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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보스톤>(이하 <보스톤>)은 역사적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거미집>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하며,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이하 <천박사>)은 웹툰을 각색했다. 추석 시즌에 개봉한 이 세편의 영화는, 지금의 한국영화가 스토리를 발굴하는 세 경향을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세 영화의 흥행 스코어를 모두 합해도 300만명에 못 미친다(한주 늦게 개봉한 <30일>과 <크리에이터>를 합해도 400만명이 안된다). 그러니까 추석부터 이어진, 흥행에 꽤 유리한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들 영화는 관객을 유혹하지 못했다. 추석영화 모두가 손익분기점을 못 넘긴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는 했지만 그 결과가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지금의 이 흥행 스코어가 극장이나 한국영화의 미래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들 작품이 지금 한국영화계의 어떤 변화를 미약하게나마 보여주는 것이
[비평] 2023년 추석 시즌, 극장에서 떠올린 상념들, <1947 보스톤> <거미집>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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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꿈을 꾼 것 같다. 지난 4년간 다큐멘터리 13편을 취재·연출했다. 이들 중에는 세상에 내놓을 정도는 된다고 여기는 것도 있고 그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서는 경우도 있다. 칸영화제 취재기처럼 한달 만에 급조한 것도 있고 오랜 기간 땀과 눈물을 흘리며 인류의 위기를 걱정한 특집 다큐멘터리도 있다. 모두 초저예산 독립영화 수준의 제작비와 가차 없는 제작 기간 속에 낳은 자식 같은 아이들이다. 산고는 대개 화면엔 드러나지 않는다. 난관의 시작은 카메라 앞에 등장인물을 모시는 과정부터다.
주제에 맞는 인물을 찾더라도 대중 앞에 나서겠다는 이는 몹시 드물다. 비슷한 일을 겪은 다른 분을 찾아내더라도, 제작 기간 내 서로 일정이 맞지 않기 일쑤다. 세상 모든 영상 제작자에게 코로나19는 누구도 겪어본 적 없는 제약을 가져왔다. 무슨 수를 쓰든 그분을 만나야 해. 어떻게든 만나서 그 말 한마디를 받아야 한다. 가까스로 카메라 앞에 세웠는데, 전화로 나눴던 말씀을 촬영 중에는 왜 안 하
[비평] 다중몽(多重夢), ‘거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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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놀라운 걸작 <당나귀 EO>를 말하기에 앞서, 이 작품이 두번의 오마주를 거친 결과물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당나귀 EO>가 각색한 <당나귀 발타자르>는 로베르 브레송이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각색했다고 밝힌 영화다. 브레송은 <백치>의 주인공 미쉬킨이 당나귀에 관해 말한 짧은 대목을 읽고, 아예 미쉬킨을 당나귀로 치환한 새로운 서사를 착상했다. 하지만 <당나귀 발타자르>는 <백치>와 무연하다고 봐도 무방한 독자적 작품이다. 갑작스레 상속된 유산, 공원의 벤치 장면 등 원작을 연상하는 요소가 엿보이지만 그 정도 유사성은 다른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장기인 시끌벅적한 난장판과 과장된 만화적 유머 감각 대신 평론가 폴린 케일을 질색하게 했던 지독한 엄숙주의가 있다. 우리는 <백치>를 각색했다는 브레송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서로 다른
[비평] 죄의식 대신 물질의 흐름에 집중한 시청각적 환상곡, '당나귀 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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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새 좀 봐요.” 새로운 요양 병원으로 아버지를 모셔온 산드라(레아 세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말한다. 귀여운 새들이 새장 안에 있다. 이 대수롭지 않은 장면에서 쓸쓸함이 묻어나는 이유는 (철창 안에서만 날아다닐 수 있는 새들을 통해) 시종 이동하더라도 그 이동의 굴레 자체에 갇혀 있을 삶을 무심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내 보는 산드라의 일상에는 출구가 없다. 그녀는 지금 아버지의 병환, 딸아이의 성장, 뜨겁지만 위태로운 연애 사이에 가로막혀 있다. 그러나 <어느 멋진 아침>의 태도는 부정한 세계가 반복된다는 진실을 비관하는 데 그치기보다, 그 안에서 불쑥 조우하는 기쁨과 슬픔의 디졸브를 기껍게 여기는 편이다.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희곡 <파랑새>처럼 모험을 경유함으로써 행복을 성취하기 위한 현실의 재인식에 교훈을 두는 서사는 이제 흔해졌다. 희비를 수용하는 일은 판타지로의 도피 없이, 반복되는 매일의 한가운데서 이행되어야 한다고 <어느 멋
[비평] 기쁨과 슬픔의 디졸브, ‘어느 멋진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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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꽤나 근사하게 만들어진 한국영화다. 이 영화에 대한 주된 긍정적 평가는 영화가 깔끔하다는 것이다. 스릴러, 공포, 오컬트, 코미디와 같은 장르의 클리셰를 활용하면서도 지저분하게 뒤섞지 않았다는 것은 영화의 성취를 설명하는 정확한 진술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는 것만큼이나 의심에 말을 거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비록 그 절차가 다소 부정확한 단언과 과장을 동원한다 해도 말이다. 더군다나 나는 이런 영화들을 볼 때 좀처럼 서스펜스의 안쪽으로 빠져들지 못하는 편이다. <잠>이 몰입의 충실함을 관객의 역량으로 불러들이는 영화라면, 나는 전적으로 실패한 관객이다.
밀고 당기는 스펙터클의 주변부로 밀려나면서 떠올린 것은 영화와는 다소 무관한 징후들이었다. 신혼부부의 불안과 몽유병이라는 불확정적 상태의 중첩으로 극을 이끌던 스릴러가 빙의, 무속과 같은 요소들을 불러들일 때, 장르를 확장하고 변주하는 개성만큼이나 영화가 기어코 한국형 오컬트라는 장내에서 호명되
[비평] 잠과 청결,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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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어파이어>의 후반부, 갑작스러운 통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출판사 대표 헬무트(마티아스 브란트)의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온 나디아(파울라 베어)는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에게 외친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안 보여?”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말하던 헬무트가 사실은 암 환자 병동에 입원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떠나가는 나디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레온은 두눈을 감싸고 탄식한다. 되짚어보면 영화의 첫 장면에서 운전 중인 펠릭스(랭스턴 위벨)가 자동차 고장을 감지하며 비슷한 말을 건넸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그러나 창밖을 향해 눈을 감고 있던 레온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답한다. 그는 세계를 보고 듣지 않는다.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어파이어>를 휴가의 영화라고 말한다. 물론 이 영화는 여름휴가를 보내는 네 남녀의 우연적인 만남을 다루고 있으며, 그들 사이의 복잡한 감정과 날씨
[비평] 주인 없는 영화, ‘어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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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이치로의 소설 <한 남자>를 읽고 남긴 독서 메모를 보니, “다소 설명적이고 논평적”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 문구 때문이었을까? 이시카와 게이 감독의 <한 남자>는 소설과 전혀 다른 질감의 영화로 다가왔다. 원작 소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소설의 사변적 설명을 이토록 매력적인 ‘영화적 행간’으로 연출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비 오는 오후 문구점의 리에(안도 사쿠라)의 눈물, 낯선 손님의 등장과 멈추는 눈물, 그리고 정전으로 리에의 마음만큼이나 어두워진 문구점을 환히 밝혀주던 불빛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실질적인) 첫 장면을 떠올려보라. 이 장면만으로도 이시카와 게이가 소설의 이야기를 어떻게 영화적으로 압축하고, 형태 변환하는지 느끼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낙인 찍힌 자들의 뒷모습
‘타니구치 다이스케’라는 이름이 죽은 남편(구보타 마사타카)의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 부인과 시아주버님(인 줄 알았건
[비평] ‘한 남자’, 누군가의 뒷모습을 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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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불가능에 도전한다. 영화는 스탈린의 ‘피의 대숙청’ 시기라 불리는 1938년을 배경으로 한다. 반역 세력을 색출해 처형하는 일을 진행하는 비밀경찰 조직 엔카베데(NKVD) 소속 볼코노고프 대위(유리 보리소프)는 자신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자 피해자 유가족들을 방문한다. 가해자인 그가 과연 피해자로부터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영화는 볼코노고프의 발걸음을 통해 아직도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스탈린 시대의 감춰진 역사적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선다. 나탈리야 메르쿨로바, 알렉세이 추포프 부부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역사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을 차용한 ‘환상적 우화’에 가깝다고설명한다. 때론 완벽한 고증을 거친 역사적 재현보다 우화적 재현이 역사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틈새를 만든다.
도망에서 구원으로
영화에 이러한 틈새를 만드는 두번의 추락이 있다. 볼코노고프는 출근길에 직속상관인 그보즈데프 소령(알렉산드르 야첸코)의
[비평] 두번의 추락에 대하여,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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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드라마에서 참기 힘든 순간은 극 중 유튜버나 BJ의 방송 장면이 등장할 때다. 인터넷 개인 방송이나 광고 영상은 보고 싶지 않을 경우 스킵하거나 음소거 버튼을 누를 수 있지만, 작품에 삽입된 방송 장면은 서사 전개에서 결정적인 정보를 노출할 때가 많기에 관람을 포기할 작정이 아니라면 웬만해서는 참고 넘기기 마련이다. 개인 방송 장면에서 느낀 곤란함은 파운드푸티지 방식의 장르영화를 볼 때와 유사한, 강조된 리얼리티에 의한 곤란함이다. 리얼함을 겨냥하는 장르 안에서 사실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오히려 사실성과 멀어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드라마 <마스크걸>의 주인공 김모미(이한별)는 밤에는 ‘마스크걸’이라는 이름의 BJ로 이중생활을 하는 회사원이다. 검은 머리에 무채색 정장 차림의 모미는 퇴근 이후에는 두눈을 제외하고 온 얼굴을 덮는 반짝이는 마스크에 밝은색 가발을 쓰고,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강조되는 짧은 원피스를 입은 마스크걸이 된다. 그는 손담비의 <
[비평] 이미지 시대의 복화술, ‘마스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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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에게 시련을 안기면 드라마가 되고 집단에 재앙을 내리면 재난영화가 된다. 영화의 내러티브가 인물에게 위기를 주어 그들의 선택을 지켜보게 하는 동안에 어떤 카메라는 그 얼굴을 주시한다. 두편의 한국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보호자>를 연이어 보고 하나의 글에서 다루기로 한 이유는 많은 점이 상이한 두 영화에서 도드라진 공통점으로 얼굴의 클로즈업을 보았기 때문이다. 분절된 신체 이미지에서 시작된 얼굴의 클로즈업은 현대 상업영화에서는 또 다른 영화적 장소로서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기보다는 얼굴의 향연에 가깝게 전시되는 듯하다. 상업영화에 스타의 얼굴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얼굴의 클로즈업이 그저 영화의 부품처럼 장면의 최소 단위 기능만 수행하는 데 그치고 마는 것은 아쉬운 현실이다. 반대 지점에서 접근한다면 근접한 얼굴숏은 어떤 기능만큼은 충실하게 이행한다는 것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호자>에서는 무엇과의 사이를 벌
[비평] 카메라 너머의 얼굴들, ‘보호자’와 ‘콘크리트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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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에는 정치가 없다. 그래서 정치적이다. 영화의 마지막, 명화(박보영)가 묻는다. “여기 살아도 돼요?” 이 공간에서 거주해도 되냐, 그리고 자신이 살아 있어도 괜찮냐는 이중의 의미를 실은 질문에 누군가 답한다. “살아 있으면 그냥 사는 거지. 뭘 물어.” 명화는 사는 데 필요한 건 자격과 조건이 아니라는 선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흰 쌀밥을 꼭 움켜쥔다. 마치 종교화처럼 쉽고 간명한 상징과 우화의 이미지. 중세 암흑시대 교회 프레스코화에 가까운 강력한 프로파간다의 메시지. 정정해야겠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정치가 없는 게 아니라 메시지 전달에 실패한다. 이어 그 실패의 자리에 어떤 호소보다 강력한 동일시가 이뤄진다. 다름 아닌 영탁(이병헌)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통해서 말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굴리는 시뮬레이션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유토피아에서 또 다른 유토피아로 이동하는 이야기다.
[비평] ‘콘크리트 유토피아’, 우리는 영탁을 부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