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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에 관한 호평은 대부분 이 영화가 수행하는 애도의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4·16 세월호 참사를 다루면서 착취적 묘사를 배제하고 섬세하고 시적인 터치로 두 인물의 되돌릴 수 없는 하루를 그려냈다는 견해가 자주 보인다. <너와 나>를 환대하는 이런 평가의 언어는 영화의 연출자인 조현철이 반복해서 언급한 “참사를 영화적 스펙터클로 이용하는 데 윤리적인 거부감이 들었다”는 말과 맞물리며 영화가 선택한 은유적이고 우회적인 구조를 정당화한다. 나는 조현철이 꺼내든 그 말의 진심을 믿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 말이 무엇도 설명하지 않는 공허한 진술이며, 다소 과격하게 반문하자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정작 영화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말이라고 생각한다(그는 ‘영화적 스펙터클’이 무엇인지도, ‘윤리적 거부감’이 무엇인지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에 관한 적잖은 비평은 이와 같은 연출자의 ‘의도’를 의심 없이 받아들여, 영화가 성취했다고 가장한
[비평] <너와 나>와 한국 독립영화라는 문제, <너와 나>, <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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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얼마나 인상적인지와는 별개로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노래는 대부분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노래는 호흡을 가다듬는 휴지부이거나 공감을 끌어올리기 위한 치트키이거나 팬서비스다. 노래가 중심이 되는 뮤지컬 영화라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노래는 서사나 감정의 보충재이거나 관객에게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방백에 가까운 혼잣말이다. 혹은 단체 군무를 위해 마련된 반주곡이다. 어느 쪽이든 감정전달이나 분위기 환기를 위한 친근한 매개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논의할 영화 속 인물들이 노래하는 장면 역시 크게는 영화 속 다른 노래 장면과 비슷한 한계를 공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분명 이들 영화에서 노래가 기존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과잉의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그저 인상적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 힘든 끈적함을 남긴다.
<키리에의 노래>는 버스킹하는 키리에의 노래를 영화 상영 환경에 맞춰 정제하기를 거절하고 현장음에 가까운 사운드로 들려준다. 이는 관객을 현장에
[비평]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앵그리 애니> <키리에의 노래>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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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진행한 ‘독립영화 쇼케이스’에 비평으로 참여한 나는 <괴인> 안에 한국영화 속 인물들이 관류한다고 평하며 명장들의 영화와 연결지었다. 특히 이창동의 <버닝>과 봉준호의 <기생충>을 결합한 형태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유는 인물 구성과 특정 세대의 감각 그리고 건축의 형태와 계급성이 <괴인>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웃음을 유발하는 특정 상황과 대화에서 홍상수의 영화 같다고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는데 이후에 <괴인>에 대해 곱씹을수록 그 인상은 사라졌고 구체적으로 단 하나의 작품만이 떠올랐다. 그것은 홍상수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다. 따라서 <괴인>을 두고 “계보를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영화”라고 평한 것은 반 정도 맞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계보학적으로 추적이 가능하지만, 그것이 눈에 띄지 않는 새로운 영화다.
불안이 건져올린 비일상성
다
[비평] ‘괴인’에 녹아든 시대 감각, <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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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후반부, 나츠코를 찾아 탑 안의 세계로 떠나온 마히토는 마침내 히미의 도움을 받아 나츠코가 잠들어 있는 산실에 도착한다. 마히토는 나츠코를 깨워 데려가려 하지만 눈을 엘 듯 춤을 추는 종잇조각이 둘의 접촉을 가로막고, “나츠코 엄마!”라고 외친 마히토는 의식을 잃는다. 종잇조각의 우윳빛 색감이 산실의 적막한 어둠과 대조를 이루는 이 장면은, 마히토가 전쟁의 화마 속에서 어머니를 상실하던 도입부의 장면과 포개어지며 시적 서정을 새기고 간다.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런데, 작화의 매혹을 잠시 차치하고 곱씹어본다면 이 장면의 감흥은 얼마간 수상쩍은 구석이 있다. 마히토는 이세계에 잠입하기 전까지 별다른 접점도 없던 나츠코를 왜 돌연 엄마라고 부르는 걸까? 마찬가지 이유로 마히토에게 별 감정이 없을 나츠코는 왜 그의 애절한 외침에 “너 같은 건 정말 싫어!”라고 쏘아붙이는 걸까? 마히토가 탑에 잠입하기 전까지인 1부의 세계에서 가족이라고 말하기
[비평] 미야자키 하야오의 우정, 그리고 식탁의 소멸에 관하여,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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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단짝은 매일 함께 16번 시내버스에 탔다. 이어폰 한쪽씩을 나눠 끼고 피노키오의 노래 <사랑과 우정 사이>를 듣곤 했다.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그날도 함께 등교하던 중이었다. 잠깐, 오늘 미술 시간 있는데, 스케치북을 놓고 왔어. 친구를 버스에 먼저 태워보내고 준비물을 챙겨 허둥지둥 택시를 잡아탔다. 하지만 매일 오가던 한강 다리는 더이상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아니었다. 수진은 그렇게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은 채 세상에 남았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를 소재로 한 정윤철 감독의 단편 <기념촬영> 이야기다. 수진이 살아남은 건 스케치북을 깜빡했다는 이유뿐이었다. 올림픽을 치르느라 무리한 기간에 완공된 성수대교는 강남 팽창에 따른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더디고 오랜 조사 끝에 당국이 밝혔다. 처벌은 공사 실무자에게만 내려졌다. 그로부터 20년 뒤. 멈추지 않은 어른들의 탐욕은 진도 앞바다에서 30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2023년
[비평] 참사의 시간, 영화의 시간,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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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마이클 패스벤더)는 타깃(엔드리 휼즈)이 맞은편 건물로 들어서기를 기다리며 명상적 독백을 쏟아낸다. 그중에는 청부살인을 수행하는 킬러 자신의 작업 계율도 있다. 그렇지만 첫 번째 챕터를 지나 여섯 번째 챕터에 이르기까지 그가 벌이게 될 싸움에는 보수가 따르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왜냐하면 <더 킬러>는 타깃 사살 임무에서 실패했으며,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을 사살하는 킬러의 이동 경로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끊임없이 되뇌는 계율은 진심이 아니거나, 언제든 위반할 수 있는 한낱 독백에 불과하다. 제거하라, 나의 실패를 알고 있는 자들을. 이것이 영화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킬러의 0순위 행동 강령이다. 그는 자신의 실패사를 하나둘 지워나간다. 그리고 최종 관문이자 실제로 보수를 지급하는 자인 클라이언트(알리스 하워드)와 마침내 대면하게 되었을 때 킬러는 클라이언트를 향해 겨눴던 총구를 내려버린다.기이한 양가성의 인물
짙게 드리운 히치콕의 그림자 아래에
[비평] 실패사를 지우는 이 자의 정체는, ‘더 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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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를 처음 본 건 지난해 부산영화제를 통해서였다. 때는 2022년 10월 초였고, 이번 극장 개봉을 맞이해 또 한번 영화를 보게 되었다. 관람 시기를 밝히는 이유는 그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처음 영화를 보고 떠올린 사건과, 이번에 다시 영화를 봤을 때 떠올린 사건이 달라졌다. 두 사건 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참사였으며, 남겨진 사람들에게 아직까지도 사회의 제대로 된 위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운이 좋게도 두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닐 수 있었고,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너와 나>를 보며 이 영화가 소재로 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10·29 이태원 참사로 고통받은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어루만질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조심스레 해야만 하는 이 생각이, 영화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떠올랐다. 죄책감을 가진 채
[비평]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하기,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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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찾지 마.” 삶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이며, 진리는 무엇이냐, 묻는 재원(하성국)에게 홍의주 시인(기주봉)이 단호하게 말한다. 무언가를 정의하기보다는 무언가의 표면을 바라보고 느끼고 틈을 내며, 온전히 존재하거나 존재감이 희박해질 때까지 밀어붙였던 방식은 홍상수의 세계를 따라온 관객에게도 체험되어온 양식 아닌가. 그래서일까. 재원이 술기운이 도는 채로 진지하게 삶과 사랑과 진리와 같이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를 물을 때마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관객인 ‘우리’는 관성의 힘으로 웃었던 건 아닐까. 재원의 치기 어리고도 아름다운 질문에 언젠가 나도 되뇌었을 질문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서도, 홍상수의 영화에 익숙해져 웃는다는 의미에서도 말이다.
물론 이 신에서 웃지 않은 이들도 많았을 테고 더욱이 홍상수 감독이 유머를 구사하고자 하지 않았을 수 있다. 웃음은 즉흥적이지만 때론 덩달아 웃는 경우도 있는지라 부산국제영화제라는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영화를 관람한
[비평] ‘우리’라는 따뜻하고 연약한 말, ‘우리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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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사라짐으로부터 되돌아온다. 닫힌 극장의 어둠 속에서 스크린 위에 빛이 맺히고 이미지가 되살아날 때, 영화는 보이지 않던 과거를 나타나게 한다. 잃어버린 것, 금지되고 추방된 것, 기억에서 지워진 것들이 스크린이라는 투사의 장치를 매개로 돌아온다. 그래서 영화는 죽음과 부활을 전제로 하는 경험에 속한다. 로베르 브레송이 영화를 ‘두개의 죽음과 세개의 탄생’을 거치는 매체라 말한 이유(“내 영화는 내가 기용한 살아 있는 사람들과 실제 사물들에 의해 부활했다가 필름 위에서 죽는다. 그러나 일정한 순서로 배치해서 스크린에 상영하면, 물에 담긴 꽃처럼 생기를 되찾는다”)와 장뤼크 고다르가 <영화의 역사(들)>에서 “영상은 언제나 부활의 시간에 도래한다”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탄생한 이미지는 부재의 시간을 통과해 죽음으로 던져진 뒤에 흰 스크린에서 비로소 부활한다.
부활한 이미지는 그러나 전과 다른 모습으로 귀환한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
[비평] 죽음과 소생, ‘플라워 킬링 문’과 ‘당나귀 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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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거미집>에서 김열 감독(송강호)이 집착해 마지않았던 플랑 세캉스(시퀀스 숏)는 이충현 감독의 시작이었다. 데뷔작 단편 <몸 값>을 향한 찬사와 환호는 14분 분량의 러닝타임이 전부 플랑 세캉스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비롯한다는 데 이견이 많지 않을 것이다. 원조 교제 현장이 실은 장기 매매 장소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끝나는 영화에서 플랑 세캉스가 주는 마법은 리얼리즘에 있다. 하나는 사건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실시간의 리얼리즘, 다른 하나는 소품이나 배경, 인물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느끼게끔 하는 현장감의 리얼리즘, 또 관객이 범죄 서사를 허구가 아닌 현실로 수용하게 하는 내러티브의 리얼리즘이 그것이다.
여기에 더해 <몸 값>은 하나의 숏-시퀀스가 전체 작품 속 복수의 시퀀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작품으로 독립한 ‘몽타주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는 점을 곱씹을 만하다. 물론 ‘몽타주 없는 영화’라는 말은 하나의 시
[비평] 몽타주 없는 몽타주, ‘발레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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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과 <거미집>은 올해 칸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한국영화이자, 장르영화다. <화란>은 누아르이자 성장영화이고, <거미집>은 코미디이자 영화에 관한 영화다. 애석하게도 둘은 (다른 많은 개봉작이 그랬듯) 기대보다 낮은 관객수를 기록하는 중이다. 비슷한 시기에 공개되었다는 점 외에 별다른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두 영화는 편집에 관한 인식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통한다. <거미집>은 극 중 ‘플랑 세캉스’라는 편집 용어를 이례적으로 자주 언급한다. 김지운 감독은 이를 두고 일종의 맥거핀이라고 언급한 바 있으나, <거미집>에서 일어나는 일 중 어떤 것도 중심의 자리에 놓을 수 없으므로 부차적 요소로 치부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거미집>은 맥거핀을 모아 생성한 거대한 집과도 같기 때문이다. <화란>에는 시퀀스를 마무리하는 편집점이 너무 빠르거나 느슨한 순간이 있다. 어떤 시퀀스는 인물의 대사가
[비평] 지루함 혹은 지연에 관한 옹호와 의심, ‘거미집’과 ‘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