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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질 때까지.” 활짝 폈을 때가 아니라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을 소멸시키는 순간에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벚꽃의 이미지는 일본 미의식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모노노아와레’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슬픔이 동반된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 그것이 <경성크리처>가 구현하려 한 영화의 주된 정서다(이러한 정서와 관련된 몇몇 장면은 <화양연화>에서 차용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경성크리처>는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대가 그 아름다움이 슬픔으로 끝맺을 수밖에 없는 비극을 잉태했다고 말하려 한다. 하지만 <경성크리처>가 추구하는 슬픔의 정서는 ‘크리처’를 제목으로 내세운 작품에 대한 관람자의 기대에서 크게 어긋난다. 관람자는 괴물의 힘으로 미칠 듯이 질주하는 속도감의 작품을 기대했겠지만, 슬픔의 정서를 추구하는 경향은 이 질주의 속도를 한없이 늦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와 감독이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크리처를 중심으로 한 재난의
[비평] 괴물은 시간을 먹고 자란다, ‘경성크리처’와 한국 크리처물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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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에 실린 기왕의 <서울의 봄> 평론들을 읽었는데 다들 대체로 박한 평가를 담았다. 천만 관객을 넘기며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이 영화에 대해 나는 좀 후한 평가를 내리고 싶다. 장병원, 안시환, 김예솔비 등 <서울의 봄> 개봉 초기에 이 영화를 논한 평자들은 공통적으로 12·12 반란 세력의 봉기를 막지 못한 기성 권력의 실패를 남성성의 신화로 위무한다고 비판했는데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공허한 권력의 실체
이 영화 후반부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들로 시작하고 싶다. 반란 성공이 확실해지고 수괴 전두광 장군(황정민)은 일행과 함께 본부로 돌아가려다 혼자만 차에서 내려 걸어간다. 그는 승리를 혼자만의 시간으로 만끽하고 싶다(전두광 혼자 돌아가는 장면을 찍어둔 것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환희와 고독이 동시에 휘몰아치는 그의 내면의 기운에 카메라가 동참할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는 것은
[비평] 관료주의의 무능, 권력자의 광기, 그리고 인간의 존엄 - <서울의 봄>이 상기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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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 놓인 아날로그 라디오를 통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알리는 뉴스가 들려온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한 장면. 단순한 사물과 소리의 결합이지만 기묘하게도 과거와 현재 시제가 뒤섞인 듯한 인상을 건넨다. 여전히 20세기에 남겨진 것처럼 보이는 시대착오적 연인들의 멜로드라마 위로 동시대 전쟁과 폭격을 알리는 소식이 겹쳐질 때, 이 평범한 외형의 장면으로부터 생경한 질문이 생겨난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그들은 라디오 뉴스가 전해주는 현재의 시간에 정착할 수 있을까? 카우리스마키의 카메라가 포착해온 연인들. 그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느 시간에 머물다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카우리스마키는 은퇴를 번복하고 완성한 이 영화가 필모그래피 초기에 만들어진 ‘프롤레타리아 3부작’의 연장선에 있는 네 번째 연작이라고 밝혔다. 그의 말처럼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두 연인에게 드리워진 시선은 일자리를 잃어버린 빈곤한 노동자들의 삶을
[비평] 극장 앞의 평범한 연인들, <사랑은 낙엽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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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노량: 죽음의 바다>(이하 <노량>)를 한번 보고 쓴 글이다. <노량>을 다시 보는 선택지도 있지만, 그러지는 않을 작정이다. <노량>이 전쟁영화라는 사실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전쟁영화를 여러 번 관람한다는 것은 전쟁영화광이 아니라면 고문에 가깝다. 영화평론을 업으로 삼고 있으니 견뎌야 한다고 말하는 이는 부디 없기를 바란다. 있다면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곧 크리스마스가 아닌가(이 글은 크리스마스 이후 공개되겠지만, 내가 이 글을 쓰면서 크리스마스를 지났다는 사실 역시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평론가라면 모름지기 <노량>보다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 관해 쓰고 싶을 것이다. 다만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 한다. 참모총장의 거듭되는 부탁에 원치 않던 수도경비사령관 직을 수용한 이태신(<서울의 봄>)이라도 된 듯 짐짓 결연한 자세로 말이다. <노량>은 비평이 필요하지 않은 영
[비평] 전쟁영화의 무의식은 어디에 떠 있는가, ‘노량: 죽음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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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속 인물들이 옷을 갈아입는 행동을 의미심장하게 곱씹곤 했다. 카우리스마키는 평소에 존경한다고 밝힌 오즈 야스지로의 인물들이 옷을 입는 동작을 오마주하듯, 환복과 같은 일상의 동작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응시하곤 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오즈와 카우리스마키의 옷 입는 행위에 부여된 속성은 다르다. 후기작으로 갈수록 거의 반자동적으로 수행되는 나른한 일상의 운문적 리듬을 조탁했던 오즈는 남루한 생활감이 표백된 세련된 부르주아 가옥으로 향했다. 이와는 달리 카우리스마키의 노동자들에게 현재의 일상이란 관능적 매혹이 결여된 공장에서의 지루한 노동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늘의 버거운 일상을 벗어나 특별한 미래를 꿈꿀 때 옷을 갈아입는다. 그 미래는 새로운 인연과의 만남이 기다리는 시간이다. <성냥공장 소녀>의 소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데이트를 준비하며 비싼 옷을 사입고, <희망의 건너편>에서 핀란드로 밀항한 난민 칼리드는 이민청에 망명
[비평] 쓰라린 과거를 뒤로한 채, 우리는 영화를 본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시제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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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은 답을 주는 대신 질문하게 하며 상반된 답들 사이에서 긴장을 유발하는 역할을 한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충실히 거장의 경전 구절에 복무한다. 그래서 모호하다. 음악 팬들은 브루노 발터의 대타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는 25살 레너드 번스타인(브래들리 쿠퍼)의 모습에 가슴이 뛰다가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같은 브로드웨이 하이라이트와 베를린장벽 붕괴 기념 음악회 등 중요한 순간이 축소된 영화를 당황스럽게 바라본다. 번스타인이 1973년 케임브리지 일리 대성당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말러 교향곡 2장 롱테이크 신 정도를 제외하면 클래식 애호가들의 구미를 당기는 장면은 거의 없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연극 혹은 뮤지컬처럼 느껴진다. 극의 주인공은 번스타인 혼자가 아니다. 번스타인과 그의 아내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캐리 멀리건)의 부부 관계가 핵심이다. 매튜 리바티크가 촬영하고 미셸 테소로가 편집한
[비평] 거장의 어깨 옆에서,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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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상업영화라도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취하는 영화는 과거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형식적 고민 없이 성립되기 어렵다. 대다수의 상업영화에서 그러한 형식은 주로 이야기의 시점을 표명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역사가 소시민의 일상을 통해 비치는지, 의사 결정권을 가진 자들의 권력 다툼으로 묘사되는지, 혹은 시민과 공권력의 부딪힘을 통해 촉발되는 이야기인지에 따라 영화가 수행하는 재현에 대한 충실도가 달라진다. 물론 여기 언급한 사례들이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영화가 구할 수 있는 시점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업영화는 역사와 픽션을 접속시키는 데 필요한 형식적 절차에 대한 고민을 서사적 시점의 문제로 치환하는 경향이 있고, 영화의 초반부에 결정된 시점은 관객과 역사적 사실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이태신과 전두광
<서울의 봄>은 명백히 두 번째 사례에 해당한다. 즉, 정권을 둘러싼 군대 조직 내부의 권력 다툼과 파열을 충실히 중계하는 영화다. 영화
[비평] 사유하지 않는 시대의 징후 - <서울의 봄>이 요청하는 관습적 보기를 의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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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큰따옴표 안에 있는 말은 모두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의 대사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 글을 마감하고 있는 12월19일, 오늘자 일간지를 펼친다. 북한은 고체연료 ICBM을 또 쐈다. 한미 핵작전 훈련 예고와 미국 전략핵잠수함의 부산항 입항에 따른 리액션 성격이다. 남북간 힘겨루기는 냉전에서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태세로까지 치닫고 있다. 강대강 구도는 일단 시작되면 어느 한쪽에서 그만두고 싶어도 멈추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진짜 위기는 “이 모든 걸 조종하는 자가 없다는 것”일지 모른다. 많은 경우 재난은 집단의 산물이다. 통제 없는 강대강 구도는 미시 세계에서도 펼쳐진다.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종류도 다양한 인플루엔자 유행에 이어 마이코플라즈마 폐렴이 창궐했다. 코로나19 이후 항생제 투약 급증에 따라 슈퍼박테리아가 내성을 키운 탓이라는 분석이다. 우리는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항생제는 “옳은 일이니까” 처방했겠지만 “결국 우리
[비평] 재난사회와 그 적들,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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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이랜드>는 하이더르(알리 준조)가 유령 역할을 맡아 흰 천을 뒤집어쓴 채 조카들과 유령놀이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소 범박하지만 흰 천에서 영화관의 스크린을 떠올려볼 수 있다면, (극)영화 또한 배우들에게 개별 역할을 부여하여 작동되는 일종의 역할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이랜드> 속 인물들은 그 어떤 극의 배우들보다도 더 엄격한 사회적, 가족적, 관습적 역할극에 복무해야 하는 처지다. 문제는 그 역할극이 지극히 경직된 채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화면비가 강조하듯 그들은 억압과 속박, 구속과 굴레로 유지되는 역할극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파키스탄 아만(살만 파르자다) 집안의 차남 하이더르는 어느 날 백업 댄서 일자리를 얻는다. 미용사라는 자신의 직업에 열정과 자부심을 지닌 하이더르의 아내 뭄타즈(라스티 파루프)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취업 선언과 함께 강제로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때 뭄타즈의
[비평] 속박의 역할극이 막을 내리면, ‘조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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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엔딩 장면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쓴 에세이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서 읽은 한 문장이 떠올랐다. 그는 <하나>의 각본 초고에 “의미 있는 죽음보다 의미 없는 풍성한 삶을 발견한다”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두 소년이 활짝 웃으며 내달리는 모습이 ‘풍성한 삶’ 그 자체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두 소년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벅차오를 수 있다니, 참 신기한 경험 아닌가. 두 소년은 어떻게 이 풍성한 삶 속으로 풍덩 하고 빠져들 수 있었을까? 그 수많은 괴물들을 물리치고 말이다.
괴물이라는 재난, 재난이라는 괴물
화재와 함께 시작하는 <괴물>은 불타는 건물 위로 ‘괴물’이라는 영화 타이틀을 새긴다.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는 동일한 사건이 각 인물의 시점으로 되돌아왔음을 알리는 하나의 지표다. 그리고 각 인물의 관점에서 진행된 동일한 사건의 끝을 알리는 태풍이라는 재난이 또 하나의 지표로 자리한
[비평] 마음의 재난에서 벗어난 풍성한 삶,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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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프레디의 피자가게>는 11월15일 개봉 이후 현재(11월21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일 관객수 1위를 이어가며 약 37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물론 최근 극장가가 침체에 빠진 상황인 만큼 절대 수치는 높지 않다. 다만 <씨네21> 1432호 기획 기사 ‘마블은 길을 잃었나’가 확인해주었듯 <더 마블스>가 맥을 못 추는 건 이해가 가는 구석이 있는 것과 달리, 절대적 인지도가 부족한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흥행 1위를 이어가는 현상은 분명 주목을 요한다. 이건 북미에서 더욱 눈에 띄는 상황으로 영화는 10월 개봉 첫주 박스오피스 1위는 물론 제작사 블룸하우스 역대 오프닝 1위를 기록했다. <더 마블스>가 흥행 부진에 빠진 것도 비슷한 양상이다. 이쯤에서 궁금하다. 대체 이 작품의 무엇이 까다로워진 관객을 극장으로 이끌었을까.
게임이 영화가 된다는 건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건 게임을
[비평] 영화 위에 관객, 김성찬 평론가의 <프레디의 피자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