상에서 유리돼 계단을 따라 부상하며 부감숏으로 인물의 동선을 일목요연하게 따라가며 보여준다. 거대한 설계도 위로 인물이 안무하듯 총을 쏘는 장면은 전형적인 객관적인 숏이다.
<존 윅4>가 게임 같은
[비평] ‘존 윅4’ 아름다운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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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찬사가 민망하게도 <존 윅4>의 액션은 다소 조악하고 어설프고 가볍다. 솔직한 불평을 늘어놓자면 아무리 봐도 1편만 못하다. <존 윅> 시리즈의 매력 중 하나는 무겁고 피로하고 둔탁해서 통증까지 느껴지는 듯한(약간의 과장을 보태 존 윅이란 존재의 존재론적 고통을 형상화한 듯한) 묵직함인데 4편에선 가볍기 이를 데 없다. 특히 초반 오사카 콘티넨털 시퀀스는 용서가 힘들 정도인데, 이 유치원생 안무 같은 오리엔탈 코스프레 액션에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면 그나마 초반에 나왔다는 점이다. 점점 괜찮아지는 시퀀스들과 대망의 피날레 덕분에 170분의 앞쪽의 불쾌한 기억이 상당히 희미해진다.
오사카 시퀀스의 민망함의 절정은 존 윅의 가벼운 쌍절곤 액션이다. 총알도 튕겨내는 방탄복을 입은 강력한 적들이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작대기질 몇번에 나가떨어진다. 간혹 꿈틀거리면서도 기절한 척하고 있는 것까지 보이는데, 의도된 연출인지 무성의한 결과인지 헷갈릴 정도다. 이
[비평] ‘존 윅4’, “죽고자 하는 자 살고 살고자 하는 자 죽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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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에서>를 보는 내내 떠올렸던 것은 초점 없는 이미지를 이렇게나 신중하게 응시하는 경험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이었다. 비경제적 이미지, 시행착오, 상영 환경에 대한 불신을 촉발하는 화면, 그리고 이 모든 혐의들과 평행선을 그리면서 그저 재생되고 있을 뿐인 영화. 그러나 이 글은 초점이 나간 채로 촬영되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물안에서>가 개봉될 수 있는 영화의 조건(그런 게 있다면)을 파격적으로 변절했다거나, 영화를 어렵게 만든다는 식으로 과장하는 반응들과는 거리를 두기로 한다.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이런 질문이다. 왜 하필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가 이렇게 촬영되어야 했을까. 스스로의 삶을 영화를 향해 굴절시키는 홍상수 감독의 작업 방식에서 영화를 만드는 일은 거의 매 영화를 빼놓지 않고 출현하는 사건이지만 정작 영화 제작 현장은 영화를 둘러싼 반응들 속에서 불투명하게 남아 있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물안에서>에는 촬영 현장이 등장한
[비평] ‘물안에서’, 결정되지 않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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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와 영만이 어머니 이미경 배우에게 메시지를 올렸다. 카카오톡 PC 버전 앞에 앉아 자세를 가다듬는다. 뭐라고 쓸까. 꽤 길고 정중하게 썼다가 지운다. 조금 짧고 경쾌하게 썼다가 다시 지운다. 보내진 메시지는 그 중간 어디쯤이다.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어머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거꾸로 위로받고 있지 뭐예요. 4월16일이 또 지나고 세상은 다시 조용해질지 모르지만, 잊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이 제 주변에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도 영만이를 살아내고 계신 어머님, 매일 응원합니다….” 이제는 스스럼없이 전화드려도 편하게 받아주실 텐데, 뭐라 말해야 할지 쉽지가 않다. 유가족과 직접 연락하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의 심정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함께 애도하고 싶지만 마음뿐이어서 자책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참사를 목도한 수많은 이들이 어찌 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해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이 사건의 영문을 모르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과 맞
[비평] 4월 제주 바다처럼 찬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