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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비평은 마치 내게 평론은 여기서 끝나도 인생은 계속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하 <슬램덩크>)가 개봉 후 흥행을 이어간다는 소식에 시큰둥했던 건 사실이다. ‘29년이 지난 이제 와서 굳이 왜?’ 하는 마음이 앞섰고, 흥행은 일부 추억에 젖은 <슬램덩크> 열혈 팬들이 보여준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이 글을 쓰지 않았다면 끝까지 보지 않았을 것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경향신문>에 연재하는 칼럼에서 <슬램덩크> 흥행의 이유를 분석한다(‘강유정의 영화로 세상 읽기’-“중요한 건 변하지 않은 마음”, 2023년 2월10일자). 거의 최초로 문화를 주체적으로 향유하던 이른바 X세대가 향수를 바탕으로 젊은 시절 즐겼던 문화 콘텐츠를 소환했고, 아래 세대에게 전파했다는 것. 또 이런 현상은 <탑건: 매버릭> 때부터 기미가 보였고, 그 배경에 부조리하고 힘겨운 현실이 있다는 점까지. 훗날 오늘의
[비평] 당신의 전성기는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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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존 포드일까?’를 질문하는 대신 ‘왜 존 포드의 가르침을 새미가 실천하는 장면은 없을까?’를 묻고 싶었다.
필름 카메라는 한 방향을 바라볼 수밖에 없기에, 시선의 반대편에는 언제나 누락된 것들이 남겨진다. 영화를 보는 체험도 비슷할 것이다. 어느 한 장면에 깊게 몰입한 관객은 영화에 담긴 다른 것들을 놓치곤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 도입부에서 어린 시절의 새미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그들이 함께 보는 <지상 최대의 쇼>에서 선로 위를 달리는 기차는 장애물과 부딪히고 탈선해 다른 객차를 모두 부순다. 어린 소년을 한순간에 사로잡고 소년에게 잊지 못할 경험으로 각인되는 것은, 새미의 부모가 장담한 서커스와 광대와 곡예사가 나오는 아름다운 꿈이 아니라 경로를 벗어나 폭주하는 기차가 주변에 있는 것들을 파괴하는 장면이다.
이 순간은 역설적이다. 영화가 전하는 강렬하고 원초적인 체험은 어린아이 새미를 순식간에 스크
[비평] ‘파벨만스’, 카메라 너머의 불온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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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의 얼굴을 내도록 지켜보면서도 마음이 이리 비어버려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아도 <소울메이트>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긴 어렵다. 원작인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2016)의 잔상이 아른거리고, 서사적 결함이 눈에 밟힌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빽빽하고도 헐겁다. 두 친구의 진한 우정과 다사다난한 인생사를 빼곡히 채운 이야기는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 끝에 온전히 드러나는데, 그 뒷맛이 씁쓸하다. 종국에 드러나는 서사의 평이함 때문인지 이야기가 주가 된다기보다는 반전이 안기는 충격이 핵심인 것 같고, 반격을 가하는 스토리텔링에 강한 집착마저 보인다는 인상이 남는다. 물론 서사의 기본 구조는 원작에서 빌려온 것이며, 서사 전달에 긴장감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매도될 일은 아니다. 다소 투박하지만 야심만만한 구조 안에서 감성 짙은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도 감상자에 따라서는 다양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 반응을
[비평] '소울메이트', 여성 서사와 모성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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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만스>의 자전성은 스필버그 자신의 것만은 아니다.
자전성은 그의 다채로운 영화 목록만큼이나 혼종적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아마도) 최초의 자전적 영화. 자전성은 <파벨만스>에 관해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자전성은 털어놓지 못한 어린 시절의 비밀이 밝혀진다거나 새삼스럽게 무언가를 고백하는 데 있지 않다. <파벨만스>는 어디까지나 영화와 인생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접점을 그려온 감독이 펼친 영화-자서전이다. 그리하여 자전성은 스필버그 자신만이 아니라 그의 영화를 보며 자라온 세대, 혹은 누구의 무엇이든 영화를 보며 자란 이들을 아우른다. 영화는 스필버그에 의해 쓰인 일종의 공동 자서전과도 같다. 세계적인 감독에게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고 창의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이다. 다만 <파벨만스>를 보면 이를 뒤바꿔 말하고 싶어진다. 가장 세계적인 것이 가장 개인적인 것이다.
이 특별한 자전 영화의 출발점은 집이나
[비평] '파벨만스', 영화가 말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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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이 열리는 문이 있다. 혹은 문이 열렸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건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이 그리는 세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에는 이유 없이 사람이 죽는 일이 있다. 혹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의 선율이 되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선율’은 나의 표현이 아니라 감독 신카이 마코토의 표현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자신의 영화를 직접 소설화한 책 <스즈메의 문단속> ‘작가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38살 때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내가 직접 피해자가 된 건 아니었으나 그 일은 내 40대를 관통하는 일상을 지배하는 선율이 되었다. (중략) 왜. 어째서. 왜 그 사람이. 왜 내가 아니라. 이대로 끝인가. 이대로 도망칠 수 있을까. 계속 모르는 척하고 살 수 있나.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신
[비평] ‘스즈메의 문단속’, 애도의 방법으로서의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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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셰린의 밴시>에는 그냥 지나치기 수상한 구석이 있다. 이곳의 인간들은 종종 너무 과격하다. 그렇지 않은가. 기어이 피를 보겠다는 남자와 지지 않고 응수하는 남자라니. 처음에는 마틴 맥도나 감독 특유의 우화적이고 연극적인 연출이라 여기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런 과격함은 영화의 마지막, 파우릭(콜린 패럴)의 결단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한다. 파우릭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한 것일까? 단순한 복수인가, 윤리적인 응징인가. 혹은 여태 눌러놓은 서운함과 분노가 폭발한 것일까? 더 의아한 것은 그런 결단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반응이다. 게다가 그 순간을 은은하게 감싸고 도는 경건한 공기라니. 이런 이상함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마틴 맥도나의 작품들을 경유해 하나의 가설에 이르렀고, 그 가정은 지금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파우릭의 결단을 설명하기 위해 쓰여질 것이다. 그것이 기행이 아니라 성스러운 의식이며, 영화의 숭고한 목적지임을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도 말할 수
[비평] ‘이니셰린의 밴시’, 재앙은 어떻게 제의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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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며 어딘지 계속 브레이크가 걸린 이유는 아마도 내가 배배 꼬인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스즈메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에너지로 가득한 친구다. 처음 본 남자에게 반해 이변이 일어나자마자 문제의 장소로 달려가고, 일상으로 복귀하라는 전문가의 조언을 가볍게 무시한 뒤 끝까지 소타를 책임지며 일본 열도를 종단한다.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금방 친해지며 종국엔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마을의 위기를 막아내는 스즈메는 의지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가히 초인적이다. 스즈메가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묻는다면 답은 두 가지로 짐작해볼 수 있다. 하나는 원래 타인의 곤란한 상황을 참지 못하는 착하고 이타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스즈메가 한명의 독립된 인격체라기보다는 그렇게 결정된 이야기 속 당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도호쿠 지방 이와테현에서 이미 한번 저승의 문턱을 넘어갔던 스즈메는 돌고 돌아 이야기를 끝맺기 위해 처음부터 운명지어졌다.
세
[비평] ‘스즈메의 문단속’과 ‘이니셰린의 밴시’, 긍정의 함정과 비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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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웨일>은 가족에 관한 이야기인가? 그렇다. 다만 그것은 <모비딕>이 고래에 관한 이야기라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스스로 <모비딕>을 인용하고 있는 <더 웨일>은 <모비딕>과의 관계를 통찰할 때 다양한 상징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모비딕>이 그러했듯이 <더 웨일>을 미국, 그리고 현대사회에 관한 알레고리로 볼 수도 있다. <더 웨일>을 거울처럼 반전된 <모비딕>이라고 본다면, <더 웨일>의 찰리(브렌던 프레이저)는 고래 모비딕이 아니다. 찰리는 일종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모비딕을 잡으려는 선장 에이해브를 닮았으며,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려 하는 오디세우스와도 유사하다. 내면의 어두운 곳에서 죽음을 갈망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오디세우스의 욕망이 삶보다 거대한 무엇에 대한 갈망인 것처럼, 찰리의 죽음을 향한 갈망 또한 단
[비평] ‘더 웨일’, 숭고함이 침묵하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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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에 어긋나는 일이나 사람을 비난할 때 우리는 정의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그것이 집단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 확신은 강해지고 수정 불가한 당위가 된다. 내가 굳게 믿어온 신념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때는 늦는다. 이성과 합리가 끼어들 자리에 이미 비대한 확신이 들어앉은 다음이기 때문이다. <어떤 영웅>은 얼핏 아시가르 파르하디 감독이 꾸준히 이어온 테마를 계승하는 정도의 작품으로 보이지만, 그보다 한결 인류학적이다. 의심하지 않는 확신이 누군가의 명예를 한순간에 추락시키는 일이 SNS 시대에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세 유럽으로 가보자.
지난해 가을 취재차 방문한 독일 남부의 로텐부르크. 13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이 ‘자유제국도시’로 지정한 황제 직할 도시 중 하나였다. 이후 800년에 이르는 세월 속에 숱한 전쟁을 거치면서도 로텐부르크는 성내 건물들을 고스란히 지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측 미군 지휘관이 이곳의 역사적 가치를 알아보고 공습을 중단토
[비평] ‘어떤 영웅’,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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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사과집 방송국 시사 PD이자 에세이스트. <딸은 애도하지 않는다> <싫존주의자 선언> <공채형 인간> 저자.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송혜교)이 학교 폭력의 복수를 결심한 가해자는 다섯명이다. 생사 여부로 복수를 결산해보자. 두명의 남자 가해자는 모두 목숨을 잃은 반면, 세명의 여자 가해자는 살아남았다. 왜 그들은 죽지 않았을까?
가해자들 사이의 젠더라는 위계
문동은이 박연진(임지연)에게 주려고 한 것은 ‘사회적 죽음’이다. ‘너의 아주 오래된 소문’이 되는 방식으로. 오늘부터 모든 날이 흉흉할 거라는 체육관에서의 경고는 연진이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수상할 만큼 대중적인 인물이기에 더 효과적이다. 특히 젊고 아름다운 기상 캐스터일수록, 흉흉한 소문으로 인한 추락의 낙차가 크다. 전재준(박성훈)은 공사 중인 건물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지만, 연진은 사회적 지위, 명예, 영광(glory)으로부터 추락한다. 그건 ‘여성’이 대상일
[비평] ‘더 글로리’의 복수는 가해자의 성별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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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로리>가 끝난 시점에 되묻고 싶다.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에 어떤 화두를 던졌나. 동은(송혜교)을 괴롭힌 가해자들은 저마다 저주의 신탁이라도 받은 양 과시적인 형벌을 보여주지만 나는 냉동된 소희(이소이)의 시신이, 재준의 옷가게에서 숙식하다가 간신히 고시원으로 도망친 경란(안소요)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온 생을 걸어 복수를 준비해온 주인공의 치밀한 설계도가 학교 폭력의 방지와 처벌에 어떤 사회적 나비효과를 일으켰는지 조금의 묘사도 보지 못했다. 대신 내가 본 것은 저마다 여러 층위의 고통 속에 놓인 피해자들이 한데 뭉쳐지고, 저마다 양상이 다른 가해자들이 깡그리 지옥에 던져지는 광경이었다. 집단화된 증오와 단죄 속에서 한쪽은 분열했고 한쪽은 지옥에서도 지켜낸 선의와 믿음으로 연대했다. <더 글로리>의 쾌감이자 아름다움이면서, 찝찝함을 지울 수 없는 편의적 이분법이기도 한 이 거대한 피해자-가해자 구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비평] ‘더 글로리’ 속 뭉뚱그려진 피해자들과 해결되지 않은 폭력의 잔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