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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민족적 과업이다’라는 여론조사 문항이 있었다. 2005년 통일연구원이 한국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였다. 여기에 ‘매우 찬성한다’는 응답이 49.2%, ‘대체로 찬성한다’는 답이 34.7%였다. 합하면 83.9%다(통일연구원, 2005년도 통일문제 국민여론조사). <웰컴 투 동막골>이 800만 관객을 넘긴 그해, 한국인의 절대다수가 통일의 당위성에 동의했다. 같은 기관이 2023년 말 지난 10년간의 조사 분석을 내놨다. 해마다 1천명 이상을 대상으로 200개 넘는 문항을 대면 면접 방식으로 조사해온, 가치가 상당한 연구다. ‘남북한 통일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라는 문항에 긍정 답변을 합한 비율은 2014년 69.3%였다가 남북 정상회담이 있던 2018년 70.7%로 정점을 찍는다.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 지난해 53.9%를 나타냈다(통일연구원, <KINU통일의식조사2023>). 청년층의 인식을 들여다봤다. 2023년 18~29살 응답자의 6
[비평] 확장하는 호모 사케르, '최근 북한 소재의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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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결론부터 말한다면, <더 에이트 쇼>는 ‘자본주의적 리얼리즘’이 지금의 한국 사회를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각 시대에는 나름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있다. 우리의 인식이나 생각이 만들어지는 틀로서의 패러다임 말이다. 우리는 그 틀 덕분에 특정한 생각이나 개념을, 심지어는 ‘나’라는 자아를 구성할 수 있지만, 또한 바로 그 틀 때문에 그 외부를 향하는 사유가 가로막히곤 한다. 가능성이자 한계로서의 패러다임. <더 에이트 쇼>는 이 시대의 패러다임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임을, 그리고 자신이 그에 포섭되어 있음을 감추지 않는다.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쉬울 만큼 자본주의 체제가 견고해진 지금의 상황을 두고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이라고 칭한다.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 경제 체제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비평]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우울한 초상, <더 에이트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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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있다(연재 첫글을 이런 말로 시작하게 돼 유감이다). 알다시피 이 오래된 여성 혐오적 관용구에는 문제가 많다. 일단 ‘여적여’ 프레임은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 사이에서는 진지한 우정도, 사랑도 불가능하다고 전제한다. 오직 절대적이고 강제적인 이성애 세계관 아래에서 우월한 수컷을 두고 다투는 적이 될 수 있을 뿐. 혹은, 여성 퀴어 영화/드라마를 다룬 박주연의 책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를 따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어떤 여자들을 라이벌로 여기라고 했을까? (…) 여자들이 서로 안 싸우면 너무 큰일을 할 것 같아서였을까?” 물론 이 자리에서 ‘여적여’가 실은 남성 중심 사회가 악용하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논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는 아무리 미운 사람(꼭 여자가 아니어도 된다)이라고 하더라도 그를 ‘명백한 적’으로 명쾌하게 분류하는 게 꽤 어렵다는 걸 경험적으로
[이연숙(리타)의 장르의 감정] 다만 ‘여적여’일 뿐, 여성들에게 제한된 관계 다양성이 가리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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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의 희열
‘영화제작에 대한 영화’들이 되새기는 악몽의 원체험, 이제는 얼마간 진부한 은유로 느껴지면서도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는 꿈의 운동은 저 유명한 <8과 1/2>(감독 페데리코 펠리니, 1963)의 첫 장면이다. 차들로 빼곡한 도로 위 자동차 안, 옅은 연기가 새어 나오자 한 남자가 절박하게 유리창을 두드린다. 그 광경을 말없이 구경하는 주변 운전자들의 사뭇 사악한 표정과 시선이 이 순간의 숨통을 틀어막는다. 그때 남자가 자동차 천장을 비집고 제 힘으로 탈출하더니 어느새 가볍게 날아오른다. 바람을 타고 구름 위로 떠올라 갑갑한 세속의 풍경으로부터 유유히 멀어지는데, 땅 위의 누군가가 남자의 발목에 걸린 밧줄을 잡아당긴다. 저항할 새도 없이 그가 바다로 곤두박질친다. 악,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깬 자, 영화감독이다. 구속과 한계, 자유와 권능, 그리고 추락. 아마도 꿈이 이어진다면 자동차 장면으로 돌아와 이 행로는 다시 시작되고 말 것이다. 추락의 결말을 안다고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영화로 꿈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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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아웃2>는 몇몇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전편의 맥을 잇는 준수한 여운을 남겼다고 평가된다. 나도 이 평가에 동의하지만 지면의 한계상 아쉬움을 상쇄했다고 거론되는 종막에 관해서는 논하지 않을 계획이다. 여기서는 속편의 상상력이 전편보다 부족하게 느껴진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 그 아쉬움은 제작진의 역량 부족이라는 단순한 이유보다는, 이 연작이 근간을 두는 원칙의 한계 자체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1편과 2편의 차이에 주목하며 그 한계를 둘러싼 논점을 숙고해보도록 하자.
<인사이드 아웃2>는 전편에서 라일리의 성격 섬 중 가장 큰 크기를 차지했던 가족 섬이 가장 왜소해진 정경을 비추며 시작한다. 속편이 전편과 달리 안정적인 가족 공동체 바깥을 다룰 것임을 암시하는 이 변화는 주제의식의 측면을 넘어 미장센의 전반적 변화와 직결된다. 1편은 식탁과 같은 전통적 가족의 공간에 주목했으며, 주로 화면 중앙에 놓인 라일리를 양쪽의 부모가 둘러싸는 구심적 미장
[비평] 근본적인 불안의 정체에 관하여, <인사이드 아웃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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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 파올로 파솔리니 감독의 단편영화 <리코타>(La Ricotta, 1963)와 장뤼크 고다르 감독의 <열정>(1982) 등은 모두 활인화(活人畵, le tableau vivant) 사용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활인화는 기존 회화, 조각, 문학 속의 구성을 현실 공간에 구현하는 것으로 기존의 구성은 ‘살아 있는’ 모델에 의해 구현되고, 정지상태의 포즈로 구현된다. 말하자면 활인화 구성은 회화적 공간 혹은 허구적 공간과 현실 공간 사이의 차이를 부각하거나 망각하는 작업이다. 활인화를 구현하는 동안 살아 있는 존재는 자기 고유의 운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해야 한다.
활인화의 영화적 대가 중 한 사람은 라울 루이스 감독이다. 라울 루이스는 철학자이자 작가인 피에르 클로소브스키와 협업한 <도둑 맞은 그림에 관한 가설>(1979)에서 한 예술 작품 수집가를 내세워 대저택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일련의 활인화를 해설하게 한다. 이 영화 속 대저택을 거니는 일은 마
[이나라의 누구의 예술도 아닌 영화] 가상, 정지 그리고 성스러움 - 라울 루이스, 파솔리니, 고다르의 활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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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유럽의 시각을 결정지은 두 가지 질서는 영화와 강제수용소에 있다. 영화가 눈에 보이는 것을 기록하는 필름 카메라를 매개로 삼는 특권적인 재현 체계라면, 절멸의 수용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기록을 은폐하고 소각한 체계적 기관이다. 한쪽에선 이미지를 구현하고, 다른 한쪽에선 이미지를 말살한다. 영화가 역사를 창조한다면, 강제수용소는 역사에 구멍을 낸다.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두 체계는 그러나 유사성을 공유하면서 대립한다. 영화와 강제수용소는 바깥에 있던 세계를 내부로 가져와 관측하고 분류하고 조정하는 절차로 형성된다.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행렬과 열차의 도착을 상징적 기원으로 삼는 영화와 수많은 희생자를 열차로 실어 나르며 노역과 학살을 강제한 강제수용소는 제국주의의 열망이 깃든 발명품이자 세계를 포획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장 뤽 고다르가 지적한 것처럼 영화는 강제수용소의 현장에 존재하지 않았고, 이는 표상과 기록장치로서의 영화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여겨진다. 수용소 내부의 이
[비평] 지루함, 따분함, 무의미함, <존 오브 인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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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중반 이후 이미지를 과도하게 전시하는 영화들이 대거 제작되었다. 마티아스 스톡(Matthias Stork)은 자신의 비디오 에세이를 통해 할리우드 액션영화를 중심으로 나타난 새로운 경향을 혼돈의 영화(chaos cinema)라고 불렀다. 그는 다양한 기교를 사용하여 다량의 이미지를 빠르게 보여주는 영화들이 할리우드가 하나의 법칙처럼 지켜온 시공간의 연속성을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 내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혼돈의 영화를 엽총의 미학(shotgun aesthetic)을 앞세워 전통적인 할리우드의 규범을 파괴하는 불온한 존재라고 설명했다.
이 불온한 반란의 선봉에 선 감독 중 한명으로 마이클 베이가 있다. 그가 연출한 <트랜스포머>(2007)와 그 작품에서 이어지는 시리즈는 외계에서 온 로봇 생명체들이 육해공을 넘나들면서 결투를 벌이는 장면을 정신없이 움직이는 카메라, 다양한 프레임과 앵글, 평균 숏 길이의 축소 등을 활용해서 그렸다. 마이클 베이가 추구한 엽
[이도훈의 영화의 검은 구멍] 트랜스포머의 변신은 유해하지 않습니다, 21세기 할리우드에 나타난 혼돈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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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은 볼 수 있어도 향기는 맡을 수 없다. 피부에 닿는 감촉과 존재의 무게 역시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시각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뇌로 전달해 인지와 수용을 거쳐 감정과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지각 과정이다. 움직이는 영상과 음향으로 이루어진 영화를 받아들일 때 그래서 가장 먼저 강조되는 감각 체계는 시각과 청각이다. 영화에서 타인의 꿈이 펼쳐지거나 정신분열을 예견하는 이명의 사운드는 들려올 수 있어도 냄새나 감촉은 후각과 촉각의 감각경험으로 전달될 수 없다. 오늘날 영화적 체험을 보다 많이 말하는 이유는 그 때문일까. 스크린X와 아이맥스에서 강조하는 압도적인 시각 스케일이나 4D 상영처럼 눈으로 보는 동시에 신체의 다른 외부감각을 자극하려는 ‘체험’적 관람은 영화의 선천적 결핍을 메워보려는 스크린 바깥의 기술적 시도다. 시각과 청각 외 감각의 증폭과 확장으로 향하는 영화(기술)의 열망은 인간의 오감을 모두 아우른 뒤에야 멈출 수 있는 것일까. <프렌치 수프>와
[비평] 부재하는 것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프렌치 수프>와 <원더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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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랜드>를 어떤 계보나 맥락에 놓고 봐야 할까. 이런 의문이 들었던 이유는 영화가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본 듯한 이미지가 넘실댐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거의 영화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좀 심하게 들린다면 적어도 한국영화처럼 보이지 않았다. 배우 탕웨이의 에피소드에서 중국어와 영어, 한국어가 뒤섞이는 상황이나 영화의 배경이 다소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영향도 물론 있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영화가 주는 이질감은 무엇일까. 당혹스러운 마음을 가다듬고 김태용 감독의 전작 <만추>(2010)를 떠올려보자. <만추>의 배경인 시애틀은 안개의 모티프를 생성하기 위해 소환된 장소다.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안개처럼, 이 장소 속 두 주인공 역시 그렇다. 안개는 제삼의 캐릭터이자 감정을 고취하는 적절한 조정자였다. <원더랜드>에 이르러 영화의 장소는 그보다 추상적으로 인식된다. 김태용 감독은 전작의 일시적 장소이자 플랫폼으로서의
[비평] 빈곤한 공감의 장소와 위기의 한국영화, <원더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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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8개 부문을 수상했고, 오스카 시각효과상까지 거머쥔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결국 국내 극장에 걸리지 못했다. 물론 이는 괴수물이 꾸준히 국내 관객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몬스터버스의 다섯 번째 영화 <고질라X콩: 뉴 엠파이어>는 북미에서의 성공과 달리 국내에선 51만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다. 앞선 세편의 몬스터버스 고질라 영화도 100만 관객 동원에 실패했다. 2016년 개봉 당시 일본 흥행 2위를 기록한 <신 고질라>는 국내 관객 7592명이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았다. 봉준호의 <괴물>이나 심형래의 <디 워>, 혹은 피터 잭슨의 <킹콩>처럼 흥행에 성공한 괴수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각각의 흥행이 하나의 현상처럼 여겨졌음을, 나아가 <고질라> 시리즈와 같은 전통적인 ‘거대 괴수물’의 흥행이 없다시피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
[비평] ‘고지라’의 타임 패러독스, <고질라 마이너스 원>