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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도서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신형철은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를 두고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가 살인마로 각성한다는 요지의 이야기는 영화 안팎에서 모두가 인정한 것처럼 성장담이며, ‘성장은 살인이다’라는 은유로 정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디아가 타인에게 영향 받는 일을 타인이 지닌 걸 먹어 치운다고 표현한다. 유사한 맥락으로 <본즈 앤 올>을 본다면, 신형철의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사랑은 식인이다’라고. ‘성장은 살인이다’라는 은유 안에서 먹어 치운다는 표현이 비유라면 <본즈 앤 올>의 매런(테일러 러셀)과 리(티모시 샬라메)는 정말 사람을 먹어 치운다. 작품의 원작 소설도 성장담으로 볼 여지는 있다. 특히 소설에서 매런이 리를 먹어버리는 사건은 자립의 마침표를 찍는 일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영화는 성장이 아니라 사랑에 방점이 찍힌 게 분명해 보인다. 무엇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비평] ‘본즈 앤 올’,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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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스 메카스의 <리투아니아 여행의 추억>은 한밤중에 불길에 휩싸인 오스트리아 빈 도심의 광경으로 끝난다. 세 부분으로 구성된 이 영화의 마지막 파트는 함부르크의 교외 지역에서 시작해(이곳은 메카스가 2차대전 당시에 갇혀 있던 강제 수용소가 위치한 지역이다) 그가 수용소 수감을 피하고자 떠나려던 빈으로 향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영화의 마지막에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은 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불리는 오래된 청과시장이 불타는 순간이다.
영화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리투아니아에서 촬영된 영상들이다. 리투아니아 시골 마을의 오래된 집을 배경으로, 메카스와 그의 동생이 25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가족들과 만나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천국으로 돌아가는 기쁨을 보여주는 작품”(율리우스 지즈)이라는 감상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메카스의 고향에서 끝맺지 못한다. 전쟁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함부르크와 빈에서, 끝내 오래된 장소가 소실돼버리는 순간을 마주한다
[비평] ‘아마겟돈 타임’과 ‘본즈 앤 올’, 그리고 ‘리투아니아 여행의 추억‘의 지워진 장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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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를 생각하면 올해 두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하나는 <실종>이다. 부녀는 탁구공 없이 탁구를 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소리는 들린다. 부녀는 랠리를 이어가고 카메라는 네트를 줌인한다. 부재를 느끼게 하는 이 기묘한 영화의 마지막 숏은 네트를 통해 윤리의 경계를 형상화한다. 다른 하나는 <창밖은 겨울>이다. 선배 버스 기사들이 휴식 시간에 탁구를 친다. 심판을 보는 석우(곽민규)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비춘다.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그의 얼굴 위로 탁구공이 왔다 갔다 한다. 이내 석우는 선배들에게 심판을 제대로 안 보냐며 꾸중을 듣는다. 경계를 가르는 네트에 위치한 석우. 그는 시간의 경계에 멈춰 있다. 과거와 현재, 그 사이에서 석우는 잠시 길을 잃었다.
MP3가 촉발시킨 감정들
<창밖은 겨울>엔 두개의 인력이 석우에게 작용한다. 하나는 과거로, 다른 하나는 현재로 그를 이끈다. 이러한 움직임은 터미널에서 본 MP3로부터 시작된다. 석우는 영화
[비평] ‘창밖은 겨울’,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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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있다. 아이는 포로로 붙잡힌다. 포로가 된 아이는 살인을 저지른 열명의 삼촌에게 둘러싸이는데, 이들을 일컬어 빅토르 위고는 ‘그의 아버지의 끔찍한 형제들’이라 칭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그 상대를 ‘끔찍한 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무튼 포로로 붙잡힌 아이의 이야기는 ‘구세주’를 만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얻는다. 아이는 삼촌으로부터 도망치고, 그 과정에서 두려움을 경험한다. 그리고 마침내 ‘말하는 동물’과 만나게 된다. 이 신비로운 동물과의 조우 덕택에 아이는 자신이 태어났던 낙원으로 되돌아간다. 이상의 내용이 바로 위고의 서사시 <세기의 전설>에 등장하는 ‘삼촌과 대립하는 아이’ 이야기의 원형이다. 2018년 개봉했던 <블랙 팬서>에는 마치 <햄릿>과도 흡사한 아버지의 형제 이야기가 등장한다. 킬몽거(마이클 B. 조던) 캐릭터를 통해서다. 그리고 속편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이하 <와칸다 포에버>)에서 다시, 킬몽
[비평]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세이렌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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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비행사를 꿈꾸는 흑인 소년 죠니(제일린 웹)는 침대에 누워 거동조차 힘든 할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고한다. 지금은 사립학교에 다니는 친구 폴(뱅크스 레페타)이 갑자기 플로리다로 떠나자는 제안을 던졌기 때문이다. 죠니에겐 대안이 없다. 보호자인 할머니는 자신을 돌봐줄 능력이 없고 이대로면 사회복지시설에 끌려갈 처지다. 폴의 집 뒷마당에 지어진 아지트에서 잠시 비바람을 피하고 있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른다. 폴은 함께 떠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학교에 몰래 들어가 컴퓨터를 훔치자고 유혹한다. 학교에서 문제아 취급을 받고 제 발로 뛰쳐나올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이게 범죄라는 걸 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죠니는 대안이 없다. 세상의 그릇된 것들로부터 지켜주던 우산 같은 외할아버지(앤서니 홉킨스)가 돌아가셨다 해도 여전히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는 폴과는 달리.
죠니의 할머니가 나오는 장면은 이상하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폴의 시점에서 벗어난 기이한 개입이다
[비평] ‘아마겟돈 타임’, 유령과 함께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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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탑>은 여섯개의 시퀀스로 구성되어 있다(여기에서의 시퀀스 구분은 이 글의 진행을 위한 자의적인 것이다). 첫 번째 시퀀스에서는 영화의 유일한 공간인, 병수(권해효)가 머물게 될 건물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진다. 1층에서 식사를 마친 세 사람, 병수와 병수의 딸 정수(박미소), 그리고 건물주 해옥(이혜영)은 함께 계단을 오르며 이후에 등장하는 지하 작업실, 2층 식당, 각각 3층과 4층의 세입자가 살고 있는 집, 그리고 4층 집에서 연결된 옥상을 차례로 지나친다. 이 시퀀스의 마지막 숏은 옥상 난간에 살짝 기대어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는 정수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프레임 안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무섭지 않으냐고 묻는 병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목소리는 이전 숏에서 병수가 위치했던 자리, 해옥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던 옥상의 다른 편으로부터 들려왔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영화의 관객에게 외화면 영역이 인식되는 기본적인 방식일 것이다. 그러므로 옥상에 있는 정수
[비평] ‘탑’, ‘이후’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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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집 안에 두 여자가 서로 거리를 둔 채 앉아 있다.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대화만큼은 선명하게 들린다. 서로의 얼굴만 봐도 치를 떨던 이들이기에, 어쩌면 어둠과 간격이 두 사람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여자가 묻는다. 엄마, 나 사랑해? 그러자 다른 여자는 웃음을 터뜨린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면서 대답을 유예하고 있는, 불온한 웃음이다.
앨리슨 벡델의 <당신 엄마 맞아?>에서 이 질문은 교묘하게 자리를 바꾸어 등장한다. 이 만화에서는 엄마가 딸에게 묻는다. 나를 사랑하니? 부모와 자식간의 무조건적인 헌신과 신뢰라는 전제에 균열을 가하는 의심은 왜 엄마와 딸 사이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일까.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선형적 질서가 무참히 깨진 모녀 관계를 다룬다. 엄마 수경(양말복)과 딸 이정(임지호)의 관계는 이미 부서져 있고, 그 균열을 떠날 줄 모른다. 영화는 틀어진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배경 설명
[비평]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불온한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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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야마 신지의 장편 데뷔작 <헬프리스>의 도입부는 하늘에 떠오른 카메라의 공중 촬영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하늘 위에서 심하게 흔들리며 현기증이 일 듯한 위태로운 움직임으로 기타큐슈의 풍경을 내려다본다. 이 매혹적인 장면은 단순히 한 편의 영화를 여는 근사한 시작에 그치지 않는다. 하늘에서 시작된 작가의 여정이 <구름 위에 살다>라는 또 다른 하늘의 영화를 끝으로 이르게 종결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관객이라면 아오야마의 영화에 침범하는 구름과 하늘에 시선을 뺏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늘은 아오야마의 영화에서 주의 깊게 관측되는 대상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행위에는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 <헬프리스>의 초반부에서 집 안에 누워 있던 겐지(아사노 타다노부)가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 뒤에 이어붙는 컷은 그의 시선으로 보이는 텅 빈 하늘이 아니라 어느 공장의 외경을 비추는 무인의 삽입 쇼트다. 시선의 물리적 연결을 고려한다면 프레임
[비평] 아오야마 신지 감독론: 아오야마 신지, 혹은 하늘을 바라보는 영화의 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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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1960)부터 장뤽 고다르는 뛰어난 형식주의자였다. 실험적 편집, 다이얼로그 도중의 갑작스러운 컷, 풀 프레이밍된 그림, 배우의 목소리를 덮는 음악.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클래식 영화의 규칙을 하나하나 무너뜨렸다. 고다르는 세계와 동시대 사람들(철학자이건 학생이건 노동자이건)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고, 필름누아르나 SF 같은 장르에 예술영화를 접목한 팝 시네아스트의 선두 주자이기도 했다.
1965년 고다르는 전체주의, 컴퓨터의 절대권력, 인간의 상품화 같은 현대의 모든 공포가 집약된 미래도시 ‘알파빌’을 발명한다. 사립 탐정 레미 코숑이 주인공인 <알파빌>(1965)은 프리츠 랑과 <메트로폴리스>(1927), 그리고 필름누아르에 대한 감독의 애정을 가늠케 하는 작품이다. 고다르에게 알파빌은 미래도시라기보다 시멘트 건물로 뒤덮여가던 60년대 당시의 파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알파빌>은 공상과학영화라기보다 당대에
[비평] ‘알파빌’, 고통의 도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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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하나의 매듭을 짓고 돌아설 때마다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12년의 성장을 담아낸 영화 <보이후드>에서 엄마 올리비아(퍼트리샤 아켓)는 아들 메이슨(엘라 콜트레인)이 기숙사로 떠나기 전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트린다. 올리비아는 아들이 사진을 배우기 시작할 때 처음 찍은 사진을 보관 중이다. 엄마는 아들에게 사진을 가져가길 권하지만 이미 다가올 미래에 시선을 빼앗긴 아들은 굳이 뭐 하러 가져가냐고 무신경하게 내뱉는다. 이윽고 카메라는 몇 걸음 물러나 아들이 남겨두고 가겠다는 것들의 풍경을 가만히 비춘다. 올리비아의 종착역이자 아들의 출발점이기도 한 이 장면에는 각각 과거와 미래로 시선을 건네는 현재의 두 얼굴이 겹쳐 있다.
(올리비아의 시점에서) 일견 서글프고 허무하게 느껴진 이 장면의 진가는 내용이 아니라 편집 태도에 있다. 어머니의 슬픔을 앞에 둔 아들은 어떤 리액션도 없다. 아마도 뭔가 말을 건넸을 테지만 영화는 이를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실패에 머물지 않은 힘과 끝내 버릴 수 없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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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점에 우리는 ‘탑’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화면을 채운 모습을 보게 된다. ㅌ, ㅏ, ㅂ이 결합한 글자는 마치 상형문자처럼 보인다. 글자 ‘탑’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3층 정도 높이의 건축물과 닮았다. 이것은 같은 발음을 가진 영문자(TOP)로 풀어 적을 때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논문 ‘영화의 원리와 표의문자’(1929)에서 한자어의 축약성에 특히 주목한다. 그는 이미지를 추상화한 상형문자, 두개의 문자를 결합해 다른 의미로 나아가는 표의문자에서 숏과 숏을 결합해 제삼의 지대에 다가가는 영화 몽타주 개념의 실체를 본다. 홍상수의 영화를 표의문자에 빗대면 그 문자는 서로 다른 이미지를 부딪치기보다는 비슷한 이미지를 부딪쳐 미궁을 짓는 편에 속한다. 감독의 영화 사상 최초의 한 글자 영화인 <탑>은 이러한 경향의 정점에 있다.
한층에 하나씩
영화는 화면 바깥에서 음악이 개입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총 4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내용에 따라
[비평] ‘탑’, 영화의 건축술과 배우의 변신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