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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복수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측정 불가능한 광기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복수를 할 땐 두개의 무덤을 파라’는 말처럼 복수는 근본적으로 자기 파괴적이고 소모적이다. 그만큼 제대로 된 복수를 달성하기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상 복수를 통해 보상되거나 회복되는 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효용에 눈이 멀어 복수를 갈망한다. 하나는 감정의 분출이다. 사적 영역에서 복수는 회복과 치유라기보다는 증오의 발산과 분노의 해소에 가깝다. 이런 이유로 복수는 언제나 넘치거나 모자랄 뿐 정확히 계산될 수 없다. 그나마 근사치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원시적인 형태의 정의,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일대일 대응이다. 이 순간 복수는 사적 감정에서 공적인 기능으로 치환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최소한의 정의. 언젠가는 대가를 치른다는 사회적 안전장치(혹은 경고)라 해도 좋겠다.
<더 글로리>의 복수는 나름 합리적으로 보인다. 들끓는 감정에 매몰되었다
[비평] ‘더 글로리’, 그 복수는 진짜 통쾌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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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나미(천우희)는 사건에 휘말린다.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이하 <스마트폰>)의 후반부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범죄자 준영(임시완)을 대면한 나미는 준영에게 묻는다.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억울하게 피해자가 된 나미의 입장에선 생략할 수 없는 질문일 테지만, 이를 들은 준영은 코웃음을 치며 싱거운 대답을 들려줄 뿐이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거기엔 대단한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때 준영과 함께 코웃음을 치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건 바로 화면 밖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다. 이미 오프닝에서 모든 이야기의 시작을 목격한 우리는, 나미의 질문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다. 이유를 아는 것이 나미의 상황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의 억울함에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은 주인공이 오히려 더 위태로워지는 것을 다른 영화에서 본 적도
[비평]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와 ‘서치2’, 카메라를 맡겼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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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예술을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는가? 세계적인 지휘자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란쳇)에게 물어보자.
<뉴요커>의 애덤 고프닉과 함께하는 대담에서 리디아는 두 사상을 소개한다. 첫째는 음악을 연구하다 만난 시피보 코나보 부족의 가르침이다. 그들은 노래를 만든 영혼과 같은 편에 있는 사람만이 노래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둘째는 스승 번스타인이 가르친 유대교의 개념 ‘테슈바’와 ‘카바나’다. 테슈바는 회개, 귀환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카바나는 방향성, 집중, 의도다. 기도하는 이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신성한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깨끗한 의식을 확립하는 과정이다. 리디아는 거인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해 창작가의 의도와 삶, 심지어 영혼까지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다.
구스타프 말러의 5번 교향곡 4악장
<TAR 타르>의 중심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있다. 클래식 세계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비평] ‘TAR 타르’, 불편해야 했던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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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 웰스의 <애프터썬>은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지난해 칸영화제를 비롯해 여러 영화제에서 소개되어 호평받았고 영화잡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와 <인디와이어>가 선정한 2022년 최고의 영화 1위에 뽑혔다. <씨네21>에서도 물론 다수의 평자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캠코더에 보존된 유년기의 기록을 매개로 아버지와 동행한 오래된 휴가의 기억을 불러내는 이 영화에 쏟아진 전세계의 찬사는 보편적 합의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작은 비디오카메라 렌즈 앞에 놓인 대상에 이토록 몰입하게 만드는 시선의 힘을 느껴본 적이 없다”라는 소감을 남긴 클레르 드니의 말처럼, <애프터썬>은 내밀한 기억을 통해 뒤늦게 체감되는 감정과 그것에 접속하게 하는 영화적 회상의 매혹을 짚는 환대 섞인 감상으로 가득하다.
나는 이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종류의 불만을 품고 있는 편이다. <애프터썬&
[비평] ‘애프터썬’, 형식이라는 강박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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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여러 요인 중 하나는 영화의 말미에 등장하는 몽타주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모아 몽타주한 것은 의외였다. 그의 영화의 특징은 연속성에 있었다. 원테이크로 찍은 듯한 <라라랜드>의 오프닝 신이 그 예다. 그에게 편집술은 숏과 숏의 경계를 지우고 하나의 연속적인 시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활동사진부터 3D영화 <아바타>까지 짧지만 강렬한 영화의 역사를 몽타주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빌론> 말미에 등장한 몽타주는 두개로 나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몽타주는 매니(디에고 칼바)가 영화를 보는 것이다. 1952년 매니는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할리우드로 여행을 와서 한 영화관에 들러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본다. <바빌론>은 이 영화의 리믹스다. 매니는 이 영화를 보며 과거를 반추하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
[비평] ‘바빌론’, 결국, 구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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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 소피가 스크린에 불쑥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영화는 넘실대는 기억의 주인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애프터썬>은 기억에 대한 메타포로 가득 차 있지만 회상을 드러내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식인 플래시백의 관습적 표기만큼은 숨긴다. 물론 곳곳에 힌트가 산재해 있다. 영화는 서사의 주도적 인물이 11살 소피(프랭키 코리오)이며, 또한 기억의 주인이기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둔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며 성에 눈뜨기 시작한 소피의 여름은 선명한 성장담의 구조를 갖고 흐른다. 반면 31살의 젊은 아빠 캘럼(폴 메스칼)의 사연은 인과적으로 전개되기보다는 불안한 파편들로 조각나 있다. 심지어 영화의 오프닝에는 노골적으로 어른 소피(셀리아 롤슨 홀)의 실루엣과 얼굴이 등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영화를 처음 대면한 관객에게는 아직 해석할 수 없는 주인 없는 정보들일 뿐이다.
다시 말해 <애프터썬>은 영화적인 기법으로 플래시백을 보여주는 것을 꽤나 오랫
[비평] ‘애프터썬’, 액체적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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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복수극과 로맨스에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서사의 주요 동력이 대개는 불평등한 계급 관계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가장 사랑받는 복수극 유형은 가진 것 없는 약자가 부패한 거대 자본 권력을 응징하는 이야기이고, 제일 흔한 로맨스 서사는 가난한 여성이 부유한 남성과의 연애로 신분 상승을 실현하는 신데렐라 이야기다. 요컨대 두 장르에는 사회적 약자의 계급 질서 흔들기라는 판타지가 반영되어 있다.
계급 격차가 한층 심화된 요즘에는 이같은 판타지도 변하는 추세다. 단순한 환상과 욕망의 차원이 아니라, 주인공이 다시 태어나는 본격 판타지 장치를 통해서만 복수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가 하면(<재벌집 막내아들>),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판타지에서나 신데렐라 스토리가 가능해진다(<금혼령, 조선 혼인 금지령>). 아예 판타지를 제거한 작품들도 등장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와 JTBC 금토 드라마 <사랑의 이해>가 여기에 해당
[비평] ‘더 글로리’와 ‘사랑의 이해’가 그리는 격차 사회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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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님 워너비는 <다음 소희>입니다.” 비평 지면 담당자인 송경원 기자의 문자를 받았을 때, 어쩌면 추천의 이유가 주인공과 내가 같은 이름이기 때문일 거라고 추정했다. 매주 발행되는 편집장 칼럼에서 때론 당황스러우리만큼 꿈틀거리는 유머를 종종 느껴왔던 터다. 물론 우리가 마주한 무거운 현실을 겨냥하는 <다음 소희>를 보면서 유머라니 가당치 않다. 그저 주인공과 동명인 사람이 영화를 평하는 상황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를 직감했다고 해두자.
영화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때때로 속이 뜨끔했다. 그러나 잠깐일 뿐, 이내 이름과 거리를 두었다. 언젠가 캠퍼스에서 누군가가 “아웃사이더!”라고 불렀을 때, 나도 모르게 돌아봤던 딱 그 정도의 뜨끔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김소희라는 이름을 마주했을 때 내 이름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더 많다. 세상에 김소희라는 이름은 너무 흔하다. <씨네21>만 해도 나는 벌써 세 번째 김소희다. 김소
[비평] 김소희 평론가의 '다음소희', 세 가지 상실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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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하고 오해하려 들지 않는 한, <유령>이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말은 농담으로 넘겨들을 일이다. 몇몇 실증적 역사의 지표들, 조선총독부 건물, 남산의 신사, 황군 군복과 일본어, 영화가 배경으로 삼은 1933년과 비슷한 시기에 (하지만 정확하게는 1932년에) 조선에서 개봉했던, <상하이 익스프레스>를 홍보하는 영화관의 대형 간판 이미지 등이 일반적으로 훈련된 관객의 기억을 자극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여기에서 상기된 과거는 역사를 구성하는 시간의 한 단면이 아닌, 집단의 기억으로부터 몇 가지 요소들을 추출하고 새롭게 배치하여 만들어낸 추상적인 시간이다. 고증에 대한 열망과 그것의 오류에 대한 지적, 또는 인위적인 시간으로 인해 발생한 영화의 빈틈을 뛰어넘어 역사와 성급하게 대화하려는 시도가 때로는 영화에 대한 논의를 위태롭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와 관련하여 역사가 마크 페로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과거를 다룬 영화의 이미지들이
[비평] ‘유령’, 한국영화의 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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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살 린다씨는 분홍빛 블라우스에 색깔을 맞춘 헤어밴드로 금발을 감싸고 있었다. 그가 우리를 만나자마자 보여준 건 아이폰에 있는 가족사진이었다. 수백장의 사진 속에서 남편과 세 자녀들, 그들의 배우자들, 또 그들이 낳은 자녀들이 웃고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 보험사에서 일하다 출산과 함께 일을 그만둔 린다씨는 “손주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며 웃었다. 지난해 11월 미국 중간선거전의 민심을 들어보겠다며 자택을 찾은 취재진(필자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방송기자다.-편집자)을 따뜻하게 맞아준 그는 굵직한 초콜릿 칩이 촘촘히 박힌 수제 쿠키에다 음료를 내주며 장시간 질문에 답해줬다. 선거 후 공개되는 한국의 방송 프로그램이 미국 정치 판세에 영향을 미칠 리도 없고 개인적으로 도움 될 일도 없었으므로, 그가 베푼 다과와 2시간의 인터뷰는 그저 인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기에 충분했다. “지금 미국 정치는 선과 악의 온전한 전투처럼 느껴집니다. 10~20년 전만
[비평] 최근 한국 상업영화에 국가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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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마치 음악의 한 구절처럼 1990년대의 추억과 낭만을 소환한다. 얼핏 과거의 영광을 되새김질하는 복고의 시선처럼 보이지만 실은 ‘영광의 순간은 지금’이라는 당위에 대한 이야기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세태나 환경,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언제나 당연할 가치를 말한다. 때문에 지금 시대의 결핍을 자극하고 한층 빛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그것이 스크린의 두터운 벽을 부수고 현실로 스며 나오지 못할지라도 짧은 위안은 충분한 위력을 가진다. 그러다 요즘 한창 재밌게 보고 있는 드라마 <사랑의 이해>가 문득 겹쳐 보였다. 오해의 오해를 거듭하는 답답한 전개와 망설임을 의인화한 것 같은 인물들의 행보에 ‘구닥다리 같다’는 반응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동시에 한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계급 갈등을 첨예하게 드러낸 시대 반영적인 작품이란 견해도 나온다. 상이한 두 갈래 반응의 간격이 자못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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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사랑의 이해’가 실패와 망설임을 마주 보는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